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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마리아 :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조회수 | 1,969
작성일 | 05.12.15
오늘의 전례는 이미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는 성탄을 앞두고 기다림의 자세가 더욱 열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번 주간의 독서는 우리로 하여금 마리아의 태중에 육화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약속이 갑작스러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나치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다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제1독서: 2사무 7,1-5.8b-12.14a.16: 네 몸에서 난 자식 하나를 후계자로...

제1독서의 예언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교차시키는 예언으로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 왕좌를 영원히 차지하게 되리라는 나단의 유명한 예언이다(2사무 7,12.14.16 참조). 그 예언은 다윗의 직계자손이라는 범주를 초월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이다. 이것은 먼 훗날을 파악하고 있다. 즉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메시아만이 나단의 신비스러운 예언을 온전히 이루어줄 것이다. 예언자들과 시편작가들을 통해 이러한 방향으로 사색이 이루어진다(이사 11,1; 시편 88,4-5.29 참조). 또한 오늘 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의 발단을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으며(루가 1,32-33 참조), 바오로 사도도 이러한 역사적 신앙적 자료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로마 1,3-4 참조). 여기서 모든 주도권은 오직 야훼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의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 실현될 때, 이는 역사를 초월하는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 루가 1,26-38: 너는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으리라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이 말씀은 동정녀의 마음과 태중에서 실현되는 육화의 신비를 알려주는 말씀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와 구원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의 역사는 나자렛의 한 처녀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획에 동의하는 그 짧은 순간에 집중되어 있다. 그녀 자신이 아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바로 그녀를 통해 이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정녀시여, 속히 응답하소서. 천사에게 속히 응답하시고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소서.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소서. 인간의 ‘말’을 하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소서. 일시적인 ‘말’을 하시고 영원한 ‘말씀’을 받으소서”("Missus est"에 대한 설교 IV,8-9).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동정잉태’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한 천사의 응답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35.37절). 또한 마리아의 동정성은 예수님과 관련 하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즉 예수께서 인간이 되시어 완전한 우리의 한 형제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인간성을 갖춘 채 하느님의 참된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마리아의 동정성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천사의 응답은 사막의 천막 안에서,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구름형상으로 나타나셨던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현존(출애 40,34; 1열왕 8,10 참조)을 상기시킨다. 바로 루가가 이러한 상징적 표현을 통해 예수의 존재적 기원이 하느님의 이니시어티브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는 ‘새로운 집’ ‘새로운 성전’이시다. 즉 9개월 동안 성령의 엄위로운 궁전이 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집이다. 이제 성탄의 신비에 가까이 들어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가르침이 여기에 있다. 즉 우리도 마리아를 지극히 풍요롭게 한 ‘동정’의 자세, 다시 말해 하느님의 주도권과 그 사랑에 대해 완전히 개방된 자세를 우리 마음 안에 갖추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내용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무상성’이 마리아에게서 완전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창조적 힘을 지닌 ‘무상성’에 인간의 응답과 협조가 있을 때, 그 선물이 고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라는 응답이 ‘은총’을 세상에 들어오게 하였고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게 하였으며 마리아 자신이 그 모범이 되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일은 그리스도의 모친이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였다.

마리아는 먼저 신비스러운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모친’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즉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낳아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마리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제자가 됨으로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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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소중한 선물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기 예수님께 봉헌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새 제대 앞 네 개의 초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어느새 제대 앞 촛불이 모두 밝혀졌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간절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촛불은 모두 밝혀졌습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결심했던 약속들을 잘 지키지 못했음에도 그렇게 시간은 지나간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나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정성을 다해 나의 마음 안에 모시겠다고 결심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지킨 것이 없는데, 그렇게 제대 앞 네 개의 초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제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로 변명을 하려 해도 말 그대로 변명일 뿐입니다. 어떤 이유를 찾는다 해도 그것은 변명이고 핑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위안을 삼으려 해도 왠지 마음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게도 어리석은지. 작년 이맘때 난 같은 마음이었고 다음에는 정말 준비를 잘하고 결심한 것을 꼭 지키겠다고 다짐했건만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응답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천사의 알림에 변함없이 같은 마음, 같은 응답으로 주님의 뜻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시길 기도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시면서 끝내 하느님의 뜻이 당신을 통해 세상에 펼쳐지도록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순명하시는 참 좋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그 어떤 두려움 속에서도 끝없는 믿음의 마음으로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시며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기에 그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며 마음을 열어 우리 마음에 구원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오시는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기에 그 어떤 것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사랑 고백임을 알기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철구(요셉)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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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구유

