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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생명의 빵
조회수 | 2,361
작성일 | 06.08.04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하신 기적을 하신 다음날 사람들은 호수를 건너 예수께 몰려와서는, 그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의 기적 같은 것을 보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오신 생명의 빵이시라는 기적의 영적 의미 보다는 그저 빵을 배불리 먹은 기적의 물질적 의미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 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빵(양식.재물)이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 항상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빵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을 해치기 까지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것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생명의 빵을 얻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 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빵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성체 성사를 통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영적 음식으로,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생명의 빵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명의 빵을 얻는 것이고,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생명의 빵과 구원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물질적 빵을 얻는 일에 동분서주 하다가 보니 생명의 빵을 구하는 일에는 등한할 때가 많습니다. 물질적 빵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하지만, 그 보다 더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의 빵을 얻는 것입니다. 이 빵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총과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의 희생으로 자신을 우리들에게 생명의 빵으로 내어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희생과 봉사의 삶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생명의 빵을 얻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정인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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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자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 해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분께 삶의 이유와 활력이 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 열심히 찾고들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빵은 음식입니다. 생명의 빵은 영혼의 음식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균형은 깨어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삶이 불안해 지고 허무감에 휩싸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굶주림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고 갈증을 느낀다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고, 모르고 있기에 불안과 허무에서 벗어나려고 본능적인 삶에 탐닉을 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더욱더 심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영혼에게 생명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영적 음식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답변이 주어져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서 대답을 찾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자신을 두고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체성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성체를 통해 영적 음식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강해진 영혼이 육체적인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영성체 입니까?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성체를 수없이 모시지만 영적인 힘을 느끼지 못했다면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나는 성체를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성체 앞에 나선다는 것은 실제로 살아 계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최소한의 정성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생략되었기에 구경하는 미사가 되고, 아무 뜻 없이 받아먹는 영성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성체신심은 정성에서 출발합니다. 교회가 공심재를 정해놓은 것은 정성을 다해 성체를 모시라는 뜻입니다. 지금은 많이 후퇴하여 성체를 모시기 한시간 전 까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교우들은 성체를 모시려면 전날 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물도 못 먹게 하였고 양치질을 해도 양칫물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그 만큼 정성을 들여 성체를 모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옛 교우들은 이 규정을 끔직 이도 지켰답니다.

정성으로 성체를 모셔야 필요한 곳에서 영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분 힘이 우리 영혼과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활 속의 불안과 허무를 극복할 줄 압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운 변화가 자신에게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이 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성체를 정성껏 모실 수 있을 때, 성체께 대한 신심은 새로워 질 것이고, 그 분 안에서 결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신요안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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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복음(6,22-29)에서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육신만을 배불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기'보다는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즉 '추구'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말씀은 불멸의 양식이란 썩어 없어질 양식처럼 찾을 수 있는 어떤 무엇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추구(追求)'하라는 것이다.

'찾는다'는 말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을 뒤지거나 두루 살펴서 발견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요구하거나 청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추구한다'는 말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끝까지 좇아 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멸의 양식이란 이미 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찾을 수 없고 오직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조건은 불멸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는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 어제 복음의 결론이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불멸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선포된다.

오늘 복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① 예수께서 '불멸의 양식을 추구하는 조건'으로 '불멸의 양식을 주는 자'를 믿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믿음을 얻기 위한 기적을 요구한다.(30-31절) 그들은 모세와 예수를 대립시켜 "모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 우리의 조상들을 먹이는"(출애 16,1-36; 시편 78,24; 지혜 16,20-29 참조)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는 어떤 기적을 보여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을 위해 기적(奇蹟)을 청하고 있다.

사실 믿음이란 내심(內心)에 주어진 어떤 무엇에 대한 자유로운 응답(response)이다. 기적을 보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이 믿음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라. 그들은 항상 기적을 요구했고, 기적을 보고서야 믿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에 믿음이 강요당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된 믿음이란 기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유의지의 온전한 결단으로 성립된다. 군중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행사하기보다는 기적에 의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빵의 기적과 비슷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으니 결국 육적 세계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② 이제 예수님의 부연설명이 이어진다.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 조상들을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정(訂正)하여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신다.(32-33절) 예수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다.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모세가 하늘에 청한 만나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중에 일용할 양식이 넉넉지 못함을 불평하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신다.(출애 16,1-36) 이 기록을 살펴보면 만나는 그야말로 하루의 양식이었고(안식일은 예외) 다음 날은 곰팡이와 구더기의 밥이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그런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이다.

