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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놀라운 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일
조회수 | 2,351
작성일 | 05.12.12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는 이야기인 26-­27절은 그로부터 여섯째 달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예사스럽지 않았던 그 은혜로운 일에 이어 하느님은 갈릴래아 나자렛 마을의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로부터 여섯째 달에, 그로부터란 1,5-­25절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한 그때로부터 여섯째 달이라는 말이다. 특히 24절과 25절에서는 엘리사벳이 잉태하고도 다섯 달 동안 숨어 지내며 “주님이 이렇게까지 하시어 내가 사람들한테 겪는 치욕을 없애주셨구나”라며 아들의 잉태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다.

28절 이하, 천사와 마리아가 나눈 대화를 자세히 보자. 말은 주로 천사가 하고, 이에 따른 마리아의 간단한 대답이 나온다. 28절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라는 인사에서 보면 마리아는 은총을 입었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주님이 함께하시니 기뻐하라고, 두려워 말라고 하지만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다윗 가문의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는 몹시 당황해하며 그 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천사는 성령이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라며 친척 엘리사벳이 아들을 잉태하여 여섯째 달이 된 것을 보면 알겠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한다. 천사가 전한 메시지는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크게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분, 주님 하느님이 조상 다윗의 옥좌를 주실 분, 영원히 야곱 가문 위에 임금님이 되어 끝없이 다스리실 분,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일컬어질 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자 마리아는“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수락한다.

이야기 전체를 되짚어 보자. 갈릴래아 나자렛 마을에 사는 비천한 여종에게 임금이, 하느님의 아들이 나실 것이라는 전갈이 왔고 마리아는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주인님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이로써 하느님의 큰일이 이루어지게 된다. 마리아는 받아들임으로써 말씀을, 하느님의 의향을 인류 역사에 큰일을 이룬 것이다.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수락하는 자세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역시 종들에게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 결과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또한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 깊은 곳에서 고기를 엄청나게 많이 잡게 되고, 물 위를 걸어오라는 명령에 걷게 되었듯이 큰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믿음을 가지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는 명령하는 분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바탕에서 비롯된다.

놀라운 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일, 기뻐할 일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안에서 곧잘 이루어진다.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비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품어 안는 그곳에 믿음의 세계가 열리고 하느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틈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큰일은 우리 일상의 논리를 넘어 하느님 말씀 안에 담긴 뜻을 듣고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 안에 기적이 흔치 않은 것은 늘상 합리와 타당성, 확실성을 추구하여 하느님의 힘이 개입할 틈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토마는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고 확인하지 않고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주님은 못으로 뚫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그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열려 있는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어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보십시오,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오늘도 말씀은 은총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시기를 공손히 청하고 계시다. 복음이 이루어지기를, 말씀이 있어지기를!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라는 사람들 안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실재하시는 것이다.

그대의 몸을 지니고 있을 뿐 지상에서 그리스도는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손과 발을 지니고 있을 뿐 그리스도는 손도 발도 없습니다. 그대의 두 눈은 이 세상을 자비로 바라보시는 바로 그분의 눈이요, 그대의 두 발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려 걸음을 내딛는 바로 그분의 발이며 그대의 두 손은 세상을 강복하시려 펼쳐드신 바로 그분의 손입니다.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더이상 몸이 없습니다. 그대의 몸이 바로 그분의 몸이므로….(아빌라의 대 데레사)

이 안나마리 수녀(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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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

지난 달 저희 집에 아주 소박한 '가족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지난해보다 훨씬 수준이 높아져 깜짝 놀랐습니다. 한때 '잘 나가던' 아이들, '초대형 사건' 등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아이들이었는데, '도저히 이런 데서 못 살겠다'고 기를 쓰며 도망가던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딴 얼굴로 변해 무대에 섰더군요. 저희 아이들 특유의 조금은 멋쩍고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연주하는 진지한 얼굴들을 바라보며 정녕 행복했습니다.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꽃 같은' 아이들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간식이 끝나고 나니 한 꼬맹이가 저보고 기숙사로 꼭 올라오라더군요. 호기심에 따라 올라갔더니 장롱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주었습니다. 비뚤비뚤, 그러나 꾹꾹 눌러쓴 편지였습니다. 창피하니 지금 여기서 읽지 말고 수도원에 가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여기 온 지 한 달이 지났네요. 신부님이 저희들을 데리러 '비둘기장'(철창이 쳐진 임시유치장)으로 오실 때 솔직히 많이 '쫄았어요'(겁났어요). 그런데 나오자마자 점심으로 부대찌개도 사주시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도 사주셔서 정말 마음이 놓였지요. 그리고 신부님께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희한하게 답답한 게 뻥 뚫리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신부님이 웃으시며 먼저 인사를 건네주실 때 기분이 너무 좋아요. 신부님, 알라뷰 소마취 ㅋㅋ."
 