어느 나라의 왕이 다음과 같은 방을 써서 나라의 곳곳에다 붙였습니다. “섣달은 별이 내리는 달이다. 각자가 별을 받을 구유를 하나씩 만들어 와서 심사를 받도록 하라. 살아있는 구유로 판정이 내려진 사람에게는 상을 주겠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구유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정성들여 우아하게 구유를 꾸몄습니다.

심사일이 다가오자 응모자들은 모두 들떠 술렁거렸습니다. 왕이 몸소 전시장으로 와 가슴 속에서 빛나는 별을 꺼내어 응모자들의 구유에 살며시 놓아보았습니다. 왕은 부자가 만든 금도금을 한 주물 구유 속에다가 별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별은 쇠인형으로 변하였습니다. 별은 예술가의 대리석 구유에서 돌인형으로 변했고, 권력가가 만든 향나무 구유에서는 볼품없는 나무인형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실망하여 궁으로 돌아가려던 왕은 문득 군중들 틈에서 멈칫거리는 한 소녀를 발견했습니다. 왕은 소녀를 불렀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말고 이리 나오너라.”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면서 살았던 소녀는 쓰레기 더미에서 차마 버리기 아까운 헌 나무 조각을 주워 잇대고, 역시 주운 천조각을 이어 바닥에 깐 작은 구유를 안고 있었습니다. 왕은 이 소녀의 그 가난한 구유 속에 별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별이 숨을 쉬면서 거룩한 아기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기쁨에 넘쳐서 말했습니다. “이리들 오라. 이 가난한 소녀의 구유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구유의 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유의 마음이 중요하다. 형식의 구유에서는 인형으로 있는 별도 정갈한 마음의 구유에서는 거룩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 태어남이 진짜인 것이다.”

대림4주입니다. 제대 앞에는 보라색, 연보라색, 분홍색, 흰색 초가 모두 켜져 있습니다. 이제 초는 예수님의 탄생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고, 독서와 복음도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우리는 나를 바라보았고, 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러한 작업들이 바로 탄생하실 예수님의 자리인 구유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었음을 우리는 성탄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구유’가 어디인지를 성모님을 통해 분명히 알려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갑니다. 천사는 가난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을 지닌 마리아에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소식을 전해줍니다. 마리아도 그 사실을 처음에는 주저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 생각으로, 내 뜻으로 이해할 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겸손한 마음을 지닌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하며 내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합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탄생할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과 나의 뜻보다는 주님을 뜻을 찾는 마음, 또한 내 집착과 아집을 내려놓는 마음 안에서 잉태되시고, 탄생하심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성탄 미리 축하드립니다.

황용구(안드레아)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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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는 힘 / 겸손되이 순명하는 삶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복음의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소설이나 연극과 같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나 봅니다. 저는 그 가운데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천사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인간이었지만, 천사와 인사를 나누는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며,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며,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던 여인’임이 드러납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복음의 여인입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는 뼈대 있는 가문에 속해 있음이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던 즈카르야의 부인 엘리사벳과 사촌지간이었습니다. 당시 사제 가문이 혼인할 때는 같은 가문끼리만 했기에, 처녀 마리아는 사제 가문에 속한 여인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던 처녀 마리아는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과 혼인 준비를 합니다. 마리아는 왕의 가문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그 가운데 태어날 아들은 사제직과 왕직을 물려받을 것임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던 여인임이 드러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구세주 잉태소식을 전했을 때, 몹시 놀라기도 했지만, 무슨 뜻일지 곰곰이 생각하는 신중한 여인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예뻤을지 생각해 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편으로 주님께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갖고 있음이 또한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몹시 놀라 곰곰이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때, 천사는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의 영혼은 행복 속에 머물 것이고, 주님께서 친히 그의 가는 길을 인도해주시며, 그 자손을 번성케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 말씀이 마리아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받은 복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성모 마리아는 복된 여인이었습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총애(寵愛)를 받은 여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모습에서 마리아가 하느님의 배우자임이 드러납니다.

