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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성체, 이 세상에서 체험하는 하느님
조회수 | 2,196
작성일 | 06.08.12
묵상길잡이; 하느님을 보고 만지고 느껴서 알 수는 없다. 하느님은 감각적인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갈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우리가 성체 안에 주님의 살아 계심을 믿을 때 참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1. 감각 저 건너편에 계신 분

오늘 복음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사함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며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못마땅해하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6,46-47) 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위한 믿음을 강조하신다.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神)을 감각으로 포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는 마치 하느님의 손을 잡고 인생의 길을 거닐기라도 하듯이, 하느님의 품속에라도 있는 듯이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으로 사는 이들이 있다. 하느님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순교자들이나, 철저한 헌신으로 자신을 송두리째 이웃사랑을 위해 내놓으신 분들은 마치 하느님을 눈으로 보기라도 하듯이 철저히 그분과의 일치 속에 사셨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하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다.

2. 성체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빵의 모습으로, 무한히 자신을 낮춘 몸짓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가?  사랑의 가장 큰 특성은 '함께 나눔'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려 하신다. 만일 신(神)과 신(神)사이라면 서로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니까 굳이 어떤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하든지, 몸짓을 하든지, 선물을 건네든지 어떤 표현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지를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며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보이는 표현이 없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성체성사는 당신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사랑, 수많은 기적으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우리 중의 하나가 되어 주신 사랑,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당신을 제물로 바친 사랑, 이 모든 사랑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과 피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시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성사이다.

3. 어떻게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우리는 미사 때마다 성체를 받아 모신다. 그 때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는 감동이 있는가?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성당에 나오는 신자가 낚시 간다고 근 한달 이나 주일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는 어쩌다 주일 미사에 가서 고해성사도 받지 않고 그냥 영성체 하려 나가려하기에, 부인은 남편을 꼬집으며 못나가게 하였다. 그 때 그 남편이 부인의 손을 뿌리치면서“나도 헌금했는데, 하나 받아먹으면 안되나?" 하였다. 신자들 중에는 이렇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성체를 모셔야하는지 전혀 모른 채, 습관적으로 영성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끔 영성체 하러 나오는 그 순간에도 장난치고 킥킥거리는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6,51)하셨다. 나는 성체 안에 참으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는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께서는 성체성사로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너무나 깊이 느껴 성체를 모실 때마다 가슴이 불로 지지듯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성체 안에 참으로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그 분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무력감과 두려움과 불안을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 안에서 참 생명을 체험할 것이다. 오늘 미사 때 성체를 받아 모시고 영성체 후 묵상 때, 이렇듯 부족한 나를 찾아주심에 깊이 감사 드리고,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며, 우리의 걱정과 계획도 그분께 봉헌하자.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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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거리는 군중들. 그 군중들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그것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1.47).”

수군거리는 군중들. 그 군중들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어찌 우리를...’
‘이 작은 빵 조각이 무슨 힘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묵상 글 중에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프로는 불을 피우고, 아마추어는 불을 쬔다.
프로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지만, 아마추어는 두드리고도 안 건넌다.
프로는 여행가이고, 아마추어는 관광객이다.
프로는 리더(Leader)이고, 아마추어는 관리자(Manager)이다.
프로는 사람이 우선이고, 아마추어는 일이 우선이다.
프로는 구름 위에 뜬 태양을 보고, 아마추어는 구름 속의 비를 본다.
프로는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마추어는 이기는 것도 걱정한다.
프로는 ‘난 꼭 할거야’하고 말하지만, 아마추어는 ‘난 하고 싶었어’라고 말한다.
프로는 뛰면서 생각하지만 아마추어는 생각한 뒤 뛴다.
프로의 무대는 그라운드지만, 아마추어의 무대는 관중석이다.
프로는 신뢰를 쌓지만, 아마추어는 통제에 의존한다.
프로는 삶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아마추어는 직책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프로는 공유하려 하고, 아마추어는 독점하려 한다.
프로는 웃지만, 아마추어는 비웃는다.
프로는 힘들어하지만, 아마추어는 힘들다고 소리친다.
프로는 자신에게 엄하고 남에게 후하지만, 아마추어는 자신에게 후하고 남에게 엄하다.
프로는 길게 내다보고, 아마추어는 눈앞의 것만 본다.
프로는 시간을 관리하고, 아마추어는 시간에 끌려 다닌다.

하느님 아버지께 파견된 아드님답게 예수님께서는 늘 프로 자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어 깊은 인상과 신앙을 자아냅니다. 우리는 그 분을 닮고 싶지만 하느님 아버지와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하였기에 아직까지 아마추어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 같습니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집전합니다. 많은 이들의 죄와 고통, 고민을 들으며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드립니다. 그러나 고해실을 나서면서 그 짐을 벗어 놓지 못합니다. 저 또한 오늘 복음의 수군거리는 군중들처럼, 주님께서 꼭 들어 주셔야 할 텐데, 주님께서 꼭 용서해주셔야 할 텐데.. 라는 많은 걱정을 가지고 아마추어 자세로서 미사(성체성사)를 집전을 시작합니다. 불을 쬐던 사람이,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구름 속의 비를 보는 사람이, 힘들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눈앞에 것만 보는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 분의 몸을 거양하게 됩니다.

높이 올려 진 성체를 바라보고 경배하며, 마음속의 걱정과 불화, 신자들의 바램과 짐을 맡겨 드립니다. 그리고 그 분의 몸을 모시며 그 분과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이 됩니다.