저희 아이들 한 명 한 명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릅니다. 투박하지만 맑은 샘물처럼 순수합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사랑을 주면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도 압니다. 복잡하거나 계산적이지도 않습니다.

순수한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순수 그 자체였던 나자렛 시골 처녀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을 지녔던 마리아, 사심 없는 마음의 소유자였던 마리아, 질그릇같이 소박한 마리아를 인류구원 사업의 첫번째 협조자로 선택하십니다. 마리아의 언행 하나하나를 따라가 보십시오. 얼마나 단순한지 모릅니다. 조금도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전혀 세상에 물들지 않습니다. 천사의 알림 앞에, 크나큰 하느님 초대 앞에 조금의 자만심도, 우쭐거림도 없습니다. 솔직하고 겸손하게 그저 마음 속에 있는 그대로를 표현합니다.

"보잘 것 없는 제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천사의 설명을 듣고 난 마리아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그 초대를 수락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당대 잘 나가던 예루살렘 귀족 가문의 딸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시골 처녀 마리아를 당신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하셨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께서 선호하시는 삶의 유형은 마리아가 지녔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세는 마리아가 지녔던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함, 소박함, 천진난만함, 순수함, 하느님을 향한 열린 마음, 하느님 부르심에 즉각 일어설 수 있는 준비된 마음….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간 쌓아두었던 서류들이며, 편지들, 잡지들,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다가 마음에 꼭 드는 시 한 편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ㆍㆍㆍㆍ)/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이름을 알면 보이고 이름을 부르다보면 사랑하느니/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꽃잎 꼭꼭 숨어 피어 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사랑하면 보인다. 숨어 있어도 보인다."(정일근, 쑥부쟁이 사랑)
시인께서는 '사랑하면 보인다'고 강조하셨는데,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을 의미할까요? 그 사랑은 자기 중심적 사랑이 아니라 이타적 사랑, 하느님 중심적 사랑이겠지요. 흐리고 탁한 시선이 아니라 해맑은 시선, 꼬이고 꼬인 부정적 눈초리가 아니라 따뜻하고 낙관적 눈망울을 지닌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사랑 말입니다. 청정한 시선, 공감과 경청, 연민으로 가득찬 시선…. 그런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볼 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느님 거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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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탄생 예고와 나란히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집니다. 엘리사벳이 요한을 가진 지 여섯째 달이(26절) 되었을 때입니다. 외부와 차단된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장소에서 자신의 사명을 이행하던 그 천사가, 이번에는 불경한 지역으로 여기던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를 찾아갑니다. 무대는 갈릴래아의 초라한 나자렛이라는 고을에서 시작됩니다. 갈릴래아는 예언자 한 사람 나온 적이 없는 곳입니다.(요한 7,52) 특히 나자렛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 하던 곳입니다. 하찮은 곳에서 가난한 백성한테서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입니다.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27절) 다윗 왕가의 후손이면서 처녀의 아들로,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혜롭게 안배하십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27절) 마리아는 하느님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시던 인사와 비슷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1) 구약에서 예언자들도 기쁜 소식을 알릴 때 종종 이렇게 인사했습니다.(스바 3,14; 요엘 2,21 등) 메시아 시대의 환호를 마리아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하느님의 거처가 마리아 안에 마련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느님이 성전에 계셨다면 신약의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거처를 두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힘과 용기를 주시는 위로의 인사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한테도 유효합니다.

몹시 놀란 마리아는 이 인사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합니다.(29절) 자신에게 벌어진 특별한 사건을 알아채고자 애를 씁니다. “두려워하지 마라.”(30절)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은총으로 마리아를 북돋워 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0­-31절)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마리아는 받아들였습니다. 그 아기는 예수라 불려야 합니다.

