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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조회수 | 2,438
작성일 | 06.08.12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복음서 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명상하는 바를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야기 한 다음, 성찬에 대한 오늘의 명상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느님에게 가신 후, 신앙인들 앞에 남은 것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기억과 그들이 이미 행하고 있던 성찬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여서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기억을 더듬어 되살려내고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들이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출애 16,4)는 고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호렙 산으로 향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하느님이 먹이셨다는 열왕기 상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먹이신다는 또 하나의 고사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베푸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자유의 땅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베푸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 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 불리는 빵, 곧 성찬으로 힘을 얻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수군거렸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은 그 말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못마땅함이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듣고 배우는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예수님의 참 모습이고, 새로운 삶이며 질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찬을 중심으로 모여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를 발견하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우리 자신만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과 질서에서는 하느님의 생명이 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생명들이 보입니다. 그 삶에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질서를 요한복음서는 사랑이라고 지적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서로 사랑하시오”(15,9.17).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분이 보여주신 실천을 하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곧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실천하며 살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신앙공동체가 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실천한 삶은, 예수님과 같이, 현세를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살고자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우리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합니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내 자식, 내 부모, 내 형제자매들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의 길을 방해하고 내 욕심의 행로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백안시하고, 싫어합니다. 흔히는 신앙생활도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한 수단이라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까지 이용하겠다는 우리의 이기주의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을 기억하여 우리가 행하는 성찬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삶을 벗어나,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주제도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루가 6,27)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여 자기를 위한 공적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발생한 질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랑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흐르는 곳에는 우리 눈에 작은 사람도 예수님과 같이 소중히 보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삶에는 주변에 죽음이 발생합니다. 대자연도 죽고 우리의 이웃도 죽습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편리대로 살다 보니 오늘 대자연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강, 새들이 살지 못하는 하늘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빠서 이웃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은 오래 전에 이미 지워졌습니다. 잘 있는 이웃을 찾아다녀서 귀찮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질서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롭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우리의 사랑이 흐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 준 그 사랑을 우리의 실천 안에도 흐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가 발산하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생명이 억압당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이 흐르면 우리의 동작도 그것으로 채색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행보에 있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부족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우리는 사랑하며 하느님에게로 갑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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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두득두(種豆得豆)

“뿌리부터 꼭 꼭 씹어서 몸 안에 심는다는 마음으로 드십시오”

언제 어디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산삼 먹는 법에 대해서 들었던 기억입니다. 여러분에게 산삼이 생겼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위의 방법대로 드시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산삼 먹는 법이 자세히 나와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몸을 정갈하게 하고’란 표현도 있었습니다. 산삼이 있었다면 아마 철저히 지켰겠지요?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먹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먹어야 사는 인간에게 무엇을 먹느냐는 그 먹는 것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약을 먹으면 병이 낫고, 독을 먹으면 병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리 몸에 득이 되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먹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먹기 위한 마음가짐과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그렇게 정성껏 먹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먹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먹거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바로 이 빵을 먹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 주님! 그 안에는 태초부터 시작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의 먹거리가 되심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온전히 당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과연 그 생명의 빵을 어떤 방법으로, 나아가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로 영하고 있습니까?

또 그 생명의 빵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 먹거리 자체가 지니고 있는 힘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받아 영하면서 무엇을 받아 영하고 있는지 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종두득두(種豆得豆),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했습니다. 먹은 데로 드러나도록 해야 되지 않을까요?

곽길섭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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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빵

예비신자 교리반에서 대학생에게 “대학을 졸업하면 무얼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직장부터 구한 다음 결혼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엔?” “돈 벌어 사회사업도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엔?” “그런 다음엔 은퇴하고 아내랑 세계 여행을 다니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엔?” “신부님, 그런 다음에 뭐가 있겠어요? 그냥 죽는 거지요.” “그럼, 학생은 죽기 위해 대학에 다니는군요.”

학생의 대답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잠시 지나가는 세상과 생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 세상이 주는 물질의 빵을 구하지 말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구하라고 강조하신다. 생명의 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영성체하는 시간에 꼬마 아이가 엄마 것을 뺏으려다가 꿀밤을 한 대 맞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다음 주일에 이 녀석이 헌금을 했는데도 성체를 받지 못하니까 “엄마, 나도 돈 냈는데 왜 안 줘.”하며 떼를 썼다. 이 아이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으로 알고 있었다.

사실 돈만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평화도 돈으로 살 수 없다. 천국이나 영원한 생명도 돈 주고 살 수 없다. 그 꼬마 아이는 돈 주고 성체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다.

성사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성사가 성체성사이다. 구약에서부터 성체성사를 준비하기 위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보냈고 오늘 제1독서에서처럼 엘리야 예언자가 음식으로 힘을 얻었다. 신약에선 예수님이 빵집이라는 뜻을 지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여러 번 했으며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 성체성사의 중요성 때문에 성체 신심 세미나와 성체강복이 있고 성체조배를 강조한다.

