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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눔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조회수 | 2,387
작성일 | 06.07.2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근방 어느 산등성이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는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들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 중 중요하다고 생각한 주제들을 선택하여 명상하는 식으로 엮어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들은 그것이 사실인 지를 묻기 전에, 그 이야기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들은 정확한 사실만 기록한 현대식 전기가 아닙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그 시대 독자들이 알아듣고, 같은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초기 교회가 이미 거행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하게 하는 표현들이 여럿 있습니다.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는 말로써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하신 파스카, 곧 해방절 식사를 상기시킵니다. 그 식탁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당신의 몸,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파스카를 언급하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분리하여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나누어 주셨다.’는 오늘 복음의 말은 최후만찬 식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초기 교회는 성찬에서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교회가 거행하던 성찬을 염두에 두도록 합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열왕기 하권의 엘리사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 고사(故事)를 바탕으로 발생하였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 그것을 참고했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의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빵 한 개로 다섯 명을 먹였지만, 예수님은 빵 한 개로 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그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면서,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땅에 와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먹이셨다, 마실 것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먹고 마시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방하지 못하는 곳에 하느님이 그를 해방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1독서의 엘리사 이야기에서 보면 사람들은 가진 빵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빵은 사람들의 눈에 형편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었더니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나누는 곳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나누어 주셔서 우리의 생명이 있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우리 눈에 부족해도, 나누는 우리의 실천 안에서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되고 풍요로움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인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을 암시하는 것은, 성찬이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나누면서, 하느님이 우리의 나눔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듣고,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축복과 풍요로움의 기적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먹을 것을 해결하려는 군중을 예수님은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衣食住) 해결의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미는 나눔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질도, 지식도, 자격증도 모두 우리 자신을 가꾸고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도 흔히는 하느님께 조금 바치고 더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자신이 풍요롭게 살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때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세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나눔의 풍요로움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나눔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사는 길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오늘 있다는 사실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동쪽 하늘에 해가 뜨는 일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모두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 풍요롭게 잘 되겠다고 노력하는 세상에, 이웃과 나누고 이웃을 도우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왕으로 우리 생사의 대권을 쥐고 우리를 위협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바친 만큼 받겠다는 우리의 약삭빠른 이해타산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십자가를 지는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서 이웃이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데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누어서 이웃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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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코에 붙이라고
2열왕 4,42-44 / 에페 4,1-6 / 요한 6,1-15

우리는 흔히 좋은 일을 하는데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고
선한 일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옳은 듯 싶은 말입니다.
하지만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닐지라도
잘못된 생각이고
비틀어진 생각입니다.
우선 자신이 가진 것이 자신의 것인 줄 여기는 점이
잘못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가진 능력이나 재산이
오직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인 줄 오인하는 일이기에 그릇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산에서 일어난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온 땅에
그 기적들을 끊임없이 베풀고 계십니다.
익어가는 알곡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마르지 않는 시내가 그 진실을 전해 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해서
자연과 수확을 위한 빛과 바람과 물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이 자명해 집니다.

어떤 꿈을 갖고 살아가는지요?
무엇을 희망하시는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꿈을 이루라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일이
삶의 최대 비결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일러 주십니다.
이는 그분을 믿어
그분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얻을 수 있는
그리고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가장 좋은 꿈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걸 알려 줍니다.
더 좋은 그분의 나라를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원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꿈을 성취한 기쁨과
결코 변하지 않을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엘리사는 기적의 예언자였습니다.
죽은 아이를 살리고
기름 한 병밖에 가진 것이 없었던 가난한 제자의 가족을 살리고
적국의 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보잘 것 없는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을 배불릴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계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계산법에 따른 결과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는
빵의 양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확을 감사의 마음으로
이웃과 기쁨을 나누려 했던
이름모를 ‘어떤 사람’의 사랑을 보았던 까닭이라 짚어 봅니다.
그 사랑과 믿음을
모두와 함께 맛보며 주님께 찬미를 올리려 했던 원의에
주님의 응답이 있었던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이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날 ‘누구 코에 붙이라고’ 이걸 내 놓겠나 라고 생각했다면
보잘것없이 적은 것이니
‘나 혼자나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다면
그 날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나눔에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엘리사처럼
모두가 함께 나누기를 서슴치 않아야 할 것을
이르심이라 믿어집니다.
우리에게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 같이 나누어 먹으려는 그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약속이라 믿습니다.
때문에
끼리 끼리만 통하고 나누려 하지 않고
온 군중이 함께 나누기를 원했던 엘리사의 넉넉한 마음이
곧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바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주님께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 다섯 개’를
봉헌하는 마음이
배고픈 세상을 살리는 근본임을 배웁니다.
주님께 작은 것을 내어 보이며 의탁하는 일이
나눔의 기적을 이루는 수순임을 배웁니다.
이야말로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줄 줄 아는 지혜이기에
하느님의 기쁨이 기적을 일으킨 것이라 새깁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모두
아버지께서 선하게 이끌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그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고
착하신 그분처럼 살아갈 때
진정 그분과의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우주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
하느님과 일치한 이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땅을 향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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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기적