한편으로 성모 마리아의 당돌하고도 순박한 모습도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따지듯 묻습니다. 한 여인이 아이를 낳으려면 남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마리아는 분명하고 솔직하게 묻습니다. 어전(御前)에서 겁 없이 묻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과 말씀과 성령께만 몸과 마음을 여는 여인임이 드러납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라는 고백은 하느님을 위해서 흠 없이 준비했던 여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영적으로 성숙한 여인이었지만, 당신의 몸은 하느님을 위해서 동정의 처녀였습니다. 하느님께만 몸과 마음을 여는 순결함과 아름다움이 꽃피어나는 여인이었습니다.

성령께서도 이 여인이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짝이며 궁전’으로 삼았으리라 여겨집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이야기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이에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리하여 처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낳는 여인’(하느님의 배우자, 그리스도의 어머니,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이 됩니다.

이처럼 마리아가 천사와 만나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며, 기쁨의 은총을 체험하고, 주님을 향한 경외심 속에서 하느님의 총애를 받고, 성령으로 구세주를 잉태한 성령의 짝이며 궁전, 하느님의 배우자, 하느님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어머니라는 신분상의 칭호를 받게 되는 결정적인 열쇠는 겸손과 순명에 있다고 봅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가 또 다른 ‘영적인 마리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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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1983년 영국 이스트본에서 열세 살 소년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토머스 크레이븐. 소년은 모범생이었으며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소년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악마의 저주를 받아 가족들이 일찍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음이 두렵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어머니 곁에서 죽는 편이 낫다.” 소년을 죽인 범인은 ‘악의에 찬 헛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정에 적개심을 품은 한 노인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두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이들에겐 은총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믿었기에 시력을 되찾았지만, 토머스 크레이븐이란 아이는 헛소문을 믿었기에 소문대로 일찍 죽게 되고 말았습니다. 받아들이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은 믿어야 하고 어떤 것은 믿지 말아야 하는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사탄은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과 같아진다고 믿게 합니다. 물론 하와가 죄를 지으면서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는 같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나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무엇을 받아들이고 믿을 것인지,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을 것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악에서 오는 것도 반드시 악의 특징이 있고, 선에서 오는 것도 반드시 선의 특성이 있습니다.

루르드의 물은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육각수의 형태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 물을 마시고 성모님께 기도하고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고 지금도 치유되고 있습니다. 이 물이 발견되게 된 경위를 그 곳에 사시는 수녀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이 샘물은 성녀 베르나데트가 성모님을 만나면서 성모님께서 가르쳐주신 곳을 손으로 파내었기 때문에 솟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처음으로 가르쳐주신 곳은 구정물이 모여 있는 악취가 나는 웅덩이였다고 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가 그 웅덩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 더러운 물을 마시고 그 주위에 자라는 풀을 뜯어먹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모님이지만 너무 지저분한 것을 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 웅덩이를 손으로 더 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서 깨끗한 샘물이 솟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를 통해 은총을 주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르나데트의 순종을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자 그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은총을 입게 됩니다.

사탄이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우리가 믿기를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하기가 쉽지만 죽음이 온다는 것이고,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하기가 어렵지만 생명이 온다는 것입니다.

토머스 크레이븐이란 아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더 이상 견뎌나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죽음이 싫어서 싸움을 포기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항상 더 어려운 쪽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항상 더 좁은 문, 더 힘든 길을 가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셨던 순종의 모습을 똑같이 베르나데트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도 성모님께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라고 하십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구세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 이전에 십자가를 져야 함을 의미했고 성모님도 그에 따를 고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순종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녀 안에 잉태되시고 영원한 복으로써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바라보면서 그 호기심과 욕망을 참아내기를 원치 않았고, 그리스도와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고통을 순종하여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 차이입니다. 내가 첫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느냐, 아니면 두 번째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느냐는, 내가 하기 편한 것을 믿어버리느냐,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느냐입니다.

