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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예수님 안에서 나눔은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조회수 | 2,222
작성일 | 06.08.12
신학생 이었을 때, 영성 담당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얘들아,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무엇인줄 아니? 그 길은 다름 아닌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길이야.” 신부님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올곧게 살아야 한다.’ ‘양심껏 살아야 한다.’ 등등, 누구나 철나면서부터 많이 들어왔고 또 당연하게 여기는 좋은 말들입니다. 머리로는 누구나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알긴 다 알지만 그 내용을 마음으로 새겨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살아내기가 힘들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고, 욕심이 많아서 내게 이득 되는 것부터 챙기는데 바빠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사용하시는 언어들 중에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좋은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들어 오세요’, ‘한잔하고 가세요’, ‘식사 좀 들고 가세요’…. 이웃에서 누가 들렸다든지, 지나가다 길을 묻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구걸하는 사람이든지, 지나다가 길을 묻는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마음을 나누고자 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따뜻한 마음의 배려가 담겨져 있는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러 가지 면에서, 또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워진 지금 이런 나눔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골 구석 구석까지 들어간 도시의 각박함은 ‘시골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보다 더한다’는 말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물질은 더 풍요로워졌는데 생각이나 마음은 더 삭막해졌습니다. 실상 따뜻한 나눔들은 화려한 도시보다는 흙과 나무와 풀과 물이 있는 농촌이나 어촌, 산촌에서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도시에서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경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가는 것처럼, 도시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가야할 길입니다. 그 길은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주신 사랑의 길입니다. 또 그 길은 내가 너를 잡아주고, 내가 너를 먹여주고, 내가 너를 일으켜주는 나눔의 길이고, 우리 모두의 삶을 신명나게 해주는 구원의 길입니다.

인천교구 이상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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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빵인 예수님

성모님께서 사랑하시는 사제들에게 하신 말씀(443번 참조)을 보면 사람은 현세를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굶주림을 겪고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육신의 굶주림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외에도 “정신적 굶주림이 있는데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며, 영혼의 굶주림이 있는데 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함을 그리고 마음의 굶주림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채우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 51)으로 산다…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교만, 무절제한 이기심, 증오, 폭력, 그리고 심각한 사랑 불능증의 끔찍한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일치와 사랑의 길뿐이다.예수께서 무한히 숭고한 선물, 즉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를 너희에게 주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에도 “성체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으로 인간 정신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고, 당신 ‘은총’으로 영혼의 굶주림을 채워 주시며, 당신 ‘사랑’으로 마음의 굶주림을 채워 주십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체성사에 관한 수많은 성인들의 증거와 증언을 갖고 있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1905~1938)는 수도자로서 33년간의 짧은 생애를 살면서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자서전에서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성체 조배가 있었다…기도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갔을 때, 나는 영적으로 경당으로 옮겨졌고 거기에서 성광에 모셔져 있는 예수님을 뵈었다. 성광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을 이 영혼들은 신앙을 통해서 본다. 오, 그들의 위대한 신앙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내 안에 아무런 생명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는 모든 성체 하나 하나 안에 생명이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다. 내가 어느 영혼 안에서 활동할 수 있으려면 그 영혼이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살아 있는 신앙이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성녀 파우스티나 수녀의 일기, 1420, 팔로티회)

“이제 너는 거룩한 성사 안에 있는 나의 사랑을 묵상하여라. 여기서 나는 너의 배우자로서, 영혼과 육신 그리고 신성(神性) 모두 온전히 너의 것이 되어 준다.사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너는 잘 안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은 다만 한가지, 그것은 상호성이다.”(1770).

오늘 화답송 시편에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라고 초대합니다.

본당에는 성체 조배실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에도 작은 조배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주님을 찾는 교우 분들은 소수입니다. 좀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창조주시요 구세주로서의 엄위하심을 감추시고 성체 안에 가난과 겸손과 사랑으로 침묵 가운데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 여정에 생명과 빛과 힘을 주시고자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아멘.

박창목 바르톨로메오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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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당신을 위해 행동합니다.

신학생 때 어느 수녀님들의 작은 공동체에 점심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녀원 거실에 걸려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빵의 삶을 살자!”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고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그 때 그 글을 보고 참 많은 인상을 받았었나 봅니다.

빵은 먹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빵은 그 빵을 먹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바로 빵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도 두 가지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나는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나 자신을 위해 행동합니다.”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당신을 위해 행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당신의 발을 디딜 곳으로 처음 선택한 곳은 마구간의 구유였습니다. 구유는 짐승들의 밥통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온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인지를 미리 알려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분이셨고, 내어주는 삶을 사셨고, 빵의 삶을 사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마운 약속을 우리에게 하십니다.“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러 제대 앞으로 나아갈 때, 사제가“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말에“아멘”하고 응답을 합니다. 이‘아멘’이라는 응답에는 늘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저는 이 성체가 예수님의 거룩한 몸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또 하나는‘이 성체를 받아 모시는 저도 예수님처럼 빵의 삶, 내어주는 삶을 살겠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빵의 삶을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나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한복음 6장 56절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약속 때문에 또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성체를 통해 오시는 예수님께 의탁하며, 오늘도 내일도 이렇게 고백하며 살려고 노력해봅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당신을 위해 행동합니다.”

인천교구 채명성 미카엘 신부
  |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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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씹혔다. 씹다. 씹힌다.

“씹다, 씹힌다.”
우리나라 말에 ‘씹다, 씹힌다.’는 그리 달가운 표현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이 한 말과 행위를 무시하고 거부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듣는 상황이 되면 엄청나게 자존심이 상하면서 화를 낸다. 또한,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언젠가는 갚아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씹어 음미해야(Trogein)’ 한다고 말한다. 안셀름 그륀은 요한복음 설명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희생에서 완성된 예수님의 사랑을 음미함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 육신에 스며들도록 해야 한다. 씹는 행위는 음식 섭취의 전통에서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내적으로 되새기는 묵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라고 표현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음식이 되어 우리 안에 머무르시기 위해 씹혀 사라지고 우리 안에 머무르시어 생명의 말씀으로 교류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인격적인 만남이다. 그래서 이것은 생명의 빵이 되실 것이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이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의 신비로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의미는 그분의 몸과 피가 우리에게 씹혀 우리의 육신 안에 새로운 치료제가 되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처럼“불사불멸의 명약이요, 죽음에 대한 해독제”로서 우리의 아픈 곳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그분의 몸과 피는 영원한 생명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된다.

이제 그분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처럼 살려고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씹히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씹을 때 그리스도를 씹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씹힘은 말씀이 분화되어 생명이 되고,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알려주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예식을 넣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준다.‘너희도 나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우리의 일상으로 되돌아가 본다. 오늘 독서의 엘리야 예언자처럼 지쳐버린 나를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빵과 물을 선물하시듯, 우린 성체성사와 말씀을 선물 받는다. 그리고 그 힘을 얻어 다시 호렙산으로 걷는 예언자처럼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을 것이다.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힘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이고, 그 살과 피는 우리에게 씹혀 음식이 되시고, 그 음식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씹어 먹어 보자.

▦ 인천교구 최경일 빈첸시오 신부 : 2018년 8월 12일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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