초등학교 시절 어느 소풍날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소풍 가방에 김밥과 과자 그리고 사이다를 챙겨주셨습니다. 자주 마실 수 없었던 맛있는 음료수를 단숨에 마시기가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마실 요량으로 뚜껑을 닫아 가방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뛰어 놀다가 가방을 열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병따개로 뚜껑을 열어 마시는 음료수를 초등학생이 제대로 닫을 리가 만무했고 소풍 가방은 쏟아진 음료수로 축축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내 음료수! 쏟아진 것은 음료수 뿐만 아니라 내 눈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그 맛있는 음료수를 이제 언제 다시 마시나 생각하니 안타까워 눈물이 났고 그것을 어렵게 마련해 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미안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 생각이지만 그때 그 맛있는 음료수를 친구들과 사이좋게 나누어마셨더라면 여러모로 참 좋았을 것을, 그래서 독식은 독약이 되는 가 봅니다. 독약은 먹을 수도 없고 먹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군중을 먹이신 것은 분명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며 또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특별하고도 놀라운 기적은 그냥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아이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있다가 그것을 내어놓는 것에서 나눔의 기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어린이가 내놓은 것은 많은 군중이 먹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놓자, 예수님께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시어 그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많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적은 것을 가지고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의도 때문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 하여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온전히 봉헌하라고 초대합니다. 오 천 명이 넘는 군중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제자들의 공동체에게는 전부였던 그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기적의 촉매역할을 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봉헌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나누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박성태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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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의 전재산

오늘은 나해 연중 제17주일이다. 오늘 주일부터 연중 제21주일까지 주일미사의 복음으로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봉독된다: 연중 제17주일(요한 6,1-15), 연중 제18주일(요한 6,24-35), 연중 제19주일(요한 6,41-51), 연중 제20주일(요한 6,51-58), 연중 제21주일(6,60-69).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인간이 매일 필요로 하는 일용할 양식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성체성사를 (간접적으로) 제정하시고 그 신비를 밝혀주시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6장은 앞선 5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짜타 못가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자, 유다인들의 예수의 권한에 시비를 걸어 논쟁을 벌이는 5장 전체의 내용이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보도되고 있는 반면, 6장의 내용은 갈릴래아 호수와 바로 근처인 가파르나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긴 대목의 요한복음 6장은 구조상 대략 6단락으로 구분된다. ① 단락: 예수께서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다.(1-15절) ② 단락: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위를 걸어서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신다.(16-21절) ③ 단락: 군중들이 호수 동편에서 가파르나움으로 이동한다.(22-24절) ④ 단락: 예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대화형식으로 내리신다.(25-59절) ⑤ 단락: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제자들의 불신을 토로하자 예수께서는 배신자를 예고하신다.(60-66절) ⑥ 단락: 시몬 베드로가 대표적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께서는 12사도 중에 배반자가 있음을 예고하신다.(67-71절)

오늘의 복음은 6장의 첫 번째 단락에 속하는 대목으로서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빵의 기적(표징)을 보여주고 있다.(1-15절)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많은 군중이 떼를 지어 예수님을 따른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 다닌 것 같다. 조그만 산등성이에 이르러 예수께서 제자들과 자리를 잡자, 그 주위로 무려 5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앉았다. 다들 지치고 굶주린 모습이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누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들이다.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다.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물론 불가능함을 알고 하신 말씀이다. 돈도 없고, 그만한 양의 빵을 살 곳도, 파는 곳도 없다. 예수께서 다시 한번 제자들과 군중들을 살펴보신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허리춤을 움켜쥔다. 무엇이 잡히는 모양이다. 사실 사람들은 길게 내려 입은 겉옷 속에 전대(纏帶: 돈이나 물건을 넣어 허리에 차기 위해 무명이나 베 따위의 헝겊으로 만든, 중간을 막고 양끝을 튼 긴 자루)를 차고 있었다. 그 속에 며칠 먹을 빵이 들은 게다. 그들은 통상 집을 나설 때 누룩 없이 납작하게 만든 빵(무교병)을 몇 개씩 전대에 넣어 다녔다. 그냥 먹어도 되고, 쨈을 발라먹으면 맛이 그만이다. 하루 종일 예수를 따라다니다 보니 빵을 다 먹어버린 사람도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누구하나 선뜻 자기 것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는다. 안드레아가 용케도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지목한다. 아이가 자기 생명과도 같은 양식을 잘못 간수한 것인가? 아이의 작은 체구 때문에 허리춤이 불룩해서 안드레아에게 들킨 것인가? 아니면 순수한 아이 마음이 자기의 것을 몽땅 식사의 음식으로 내어놓은 것인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건네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다. 복음서는 그저 "감사의 기도"라고 하지만 분명 이 기도는 사람들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기도였을 게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렀던 눈으로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삼삼오오 둥글게 모여 앉은 군중들 가운데 빵도 마른 물고기도 수북히 쌓여있다. 모두가 배불리 먹는다. 여기 저기서 이야기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따금 한바탕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즐거운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단 한 사람의 보잘것없는 것도 예수님의 손을 통하면 모두를 위한 큰 사랑의 기적이 된다