저는 고 3때 시골에서 하루 3시간씩 통학하며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게다가 성적도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가장 싫은 것이 공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사제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저는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제 자식을 보내면 보냈지 저는 못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께는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교 한 학기가 끝났는데 수석을 하여 장학금을 탄 한 동기 신학생이 “형은 공부도 많이 하면서 성적이 잘 안 나왔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자존심이 상한 저는 하느님께 당하는 지도 모르고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유학가라는 말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였고 그 때는 기도가 공부보다 훨씬 재미있었기에 혹시 유학가라는 말이 나오면 안 간다고 교수 신부님께 미리 말해 놓은 터였는데도 그렇게 명령이 떨어지니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학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워서 돌아올 때는 유학 나오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유학을 안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유학가라는 주교님의 말에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본당주임을 막 나가려고 하는데 주교님께서 다시 유학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한 달 동안 장상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따르지 않아야 하는지 묵상하고 연락하라고 하셨습니다. 보름 정도 묵상한 뒤에 가겠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쉬운 쪽보다는 힘든 쪽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시는데, 그런 모든 것들은 ‘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편하고 좋은 것을 시키시면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목소리는 아닙니다. 오늘 성모님도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겟세마니에서 그리스도께서 순응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Amen!" 하시는 것입니다. 그 순종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혔고 세상에 구원이 내려왔습니다. 공부는 싫어도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합니다. 일은 싫어도 돈을 벌기 위해 합니다. 모든 열매는 이렇듯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 또한 고생스러운 것입니다. 그 고생을 통해 달디 단 열매를 맺게 해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모님이 잉태되게 하시기 위해 성모님처럼 오늘 지고가야 할 십자가도 Amen 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를 비워나갑시다.

전삼용 신부
  |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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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모님처럼

감격스럽게도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내 출신본당에서 새 신부가 탄생했다. 같은 본당 출신이기에 당연히 본당에서 드리는 첫 미사에 초대를 받게 되었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미사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고정으로 미사를 주례했던 본당에 사정을 말씀드려, 그날은 출신 본당 신부의 첫 미사에만 참여하고 고정으로 하던 본당의 미사 주례는 하지 않게 되었다. 미사 주례를 하지 않는다는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첫 미사에 참석하기로 한 주일이 오기 전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연이어 약속을 잡았고 너무나도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틀 연속 과음하며 주일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본당 출신 새 신부의 첫 미사에 참여한 후 집에 돌아왔는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복음 단상을 준비해야 해서 복음 묵상을 하는데 묵상이 잘 안 되었다. 졸음이 밀려왔고 무언가 성경 말씀이 자꾸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자고 다음 날부터 다시 준비하려고 하는데 역시나 묵상이 잘 안 되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삼일 동안이나 같은 성경 구절을 반복해서 읽다보니, 그제 서야 성경 말씀이 묵상이 되기 시작했다.

왜 복음 묵상이 잘 안 되었는지 돌이켜보게 되었다. 우선 주일 미사 주례를 하지 않았고, 그러면서 강론 준비를 하지 않았던 그 한 번의시간이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둔감한 상태가 되도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안일한 마음으로 이틀연속 과음한 문제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덕분에 나 스스로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는 상태를 알고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너무도 쉽게 응답하신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자칫 쉬워 보이는 성모님의 응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그와 같이 응답할 수 있도록 늘 깨어 민감하게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셨기에 가능했음을 생각해 본다. 성모님께서는 늘 하느님께 응답할 준비되어 있는 분이셨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늘 주님으로 당신을 채울 수 있는 분으로서 은총이 가득한 분이셨고 하느님의 총애를 듬뿍 받는 분이셨다. 성모님처럼 언제나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고 그래서 늘 그분을 품고 드러내는 삶을 살면 더없이 좋겠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나의 영적 둔감 상태를 깨닫고, 또한 그런 나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다시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내가되는 것, 늘 그렇게 돌아서고 회개하는 모습으로 성모님처럼 주님을 잉태하고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사제가 되길 소망해본다.

▦ 수원교구 서영준 라파엘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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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성모님처럼 절실하게 갈망하라

한국 애니매이션으로 한국에서보다는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던 ‘넛잡(The Nut Job); 땅콩 도둑들’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벌어들인 수익이 1억 3천만 달러라고 하니 대박이 난 영화입니다.