불을 피울 수 있음을,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음을, 구름 속에 태양이 있음을, 주님 안에서 힘들어 할 수 있음을, 미래를 희망할 수 있음을 깨닫고 감사를 느낍니다.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늘 생명의 양식을 당신의 몸으로 주시는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아멘.

최종태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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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보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인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군중 사이에 깊은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고 맙니다. 자신들이 아는 바로는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이고, 그의 부모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나 되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고 맙니다. 사실 우리도 복음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경험한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앤 머튼ANN MORETON이라는 사람의 거미SPIDERS란 연구 보고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가 얼마나 한정되어 있고 좁은지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연구 보고서에 이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은 거미는 건물이나 나무나 숲 속에서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거미의 생태계는 다양하다. 돌 밑에도 거미는 살고 있고 바다 밑에도 거미는 살고 있다. 거미는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EVEREST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 공중에서 조종사PILOT에 의해 발견이 되기도 한다.”라고 합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 하신 것은 자신의 생애를 전부 쏟아 부으신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것도 부족하여 당신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여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셨기에, 십자가 사건은 이 빵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빵을 먹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빵으로써 남에게 먹히는 삶, 이것이 진정한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 육적인 것에 마음의 눈이 가려 진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육적이고 인간적인 예수님의 모습만을 보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함축하고 있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고,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생활 안에서 단지 보이는 것, 또는 육적인 것, 또는 선입견으로 이웃을 판단하여 진리를 간과하는 중대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신앙의 눈을, 신앙의 감각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안테나를 세우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유대인들이 저질렀던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신앙의 감각을 소유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닥치게 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으며, 오히려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당신의 신성을 감추고 계셨습니다. 이제는 빵의 형상 안에 존재하시면서 당신의 인성마저 감추고 계십니다. 빵의 형상 안에 계신 예수님! 이 신비는 신앙의 눈으로만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거미가 바다에서, 공중에서, 돌 밑에서, 에베레스트 산 위에서 발견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평생을, 어쩌면 거미를 연구한 사람의 눈에만 드러납니다. 이처럼 빵이 성체이고, 성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등식은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드러나는 신비입니다.

마산교구 조명래 안드레아 신부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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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인생은 두 개의 산 사이의 도정으로 규정된다. 이 도정에 대해 기술하는 열왕기 상권 17~19장의 장면에 카르멜산(18장)과 호렙산(19장)이 등장한다. 오늘 독서 장면의 공간적 배경은 해당 두 산 사이에 놓인 광야이다(19,4-8). 엘리야는 카르멜산에서 내려와 호렙산으로 향하고 있다.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 제일 정점을 찍은 카르멜산에서 이제 내려와야만 한다. 카르멜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burn-out 되어 이제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한다. 그의 상태는 주님께 죽기를 간청하기에 이른다. 잠으로 표현되는 절망 한가운데서 천사가 나타나 빵을 건네고 다시 일어서게 한다. 다시 한번 산에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이번에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새를 훨씬 넘어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카르멜산에서는 ‘불로 대답하는 하느님’(18,24)을 만났지만, 호렙산에서는 ‘불이 지나가고 난 뒤’ 다가서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19,12). 엘리야의 인생 도정의 출발점인 가뭄은 자연에 엄습한 불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연의 불로 인한 기근이 문제였다(17,1). 엘리야 스스로가 빵이 없어 죽을 처지였다. 그때 주님께서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에게 빵을 보내신다(17,4.6). 유다 전통에 의하면, 해당 ‘엘리야의 까마귀’(히브리어로 Oreb)는 노아의 홍수 때 사십일 간 내린 비가 멈춘 후 땅이 말랐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방주 밖으로 보낸 바로 그 까마귀이다. ‘밖으로 나가 물이 마를 때까지 왔다 갔다 했지만’(창세 8,7)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방주로 되돌아(8,11) 온 비둘기와는 달리 다시는 방주로 되돌아오지 않은 그 까마귀이다. 이제 그 까마귀가 입에 빵을 물고 온 것이다. 엘리야 역시 자신의 ‘방주’에서 나와 온 세상에 빵을 주어야만 한다. 비가 내려 가뭄에 의한 기근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이는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에서 미리 선취된다(17,8-24). 카르멜산에서는 불의 문제가 불로 해결된다. 가뭄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18,41-46). 그런데 이제 정작 엘리야 자신이 문제이다. 온 세상의 기근 문제를 해결한(불의 문제를 불로 해결한) 자가 다시 (자신의 불 때문에) 굶어 죽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빵을 주시고 ‘생명의 빵’인 당신 계명을 선사하신 호렙산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호렙산에서 엘리야 자신의 가뭄이 해결된다. 엘리야는 그때까지도 불로 가득 차 열 받아 있었으며 ‘불로 대답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마음에 조용히 비가 내린다.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열 받을 만큼) 빵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셨다.’(요한 6,41.50-51) 오늘 복음 장면에서도 사람들은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만나 자신 안에 모시게 된다. 더 이상 불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인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 그리고 온갖 악의’로써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할’ 이유가 없다(에페 4,30-31). 그러한 불로써 스스로를 태울 이유가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쩌면 또 다른 엘리야이다. 온 세상의 기근을 해결할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셨음에도 정작 스스로는 계속 불 속에, 기근 속에 처한 채 다른 빵을 찾아 열심히 왔다 갔다 하는 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이미 burn-out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안에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들어오시고 성령의 비가 내린다. 다시 일어나 나 자신의 ‘호렙산’으로 향해야 한다.

▦ 마산교구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8월 12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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