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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조회수 | 2,273
작성일 | 06.07.29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똑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신다면 나는 무엇을 달라고 청하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비유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온 재산을 포기할 만큼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현명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솔로몬 왕은 하느님께 바로 이 지혜를 청해서 받습니다.
그리고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하느님의 숨겨진 지혜요, 보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차지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손 때 묻은 인형이나 장난감이 가장 소중한 보물이요, 어쩌다 생기는 동전 몇 푼, 과자봉지에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큰 세상 것들을 보고 들을 만큼 성장한 후에는 더 이상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또 세상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현실적인 계산법에 익숙해져 내가 손해보는 짓일랑은 알아서 하지 않게 되고, 내 것, 내 이익에 관계되는 것이면 놓치지 않는 영악스러움이 몸에 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 이익, 내 것이라는 그 분명한 선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디에 가치 기준을 두고 있는지 문득 스스로에게 물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것처럼 한 가지 소원을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청할 수 있을지. 머리가 커진 나는 어린 시절처럼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해서 이것 저것 따져보느라 선뜻 대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살만큼 소중한 것도 없이, 그저 남들처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니까 의미 없는 것들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시간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한번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

대구대교구 이수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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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도 필요한 기적

사람이 빵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하신 예수님이시지만 배고픈 군중을 위해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미 병자들을 치유하신 놀라운 능력을 본 군중들은 열광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피하여 떠나셨고 집요하게 예수님을 찾아낸 군중들과 영원한 생명의 빵에 대한 논쟁을 벌이십니다. 결국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로 이어졌지만 예수님께서 배고픈 군중을 측은하게 여기시고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 먹이고자 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에게는 빵도 필요하고 말씀도 필요합니다.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당장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에게 삶의 의미나 고상한 정신이나 영혼의 구원이란 것이 얼마나 한가하고 허황된 말로 들리겠습니까? 만일 교회가 사람들의 구체적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함께 나누며 대처할 수 있었다면 하느님을 적대하는 공산주의라는 괴물의 등장을 막을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축복하시고 함께 하셨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같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서 밀려나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마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그 양상은 더욱 심각합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결코 의롭지 못한 세상입니다.

물론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지 못하는 한 인간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을 인간답게 합니다. 그러기에 더더욱 빵을 우상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더 소중히 받들며 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 더욱 절실히 울리는 오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통해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행하고 싶어 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그 분께 내어드린다면 예수님의 기적의 힘을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박석재 가롤로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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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많이 다녀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밟으셨던 거룩한 땅이기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집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여러 곳들을 순례하면서 전해지는 느낌은 감격 그 자체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개인적으로는 오병이어 성당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곳 바닥에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는 빵 네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왜 빵이 다섯 개가 아니라 네 개인가 하면 나머지 한 개는 미사 중에 사제들의 손에 의해 축성되고 있는 빵이라서 그렇다고 설명을 합니다. 즉 지금도 나눠지고 있는 빵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 들려주시는 말씀은 성체 성사를 미리 보여주시고 또 그 의미를 가르치시는 것이라고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대목은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합니다. 먼저 이 ‘아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의미하는 것은 그 익명성을 통해서 ‘모든 작은이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거칠고 보잘 것 없는 것들 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양도 얼마 되지 않아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할 만 합니다.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빵이 예수님의 손으로 전해지고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나눠집니다. 더 이상 배고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셔서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은 내어 놓음은 곧 받아들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빵을 내어 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 빵을 받아먹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빵을 내어 줌으로써 그 빵을 받는 상대방을 받아들이듯이 만약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내어 준다면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활하는 무대에서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집니다. 그 인물들 가운데는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가 가진 무엇을 내주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힘듦과 불평의 시간을 지내고 있다면 그 시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또한 무엇을 내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내주어야 할 무엇을 오늘 제2독서에서는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 삶의 원리가 성체성사의 삶이 내어줌으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모든 이를 또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지금도 나눠지고 있는 그 하나의 빵이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박상용 요한 신부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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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처럼 연민의 정으로

성경 말씀을 읽다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고통에 아주 민감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루카 복음을 보면 병자 치유 이야기와 구마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마귀를 쫓아내시고, 심한 열로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시고, 사람들이 데려온 많은 병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나병 환자, 중풍병자, 손이 오그라든 사람, 이렇게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시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백인대장의 노예, 과부의 외아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쳐 주시는 그런 장면들을 생각하면, 우리들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께서 지니신 연민의 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좀 쉬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았는데, 예수님의 연민을 필요로 하는 군중들이 밀어 닥칩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떤 희망을 갈구하며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 쇠사슬같이 엮인 권력에 돌파구를 찾는 사람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인생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

배를 곯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배고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지요. 아픈 적이없는 사람이 아픈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그 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주시고 또한 그들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아시고 허기를 면하게 해 주십니다. 배가 고픈 것은 참 비참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 굶고 있는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쌀 두 되박을 싸들고 그 집에 갔습니다. 며칠 동안 굶주린 그 집 엄마는 그 귀한 쌀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자기 집과 똑같이 굶고 있는 앞 집 이슬람 가족에게 주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예수님처럼 먹을 것을 주었고, 그 엄마도 예수님처럼 먹을 것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이 구세주로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배고픈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시고, 고통과 눈물로 얼룩진 인생을 고쳐주시고 용서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당신을믿는 우리들에게도 서로 사랑하라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아픔, 굶주림, 눈물에 예수님처럼 보고 듣고 민첩하게 도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박병럐 안토니오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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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봉헌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 사도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으로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군중이 너무 많아서 먹을 빵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까?’ 아마도 제자들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어떤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옵니다. 그 빵을 안드레아를 통해서 예수님께 전달합니다. 보리빵은 지금으로 말하면 너절한 음식입니다. 당시에 밀가루로 빵을 해 먹었는데, 보리빵이라고 하는 것은 빈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장 가난한 사람이 먹을 음식을 어떤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들고 옵니다. 왜 예수님께 들고 왔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아닐 겁니다.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표현이었을 것입니다.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는 상황에서 모두들 배가 고플 때, ‘예수님 역시배가 고프실 거야!’ 그 어린아이는 예수님께 먹을 것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배고픔이 해소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린아이에게서 빵을 받으십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의 손에 있는 빵을 받고는 사람들을 자리 잡아 앉게 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 거지?’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냥 그들을 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그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십니다. 원하는 만큼의 빵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어린아이의 보리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가장 작은 것, 보이지도 않는 것, 누구나 다 너절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기적을 행하십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이런 식의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 저에게 무엇을 주십시오.’ 라는 기도는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작은 것을 예수님께 가져갔듯이 내가 가진 가장 작은 것,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주님께 봉헌해야합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가장 작은 것을 그분께 드릴 때 그분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 : 2018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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