태어날 아기는 큰 인물이 되실 분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으로 태어나시기에 그분의 아들이십니다. 다윗 왕좌를 이어받은 통치자시며,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실 분입니다.(32-­33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33절) 마리아한테서 태어나실 분이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이니, 그 나라는 시대와 민족을 뛰어넘어 온 세상을 포함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어떻게 처녀가 어머니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마리아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이 신비를 풀어줄(35절) 발단이 됩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사악, 삼손, 사무엘, 세례자 요한에게 일어났던 일을 능가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실 것이다.”(35절) 마리아의 태중에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창조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35절) 광야의 성소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이신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감쌌습니다.(탈출 40,34-­35)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이 그곳을 덮었습니다.(1열왕 8,11) 신적 능력인 그분의 영광이 마리아를 가득 채웁니다. 마리아는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 모든 것이 곧 탄생할 아기가 하느님의 거룩한 아드님이심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5절) 오늘 천사가 전한 말씀의 절정입니다. 온전히 봉헌되신 분, 구원을 가져올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자신이십니다.

마리아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일이(13절) 마리아가 기꺼이 믿도록 도와줍니다.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된다는 생각에 몰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는 것을 믿었습니다. 사라에게 일어난 일을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세 18,13­14)

이제 남은 것은 응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았고 그 뜻에 ‘주님의 종’으로서 순명합니다. 마리아한테는 하느님의 뜻이 전부였으니까요. 아브라함의 순명으로 시작된 구원 역사가 마리아의 도움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히브 10,5-­7)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필리 2,8) 순명하셨습니다. 구원은 순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갑니다.(38절) 천사의 사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위대한 사건을 앞두고 침묵이 흐릅니다.

성령은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하셨듯이,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께서 우리한테서 큰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고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한계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시기 때문에 나자렛의 작은 소녀는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견뎌 냈습니다. 그런 분이기에 한계가 있는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그분께 아뢸 최고의 응답을 어린 마리아에게서 배웁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오늘도 예수님은 가난한 우리들 가운데 계속 태어나십니다.

강지숙 님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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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어머니 마리아의 태도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주님의 탄생을 일주일 앞둔 오늘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마리아의 심오한 태도를 눈여겨보도록 초대받습니다.

예기치 않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루카 1,28)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받고 마리아는 당황합니다. 두려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갑작스런 일이라 혼란스러워진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인사가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29절, dialogi,zomai) 이 단어는 그냥 단순히 생각이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의논하는 자세입니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 특히 가르침을 낳는 대화를 의미했습니다. 무엇인가 의심하는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눔으로 배우게 되기 때문이지요.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서로 논쟁하는 맥락에 자주 사용되지만 하느님이 아버지로서 자녀를 훈련하기 위한 권고로도 사용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히브 12,5) 이런 용법은 이 단어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를 의미했던 칠십인역 용법에서 비롯됩니다.

마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늘 그래왔듯 혼자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 앞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의 말에 귀 기울입니다. “내 백성아, 나의 가르침을 들어라. 내 입이 하는 말에 너희 귀를 기울여라.”(시편 78,1) 인생에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때 인간의 유일한 피난처는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젖어 있는 여인인 마리아(루카 1,46-55 참조)는 하느님과의 대화 중에 천사가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리아가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하느님의 총애”(30절)를 받은 존재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 자신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어서 가브리엘은 메시아 신탁(이사 7,14; 9,6; 2사무 7,14.16)을 가지고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아기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말합니다.(루카 1,31-33) 그러나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입었음에도 자신의 인간적인 처지를 보며 주저하자(34절) 천사는 그 아기의 잉태가 성령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35절) 예수님의 이런 탄생은 놀라운 것입니다. 구약에는 아이를 갖기에는 이미 늙어버린 부모가 아이를 낳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창세 21,1-7; 1사무 1,1-28) 그러나 동정녀가 아기를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태 안에 갖게 된 것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덮다’라는 말은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힘을 상징하는 ‘구름’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시편 91,4; 탈출 40,35)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자주 ‘내려오신다.’라고 표현됩니다. 성령이 인간에게 내려오면 그 어떤 인간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내려오자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사도 1,8)