③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한다. 이에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신다.(34-35절) 이 언명(言明)은 더 이상의 설명이 아니다. 이는 선포요 폭로(暴露)이며 예수님의 자기계시이다. 사람들은 앞서간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조상에게 빵을 먹인 사람이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 내 아버지'라는 예수의 자기계시적 언명(言明)도 쉽게 수긍하는 듯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가파르나움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사람들 보다 순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안중에 '하늘의 빵' 밖에 없는 것인가?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계시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시기 때문이다. 이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빵의 기적을 행하신 그 날 밤,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에고 에이미)라고 하신 바로 하느님 그분이시며, 이분이 바로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자신을 구체적으로 폭로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박상대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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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서 기록한 요한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최후 만찬과 교회가 이미 실천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시키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독자가 이 이야기에서 성찬의 의미를 깨닫도록 암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의 복음에 이어서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그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고, 그들이 예수님을 발견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빵이 상징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하는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먹이신 것은 그분이 주시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으로 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1,12)고 말하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찬에서 먹는 빵이 있고, 그것을 먹어서 발생하는 생명과 그 생명이 발생시키는 실천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게 하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초능력의 행사를 상상합니다.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능력을 우리는 신통력(神通力)이라 부릅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동을 우리는 신동(神童)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하느님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은혜롭게 주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처신을 잘하여 많은 혜택을 얻어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을 잘하는 처신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이 세상의 군주(君主)와 같았습니다. 마음에 들면 성은이 망극하게 혜택을 주지만, 괘씸하게 보면 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그리스도인이 먹어서 생명을 얻는 빵은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수한 관계 안에 계십니다. 같은 요한복음서는 이런 말씀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16,15).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찬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킵니다. 그래서 “결코 배고프지 않고...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은 빵이 몸으로,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성찬은 우리를 기적적으로 변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와 상관없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가 먹어서 힘을 얻어 사는 빵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지닌 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소의 힘을 발휘하지 아니하고,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이 돼지의 삶을 실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은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몸이라 말씀하신 빵을 먹는 사람은 그런 노력을 합니다. 배부르게 해 주는 성찬이 아닙니다. 몸은 유대인들에게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간관계에 참여하게 하는 성찬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관계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들은 복음서들 안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고쳐주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들이었습니다. 같은 사랑의 인간관계를 살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인간이 만든 차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을 떠받들어 높이며 그 앞에 비굴하게 처신하고, 낮은 사람을 순종하라고 짓밟으며 위세(威勢)부리는 그런 차별의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잘 한 사람에게 상주고, 부족한 사람에게 벌주는 그런 질서 안에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 차별의 질서를 떠나서, 사심 없이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섬길 것을 다 하고 자신은 ‘쓸모없는 종이었다.’(루가 17,10) 말하면서 물러 설 수 있는 성숙된 자유를 권장하셨습니다. 이것은 당당한 사랑입니다. 생색도 내지 않고 보상도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이경희)은 사심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박수도 없이, 관객도 없이 혼신으로 지켜온 당당한 인기...그 당당한 고독.”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이런 헌신과 고독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 시대 경건하다는 이들은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보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에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돌보아주며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를 넘어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그 사랑의 생명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배불리 먹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고, 주변의 생명을 자유롭게 섬기고, 그 섬김이 끝나면 물러설 수 있는 당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사랑입니다. 넓고 넓으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생명의 기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배워서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는 성사입니다.

서공석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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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

인간은 여러 가지 본능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식욕과 명예욕 그리고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구 등이다. 그런 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욕구를 들라고 한다면 식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욕망은 충족되지 않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식욕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는 1937년의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는 소설을 썼다. - 이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었고 몇 십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 소설의 내용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전투 중에 심하게 상처를 입은 병사가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런데 의료진이 치료를 해도 병이 호전되지 않았다. 왜냐면 의사와 간호원들이 아무리 권하고 노력해도 먹지를 않기 때문이었다. 환자의 친구 한 사람이 그가 향수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집으로 연락해서 부친이 야전병원으로 급히 달려왔다. 그 병사는 아버지를 보자 기뻐했지만 여전히 먹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서 어머니가 정성껏 손수 만든 빵을 내놓자 화색이 돌면서 “이 빵은 어머니가 만든 빵이 아닌가?”하면서 먹기 시작했고 그의 건강은 차츰 회복되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위에서 말한 병사와 같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이럴 때에 무엇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위로와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인지 잊고 지낼 때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은 우리의 마음에 강하게 다가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얻으려고 전력투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은 썩어 없어질 것들이고 헛된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는 말씀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인생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보람있게 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에 대한 답을 확고하게 말씀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우리에게 썩지 않는 빵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길이요 생명이며 진리인 예수님이 생명의 빵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신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중심이 되는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염봉덕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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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인간