공원에 사는 조금은 아웃사이더인 설리라는 남자 다람쥐가 있습니다. 그가 공원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먹을 것을 구하려다 겨울을 나기 위해 마련해 두었던 아주 조금의 식량마저 다 날려버리게 됩니다.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공원식구들의 만장일치로 설리를 추방하여 도시로 쫓아 보냅니다. 도시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던 설리는 땅콩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지만 그 안에는 무서운 개가 있고 들어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통해 엄청난 양의 땅콩을 빼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공원 동물들의 통솔자 라쿤은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 공원 동물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신 편의 동물들을 시켜서 이 계획이 실패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설리 다람쥐는 그 방해를 이겨내고 땅콩 부대들을 빼내어 굶어 죽어가는 공원 동물들을 살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게 되면 바뀌는 것이 무엇일까요? 땅 속에 보물이 묻혀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 보물을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좀도둑들도 무언가 하나 훔치기 위해 며칠 동안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거기에 누가 사는지 사람들이 언제 들어오고 언제 나가는지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로 빠져나와야 할지 등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작업을 벌인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원하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하는 등의 에너지를 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던 성모님의 모범이 나옵니다. 곧 며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태어나시게 하기 위해 오늘 복음만큼 완전한 모범을 보여주는 복음은 없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 오시겠다는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한 질문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믿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의 한 이 말들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지니고 가브리엘 천사에게 물어보신 위의 질문은 천사의 말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기에 그 방법을 물어보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동정을 지켜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모님에게만 하느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성모님만이 천사를 처음 만나는 그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볼 수 있는 적극적인 갈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땅콩을 훔치기 위해서도 ‘어떻게’ 훔쳐야 하는지 계획을 세운다면, 하느님을 맞아들이기 위해서도 ‘어떤 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한 그런 구체적인 노력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는 하느님나라를 원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원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예화 중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제자가 스승한테 매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리고는 매일 똑같이 신비스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지요?”
하루는 스승이 그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속 깊숙이 밀어 넣고서 그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풀려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 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는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다 와서야 겨우 풀려났습니다.
다음 날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제, 자네 머리를 물속에 넣었을 때 왜 그렇게 몸부림을 쳤나?”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느님을 숨 막히도록 간절하게 찾는다면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걸세.”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서 전 재산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을 위해 잠자는 것도 포기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수녀가 되어 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교사로 20년을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텅 비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습니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갑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 없는 환자의 치료는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고, 두 번째 병원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은 치료해 줄 수 없다는 소리를 듣고 문전박대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그 여인은 이 수녀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이 수녀는 조금씩 차가워지는 여인을 가슴에 품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아침 일어날 때부터 밤잠자리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누구도 흩트려 놓을 수 없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분이 마더 데레사 수녀님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고 그 가치를 아니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을 얻으려 하다가 아무리 어려운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정으로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 보물을 내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가치도 모르고 그래서 그것을 원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무언가를 주려고 하실 때 그것을 절실하게 원하는지를 보십니다. 절실하게 원하면 적극적으로 그 얻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천에 옮기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영국군이 전쟁에 참패하여 거의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몇몇의 잔여병들만이 숲속으로 도망쳤는데 그 중 ‘부수’ 장군도 그들과 함께 끼어 동굴 속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참패한 것이 수치스러워 칼을 빼어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동굴 어귀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려고 애쓰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거미는 바람으로 인해 6번을 연거푸 실패합니다. 그러나 7번째에 가서 거미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본 장군은 다시 일어나 싸워서 결국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미는 그 거미줄을 치지 못하면 굶어죽게 됩니다. 이것이 절실함입니다.

‘넛 잡’에서 자신이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많은 동물들이 굶어죽게 된다는 설정이 나오는데 바로 그 절심함이 설리 다람쥐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도 절실함입니다. 신앙을 가진지 꽤나 지났는데도 겨우 주일미사에만 간신히 나오고 있다면 하느님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알고 있는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서 최소한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느님은 당신의 보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그분을 절실하게 원합니까? 그래야만 우리 안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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