마리아는 일단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자 의심과 두려움 없이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내맡깁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루카 1,38)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길을 자유롭게 선택한 이유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하고 비천한 자신 안에 ‘말씀’을 낳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을 믿은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이 믿음 때문에, 행복선언의 주인공이 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오늘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한 가난한 여인이 자유롭게 “예!”라고 하느님의 계획에 동의함으로써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마리아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입니다. 마리아는 가난한 마음과 빈손으로 하느님 앞에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분의 존재 자체로 마리아를 충만케 해주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봅니다. 마리아에게는 추호도 자만의 기색이 없고, 자기 자신한테로 돌아가는 법도 없으며, 무게 중심이 진정 하느님께 있습니다. 이는 바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라는 칭호의 의미이기도 합니다.”(장 라프랑스)

기도(Oratio)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으로 당신의 성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 89,2)

임숙희 님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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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칠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요 며칠, 복음에 매번 등장하는 존재가 천사 가르리엘과 성령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그제는 요셉에게, 어제는 즈카르야에게 갔다가 오늘은 마리아를 찾아가느라 사뭇 바쁩니다. 그리고 천사는 성령께서 함께 계실 것이고, 충만할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그런데 이 천사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과 믿지 않은 사람이 갈립니다. 요셉은 묵묵히 이 말을 믿고 받아들인데 비해 마리아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과 관련하여 몇 마디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즈카르야가 의심을 한 데 비해 마리아는 이 말을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었기에 마리아의 문은 하느님께 활짝 열렸고, 우리도 믿을 때 우리를 활짝 열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는 침입자이기에 그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그에게는 감추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몇 달 전 저는 성경을 전공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는데 사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어서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예 문을 닫아 걸어버리고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 어찌 이리 믿지 못하는고? 자기한테도 도움 되지 못하는 그런 공부와 지식을 뭣에 쓰나?

그러므로 엘리사벳이 자기를 방문한 마리아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고 칭송하듯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씀을 믿어야 열 수 있고, 열어야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진정 믿음의 여인이고 주님의 말씀에 열려있는 여인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말을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고 대답하고는 즉시 자신의 태를 열므로써 하느님의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하십니다.

다시 얘기하지만 믿음이란 가능성을 믿는 것이고, 말씀하신 것이 헛소리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 될 거라고 믿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말씀에 자신을 개방하여 말씀의 잉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개방과 관련하여 오늘 복음에서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리아처럼 믿을 때 우리도 성령께 자신을 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을 때 우리는 성령께 마음도 열고 태도 열게 되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케 됩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성령의 정배,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고 합니다. 풀어 얘기하면 성령의 정배가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어머니도 되라는 겁니다.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성령의 정배가 되셨다.”고 얘기한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에게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께 결합될 때 우리는 정배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시고 다닐 때 우리는 어머니들입니다.”

성탄을 앞둔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려면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즈카르야처럼 주님의 말씀을 의심치 말고 성모 마리아처럼 믿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말보다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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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삽시다

끝은 시작입니다. 배밭 전지에 이어 배나무 그루마다 둥그렇게 밑거름을 뿌림으로 배밭농사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바로 광야같은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우리의 기쁨을 고조시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화답송 후렴으로 자주 짧은 기도로 바치는 시편구절입니다. 가사도 곡도 은혜롭습니다. 자주 짧은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이제 주님 오실 성탄도 임박했습니다.

얼마전 한반도 최남단 제주도 모슬포 본당에 대림 특강차 방문했던 2박3일의 은혜로웠던 순례여정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제도 강론에 인용하여 나눴지만 절실한 깨달음은 어디나 삶의 본질은 광야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삭막한 자연환경만 광야가 아니라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가까이 함께 살아도 내적으로는 역시 외로운 광야라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얼마전 나눴던 두 자작시를 다시 나누고 십습니다.

-광야를 사랑하라
광야의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라
외로워하지 마라
쓸쓸해하지 마라
그 어디나 광야이다
삶의 본질은 광야이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야할
하늘 나라 천국天國
바로 그 이름 광야이다.-

‘광야를 사랑하라’는 시입니다. 천국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으면 바로 광야의 거기 그 자리가 하느님 계신 거룩한 땅 성지이자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광야가 천국이란 역설의 진리를 이미 토마스 머튼도 ‘사막을 사막으로 받아들일 때 사막은 낙원이 된다.’고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이어 생각나는 얼마전 나눴던 ‘문제와 답’이라는 시도 같은 깨달음을 담고 있습니다.