오늘 주님을 따른 군중들은 정말 열심이었습니다. 혼신을 다하고 최선을 쏟아 예수님을 찾았으니까요. 사라진 예수님을 찾아 후히 주시는 양식을 또 얻어야겠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 싶습니다. 그날 예수님을 찾아내고서 그들은 한숨 돌리며 안도했을 터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고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까지 내달린 수고도 자랑스럽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틀림없이 배부르게 빵을 먹고, 맛 나는 생선을 먹게 될 테니까요.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하느님을 믿는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에 참으로 세상이 추구하는 ‘헛된 마음’을 버리고 살아갑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깨달아 감사하고 "그분에 관하여 듣고 또 가르침을 받는 일"만을 소중해 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을 찾아낸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참 순수하게 질문을 올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며 스스로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에 ‘표징’을 따지고 구구절절 ‘공짜로 쏟아주실 것’들을 요구하는 중이라면 아직 새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우쳐 주네요.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탄생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인 탓에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하느님의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새 사람이라면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하느님을 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그릇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새 인간으로 변화되는 일은 하느님나라의 확장을 위한 지침이고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심어 키우는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새로운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이게 무엇이냐?”라고 묻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정말 다르다’고 증언하며 함께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원할 것이니까요.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감사를 잊고 엄청난 감격의 순간들을 잊어버린 결과입니다. 원망하고 탓하는 마음은 노예생활을 벗어난 몸이었지만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결코 두 눈으로 보아야 가능한 것이 아니며 두 귀로 들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몸소 겪은 하느님의 힘을 고작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작정하는 못된 인간의 심사에 비기는 괘씸한 이스라엘 백성의 심보를 털어 하느님의 선하심과 살피심을 내내 기억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생활방식을 바꾸고 옛 인간을 벗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은 주님의 지혜로 채움 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새 인간으로 빚으셨습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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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내 보따리 내놓으란다” 라는 속담이 있다. 어이없는 경우, 기가 막힌 경우에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속담의 또 다른 교훈은 그 어이없는 경우의 장본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경고이다. 살다 보면 상상키 어려운 기막힌 경우를 보고 듣게 된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인들의 불신과 불충도 그 중의 하나이다. 히브리인들은 늘 기적의 한가운데에서 살았거늘 어찌 하느님을 배반할 수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극적으로 해방되어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에서의 종살이가 차라리 더 낫다. 배가 고파 죽겠다.”라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배고픔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는가. 한편 이해도 되지만 기적을 보며 살아온 히브리인들의 투정은 해도 너무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어렵고 고생스러울 때에는 즉시 하느님을 찾지만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자신만만하여 하느님을 제쳐놓지 않는가? 누구에게나 유아 시절이 있다. 이 유아 시절에는 부모님의 보살핌에 의해서 자란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한 다음 모두 스스로 컸다고 자만하고 있다. 부모님 앞에 이런 생각이 가소로울진대 인간의 만사가 하느님 앞에서는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불평, 불만, 투정부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오늘 제1독서에 비추어 부끄럽게 바라보며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임을 겸허하게 고백해야겠다.

우리는 매일 식사할 때마다 더욱 감사해야 한다. 특히 오늘 만나의 이야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만나는 꼭 하루 치만 간직할 수 있고 그 이상의 여분은 상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저축하기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여분의 저축은 사실 다 상하고 썩을 것이라는 교훈이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하루 치 이상의 만나를 지니고 있는 우리 모두를 꾸짖고 계신다. 그리고 여분의 것을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썩은 냄새가 우리 안에서도 진동하고 있다.