박상대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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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기적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이 요즈음 매우 높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한 끼 두 끼로 하루의 식사를 대신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엔 언제나 먹을거리에 대한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인지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영적 음식, 성체로 내어주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빵에 대한 기적 역시 식사 때가 되어 나타난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대답은 200 데나리온 이상 돈이 필요하다는 것과 터무니없이 적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자는 상당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본다면, 후자는 다소 어리석은 대답으로 반문 형식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후자를 택하셨고 어떻게 적은 음식을 가지고 오천 명 이상이나 배불리 먹게 했느냐입니다. 어떤 이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작은 아이가 배고플 때를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만큼 다른 이들 역시 저마다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들을 함께 나누었을 거라고 합니다. 상당히 근거가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을까? 묻게 됩니다. 이 대답을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시다.” 그 적은 음식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은 음식을 가지고 나누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열두 광주리가 가득 남았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교 파견할 때도 입은 것과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했지만 제자들은 나중에 자신들의 복음 선교가 성공적이었음을 보고했습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오직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세가 덧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면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허기진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심에 대해서도 감사의 기도를 빵의 기적에 앞서 먼저 드리신 것입니다. 이 감사의 기도로 더 많은 사람도 배불리 먹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린아이가 내놓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나눔을 가능케 한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참여가 눈여겨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빵의 기적을 나눔의 기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지구촌에 수많은 사람이 기아에 허덕이고 우리 주변에 아직도 춥고 배고픈 사람이 많은 것도 모두 나눔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눔의 실천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에게 신앙의 큰 덕목이 되면서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실행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성장하고 완성되고 있습니다.

부산교구 양요섭 요셉 몬시뇰
  |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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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합심(合心)

오늘의 복음 말씀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이 이야기를 저는 합심의 결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합심의 구심점이 되는 분입니다.

합심이란 마음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합심이 될 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갈라질 때 즉 분심이 될 때는 아무 일도 못 하고 또 아무것도 안 되는 현상도 역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사건을 예수님의 위대한 기적으로만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자연 이적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천사를 시켜 하늘에서 빵을 가져다가 그 사람들을 먹일 수도 있고 또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여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수님의 전능하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실 때 예수님께서 군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셨고 또 이 합심의 결과로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예수님과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의 것을 서로 내어놓고 나누어 먹는 것으로 마음이 모아졌다면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가져온 것을 자기와 자기 가족만 먹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도 남은 찌꺼기는 버릴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알맞게 가져와서 가볍게 요기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사 먹을 데도 없는 그곳에서 쫄쫄 굶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 먹게 된다면 남자만 오천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되는 군중이라도 다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들을 모으게 되면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기적과 같은 일들이 항상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아지는 것은 감동을 받을 때입니다. 강제와 완력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모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감동을 받았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 그때 마음이 모아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선한 일과 아름다운 일들을 보았을 때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입니다.

<부산교구 김상호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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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   [부산]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   [인천]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   [서울]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1]
70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섬기러왔다]  1537
702   [부산] 공수래 공수거  [5] 2339
701   [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5] 1971
700   [수원]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5] 2216
699   [대구] 내 깡통  [3] 2117
698   [군종] 부자와 하느님 나라  49
697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6] 2139
696   [의정부] 소유와 나눔  [4] 2246
695   [안동] 부족한 것 하나  [2] 1077
694   [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4] 1935
693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5] 2201
692   [전주] 영원한 생명  [2] 2138
691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63
690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6
689   [원주] 영적법칙  [1] 70
688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3] 2441
687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5
68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4] 1572
685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1
684   [원주] 휴가증  73
683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6
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4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5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20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3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6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4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91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5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6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70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7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2
1 [2][3][4][5][6][7][8][9][10]..[18]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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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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