-문제도 답도
내안에 있다
싸우지 마라
부질없는 일이다
부단히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다
부단히 내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는 거다
주님을 향해 활짝 여는 거다
이것이 답이다
이것이 진정 승리의 길이다
주님의 응답을 받는 길이다-

문제도 답도 내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바로 거기 그 자리가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에는 성탄을 앞두고 수도공동체가 받은 무수한 성탄 축하 카드가 붙어 있습니다. 마침 의정부 교구장님이 보내 주신 진정성 가득 담긴 유일한 친필카드가 좋아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사랑하는 수사님들께 평화!

성탄축하합니다. 성탄의 기쁨과 은총, 요셉수도원에 가득하기 바랍니다. 요셉수도원의 존재가 우리 의정부교구에 큰 힘과 위안이 됩니다. 오아시스니까요---그리고 쏘시지도 감사합니다. 신부들에게 하나씩 돌아갈 만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아시스’라는 말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사막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바로 광야에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외롭고 쓸쓸한 광야같은 나자렛에서 하늘나라 천국을 살았던 마리아였고 예수님 역시 여기서 태어나셨습니다. 과연 어떻게 광야에서 하늘나라 천국을 살 수 있을 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은혜로운 네 구절이 그 비결을 알려 줍니다. 마리아가 평소 얼마나 주님과 깊은 친교의 삶을 살았는지 단박 깨달을 수 있는 다음 말마디들입니다. 넓이가 아닌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마리아는 바로 믿는 이들의 원형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내적으로는 마리아입니다.

첫째,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을 환히 알려줍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믿어 살 때 광야는 천국이 됩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는 그대로 마리아의 이름같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에게서 총애를 입은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아마 마리아에게 이 말씀은 평생 잊지 못할 평생 영적 보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가 이런 ‘은총이 가득한 이들’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깨달음에서, 또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샘솟는 기쁨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하느님도 나도 모르는 ‘무지의 병’에는 참 좋은 특효약입니다. 무지란 병의 치유와 더불어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보십시오. 마리아는 주님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지만 경거망동함이 없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지혜롭고 겸손한 관상가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마리아 대신 여러분 이름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두려움보다 큰 영적 장애물은 없습니다. 두려움에 포위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런 우리에게 끊임없이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돌판에 새겨진 주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 함께 계시기에, 주님의 총애를 받은 우리이기에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빛’에 저절로 사라지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주님 함께 계시기에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진 광야, 바로 거기가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얼마전 사제서품을 받은 왜관수도원 수도형제의 서품상본 성구도 참 좋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이사43,1).

셋째,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바로 이런 믿음이 광야에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사랑의 전능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을 때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지 못해 좌절이요 절망입니다. 마리아와 주님 천사와의 대화가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 천사는 소상한 설명으로 마리아를 충분히 납득시킨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에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느님께는 모두가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하느님은 모든 불가능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으신 분입니다.

특히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전능함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나단 천사를 통해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십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교만과 탐욕입니다. 보십시오. 제1독서 대부분 문장들의 주어 일인칭 ‘나’는 모두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한 일 같지만 온통 하느님께서 다윗을 위해 해주신 일입니다. ‘하느님’이 주어일 때는 겸손과 감사이지만 ‘내’가 주어일 때는 무지와 교만임을 깨닫습니다.

기적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전능하신 사랑의 하느님 덕분입니다. 하느님은 최선, 최상의 당신 방식으로 오늘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넷째,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인류역사의 ‘전환점turning point’이 된 마리아의 응답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마리아의 믿음과 사랑이 하나된 전인적 응답입니다. 마침내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마리아의 ‘예스yes’ 응답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말씀대로 성탄의 신비가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으로 놀라운 내적 변모입니다. 성서의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만남으로 변모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 기쁨과 평화를 선물로 받습니다. 온유한 사람, 겸손한 사람, 감사하는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믿음의 순종이 광야에서 천국을 살게 합니다.

제1독서의 다윗이 그렇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렇고, 오늘 복음의 마리아가 그 대표적입니다. 아니 이런 성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의 은총으로 얼마나 변모되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대림 제4주일 복음의 마리아를 통해 광야에서 천국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1.우리 모두 은총이 가득한 존재임을 깨달아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2.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3.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최선, 최상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주셨고, 인도해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4.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십시오.

이렇게 살 때 우리의 광야는 하늘나라 천국으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광야같은 보잘 것 없는 나자렛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광야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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