기적이란 무엇인가? 기적이란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많은 빵, 더 큰 빵을 원하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더 큰 빵을 갖고자 하는 욕심은 바로 불신의 증거이다. 생명의 빵, 먹어도 결코 배고프지 않을 빵, 그 빵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을 믿는 것은 곧 구체적 실천으로 하루 치 이상의 여분을 모두 이웃을 위하여 내어놓는 결단이다. 만나와 성체는 오늘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성체를 영하게 되기를 바란다.

부산교구 강영돈 라우렌시오 신부
  |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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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까지 봉헌하는 삶

예수님 곁에는 늘 군중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보고 권위 있는 말씀에 끌려 그분의 뒤를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주님의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도 교회를 부인하지 않고 교회가 하는 일을 좋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그분을 구세주로 믿는 신앙인은 아닙니다. 오늘도 당신 주위를 맴도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해서 믿음으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그분을 믿는 일에서 머뭇대고 있는 마음들이 그리스도인의 기쁜 삶을 탐하도록, 우리 삶이 선교의 재료로 사용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날 주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물음은 필립보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힙니다. 느닷없이 날아든 주님의 ‘쪽지시험’에 필립보가 당황했을 것도 같은데요. 오늘 우리에게도 숱하게 ‘믿음 테스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그날 필립보의 오답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날 필립보는 출제자의 의도를 잘못 읽은 탓에 오답을 냈습니다. 시험 문제는 빵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지, 장소를 답하라고 요구하는데 ‘이백 데나리온 어치’로도 모자랄 것이라고 빵값 계산을 했으니 동문서답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작성된 답을 원하셨는데 세상의 방법에 따른 산술적 답을 냈으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엉뚱한 답에 예수님 표정이 난감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는 까맣게 잊고 그분을 향한 의탁이 쏙 빠져버린 답에 주님 마음이 꽤 민망했을 것도 같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오답을 제출합니다. 그날 필립보처럼 주님의 뜻은 전혀 헤아리지 않고 내 생각에 따라서 결론짓기 일쑤입니다. 스스로 삶의 해답을 찾겠다고 엉뚱한 곳을 헤매다 지치는 일도 숱하게 겪습니다. 그분을 믿는다면서도 막상 일이 닥치면 이성적이고 피상적인 세상 지론으로 치닫습니다. 세상 방식에 따라 계산하고 골머리를 썩이며 그분의 뜻을 묵살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뒤로 밀어냅니다. 주님보다 앞서서 포기합니다. 신앙의 계산법을 팽개칩니다. 이렇게 주님의 축복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단단히 마음의 차단막을 치고 지냅니다. 참으로 아픈 현상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안드레아가 동료 필립보의 오답에 편승하지 않고 예수님의 심중에 초점을 맞추었던 지혜가 돋보입니다. 작은 도시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그분께 여쭈었던 단순한 안드레아의 모습이 귀합니다. 사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작은 도시락이 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걸 그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아뢰어 상의 드릴 때, 그분께서는 일하십니다. 안드레아의 작은 신뢰가 기적의 원료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얼마나 계산에 어두운지를 느낄 수 있는데요. 그날 군중들이 먹을 빵을 딱, 적당량만 만들지 않고 모두가 ‘배불리 먹은 다음에’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찰 만큼 마구 만들어 냈다니, 주님의 수학실력은 젬병이라 싶은 겁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풀밭의 풍성한 만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느님의 손이 얼마나 큰지, 그분께서 얼마나 통이 크신지를 알려 주려 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항상 넉넉히 한 턱 쏘기를 좋아하시는 그분의 품성을 깨달아, 무엇이든 언제이든 그분께 의탁하기를 고대하신다는 진리를 캐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일하기 원하십니다. 별 쓸모가 없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능력을 부어 주기 원하십니다. 이 때문에 물질을 왕으로 모시며 소유하기를 탐내는 세상에서는 할 일이 없으십니다. 마구 소비하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억지로’ 그분을 모시는 꼼수를 무척 괴로워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욕심이 그분을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도록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시’ 또 ‘다시’ 그분을 외롭게 하고 고독하게 하는 건 아닐까요. 이 산란한 주님 심정을 얼른 알아차리면 좋겠습니다. 그날 상황을 반전시켰던 안드레아처럼 얼른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까지 모두 봉헌함으로 그분께서 신 나게 일하도록 해 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삶의 ‘쪽지시험’에 복음과 믿음과 사랑의 답을 적어내는 우등생 제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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