한더위에 시원한 곳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데 누군가가 건배 제의로 ‘소화제’라고 외쳤다.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영성체할 때마다 예수님과 소통하고 화합한다. 예수님과 소통하고 화합한 다음 감사 기도와 더불어 찬양을 드린다면 그 예비신자 대학생처럼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51) 오늘 복음의 말씀이다. 성체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

부산교구 최경용 베드로 신부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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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원한 생명의 새로움

음식이 육체적 생명을 영위하게 해 주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영적 생명을 유지하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귀로 듣는 말씀만이 아닌, 음식으로 섭취하는 빵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인 두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 어떤 지속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반면에 생명이라는 말은 끊임없이 변하고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말이 합쳐져서 이해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변화하고 움직이는 생명의 본질이 매 순간 ‘새로움’으로 가득 차서, 이 새로움이 끝도 없이 이어져서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새로움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도 이 새로움에 대한 체험이 가능하다고 믿고 이 체험에 기꺼이 참여할 마음을 가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해가 뜨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미사에 참석할 때에도 반복되고 늘 상 형식적으로 똑같은 전례에 식상해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일 똑같이 뜨는 해, 매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떤 ‘새로움’을 매순간 발견하지 못한다면 영적인 생명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서 점점 어두워질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우리가 매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며, 생기를 북돋워서 생생하게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생명과 이어주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육체적 생명은 시간이 지나면 노화하고 쇠퇴하지만, 영적인 생명은 생생하게 살아서, 끊임없이 새로워져 자라나고 성장합니다. 영적인 생명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보살핌이나 손길이 부족해서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몸을 모시기에 합당하도록 내 마음을 얼마나 보살피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 부산교구 김형수 신부 : 2018년 8월 12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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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 당신을 내어놓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폭염에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가끔 지쳐서 힘이 빠질 때, 오늘의 예수님 마음을 떠올리곤 합니다.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외치시던 예수님의 외로운 표정을 그려봅니다. 진리 선포에 귀를 닫고 영원한 생명을 거부하며 돌아서는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시며 우리 주님, 정말 외로우셨을 테니까요.

당신을 믿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며 살아가는 내 안에서, 지금 그분의 심정은 어떠실지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주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풍성함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땅에서의 재물과 능력과 건강이 뒷받침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기 일쑤이니까요. 그날 그분을 따르다 쌀쌀맞게 돌아섰던 군중들처럼 영원한 생명의 풍성함을 흘려들으며 땅에서의 풍요만을 갈구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니까요. 이렇게 당신을 외롭고 힘들게 하는 일들을 많이 저지르는 우리네 형편이 죄송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늘 에페소 신자들에게 적어 보낸 바오로 사도의 편지에 마음이 젖어듭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독서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철저히 살아낸 후에도 세상을 두려워했던 엘리야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죽기를 간청했던 그 외로움을 감지합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때문에 많이 외롭더라도, 혹여 세상이 우리 심사를 심히 괴롭히고 우리 눈앞을 캄캄하게 할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아도 괜찮다는 이르심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유혹도 이겨낼 것을 약속하신 주님께 당신이 원하신 대로 사용하라고 자신을 내어 드린 존재임을 잊지 말아달라는 애틋한 당부는 아닐까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오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주님께서는 늘 승리하는 분이심을 잊지 말라는 호소는 아닐까요?

솔직히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사랑과 용서일 것입니다. 강론의 주제에서 이렇게 사랑과 용서가 수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실천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콕 집어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합당하게 봉헌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을 것도 같습니다.

이웃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이 뚜렷한 선포를 어찌 들으시는지요? 그만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안에 필수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신지요?

성경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용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용서야말로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에 꽃피게 하는 첫걸음임을 밝힙니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은 힘이 듭니다. 더욱이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용서라니…… 손해가 막심할 것 같습니다. 아니, 분명히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용서의 원칙을 밝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용서가 힘들 때마다 전혀 용서를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를 먼저 용서해주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의 잘못 이전부터 벌써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명심하라는 얘기입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죄를 짓는 순간에 벌써 예수님께서는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철저한 사랑에 기반을 둡니다. 상대가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억울해질 각오를 갖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의 폭이 끝없으니 그리스도인은 늘, 언제나, 항상, 끊임없이,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애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용서가 귀하고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가둬두고 있는 과거를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도록 해 주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의 삶을 오해하고 살아가니 딱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면 모든 일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여기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라는 말씀에 이어 곧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하신다는 점을 도외시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매일 신앙 고백을 바치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세상의 판단에 얽히고설키어 지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생명의 말씀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고귀한 당신의 살과 피를 공급받았음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진리를 깨달아 선포하는 하늘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삶이 이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땅에서의 삶 이후에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의 행색을 살피면 그날 주님의 말씀을 명확히 깨닫지 못하고 등을 보였던 유다인들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미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거룩한 존재로 변화된 사실을 잊기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어렵다하고 ‘어찌 그럴 수가’라며 반신반의하기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진리라며 외면하기에 그렇습니다. 때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자리였던 최후의 만찬에서 다시, 거듭, 이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이해와 별개이며 오직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곧이곧대로 이루어질 진리임을 명심하도록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매일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하여 이 땅에서 영원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줍니다. 수많은 성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깊고 넓은 향기를 지니는 이유일 터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말도 많고 해석도 다양한 삶의 정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 모든 문제의 열쇠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당신과 하나 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알리고 이루고자 하십니다. 진정한 삶의 축복을 선물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생명의 빵으로 배불린 우리들이 그 열쇠로 세상을 살리기를 참으로 기대하며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지닌 이 작은 사랑과 굳센 믿음이 세상을 살리는 예수님의 밑천입니다. 아무리 덥고 지치더라도 부디 내 안에 모신 주님을 외롭게 하지 맙시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가톨릭신문 2018년 8월 12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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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66
677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7
676   [원주] 영적법칙  [1] 72
675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4] 2448
674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9
673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서 나를 따라라.]  [4] 1577
672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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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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