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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인간의 협조를 통해 인간 역사에 동참하시는 주님
조회수 | 2,133
작성일 | 05.12.16
하느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구원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 계획은 마리아의 겸손한 순종으로 실현되었다. 인간은 하느님의 파터너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협조 없이 아무것도 이루시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1. 상업주의에 오염된 성탄

성탄은 백화점의 대 바겐세일과 문방구의 카드 진열장에서 시작되어 망년회를 위한 음식점과 노래방에서 끝나는 것이 우리나라의 성탄 풍경이다. 성탄의 참뜻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철저히 상업주의에 물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연말 경기(景氣)만이 주 관심사이다. 우리 신자들도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에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예외일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세상에 살면서도 철저히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판공성사를 보며 한해를 되돌아보고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마음의 구유를 준비해야 한다.

2.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리아의 순종으로 실현되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는 나단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제1독서)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영원한 왕위를 누릴 사람이 나올 것임을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거듭거듭 약속하시고 일깨우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메시아에 대한 희망 속에 살아온 민족이다. 수 천년을 기다려 온 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의 의중(意中)에 문자 그대로 '계획'으로만 있었다. 그러나 '정하신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시려 하신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오늘 복음은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에게 보내시어 당신의 뜻을 알리게 하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제1독서의 내용과 일치)고 일러 주신다.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반문한다. 그러자 천사는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하며 엘리사벳의 잉태소식까지 곁들여 하느님의 능력에 대해 상기시킨다.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며 응답한다.

하느님의 의중(意中)에 영원으로부터 있던 인류 구원의 계획이 마리아의 겸손된 순종으로 이 역사 안에 실현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방법이다.

3. 하느님께서는 항상 인간의 협조를 구하신다

우리 신자들 중에는 너무나 무지막지한(?) 신앙인이 많다. 어떤 신앙인을 말하는가? 세상의 불의와 구조적인 악에 대항해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어떤 수고나 투신도, 고민도 하지 않으면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어떤 노력도 할 마음이 없는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오직 "저에게 재앙을 면하게 하시고, 축복을 주옵소서"하는 기복(祈福)적인 기도밖에는 하지 않는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어떤 노력이나 투신도 하지 않고, 마치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손을 놓고 가만히 있다. 철학자 니체는 이런 이들에게  네가 믿는 그런 하느님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신(神)은 죽었다."고 외쳤다.

주님의 오심이 임박하였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역사의 파터너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하느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살아야 한다. 내가 뉘우쳐 새로워지고,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내가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나서는 그곳에 예수님이 메시아로 탄생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탄이 오직 나 혼자만이, 잘 아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하는 축일이 되지 않도록 하자.

내가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구원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은 항상 주도권을 갖고 계시지만 언제나 인간의 협조를 구하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 없이 너를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너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하신 성 아우구스띠노의 말씀을 명심하자.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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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

오늘 복음말씀 중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를 우리는 아전인수격으로 잘못 적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 반성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대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조금도 우리의 노력을 더하지 않고서도 하느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구경하려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에 대한 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지나 않은지요?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이 땅의 공기로써 호흡하고 있는 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는 떼어버릴래야 떼어버릴 수 없는 필연적인 연관성을 갖고서 살아야 합니다. 식량문제, 인구문제, 경제, 문화, 사회문제들은 우리의 생활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나 자신과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라도 모두 연관된 문제들이지만 나 자신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도 머리만 땅속에 파묻고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꿩처럼 이런 모든 심각한 문제들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애써 변명이나 구실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말씀 중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말마디가 눈에 뜨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 모든 문제들은 저의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나이다. 주여!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하며 우리는 겸손과 신뢰를 주님 앞에 드러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이러한 겸손과 신뢰가 위선임을 잘 알고 계십니다.

만약 지금 우리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보고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호되게 질책하실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진정으로 나의 이 미약한 힘으로써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이 거대한 문제들 앞에서 말입니다.

신자 여러분! 그러나 너무 좌절하거나 실망해서 자포자기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시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하지 못할 과중한 짐을 지워주시는 그런 가혹한 분이 아니십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신앙의 귀로써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음뿐이고 종교적으로 잘 훈련된 유태인의 눈으로 볼 때는 걸림돌밖에는 되지 않는 이러한 역설적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당치도 않은 방법을 택하셔서 우리를 감탄케 하고 놀라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사랑하라. 그리고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배고파 울고 있는데 내가 배를 두드리며 먹고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먹는 음식에 유해색소나 담배꽁초를 넣어서 먹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인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서 탈취해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세상의 온갖 악이 사랑하지 않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웃이 병들고 배고프고 추위에 떨지라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부패와 부조리와 사회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대응하여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무기는 이제 무관심에서 사랑으로 바뀌어져야겠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지금 당장 내 옆자리에 있는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정복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렇게 쉽사리 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세주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주간도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전에 우리는 우선 먼저 우리의 모든 잘못을 회개하고 보속하는 의미에서 이제까지 자칫 소홀히 해왔던 이웃사랑을 더욱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진정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는 신자가 됩시다.

이한기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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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사랑으로 충만한 한 주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둘째 독서인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로마 16, 25.) 하느님께서는 힘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죄 많은 우리들의 구원 역사 안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천지 창조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는 한순간도 우리들에게서 당신의 시선을 떼어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이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 35.)

하느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외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협력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우리는 성모님의 이 모범을 따라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전적으로 신뢰와 확신을 봉헌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우리 죄인들을 위해 내어 주신 하느님의 큰 사랑에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이제 우리들 가운데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아멘.

박태정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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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응답(Fiat) - 자유 너머의 자유

만해(萬海 ․ 卍海) 한용운의『복종』이라는 시(詩)입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금(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사실 현대인의 자유에 대한 생각으로 비추어 보면, 만해의 시는 낯설고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예속되거나 복종하지 않고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만해의 ‘달콤한 복종’은 이해될 수 없습니다. 되려 ‘복종’이 ‘자유의 예속’이나 ‘굴복’으로 오인되기에 딱 좋습니다. 여기서 만해는 무슨 ‘구속’이나 ‘굴종’이 아니라, ‘자유를 넘어선 곳에 있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누구에게도 기쁜 마음으로 복종해보지 않은 사람’, ‘자유를 복종의 반대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참된 자유’를 맛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참된 만남’에 이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란 누군가에게 매혹(魅惑, fascinosum)되어서, 나의 ‘자유의지’와 ‘주체성’을 상대에게 기쁘게 넘겨줄 수 있을 때 빛을 발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님처럼 말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라고 응답하십니다.

이 구절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마리아의 Fiat(응답)’라고 불러왔습니다. Fiat라는 라틴어는 ‘이루어지다’ 혹은 ‘그렇게 되도록 격려하여 이루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Fiat에 담겨진 의미에 따르면, 성모님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기꺼운 선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만해가 성모님의 이 응답을 들었다면, ‘행복한 순종’ 곧, ‘자유를 넘어선 곳에 있는 자유’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도 자신의 모든 ‘자유’와 ‘기억’과 ‘지혜’와 ‘의지’를 송두리째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참된 행복은 ‘너를 위하여 나의 자유를 버리는 마음’에 있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Fiat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만해와 이냐시오 성인이 많은 도움이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의 Fiat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근본적으로 성모님의 Fiat는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는 신비요, 하느님의 은총인 까닭입니다. 나아가 성모님의 Fiat 그 이전에,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복종과 Fiat(응답)’이 먼저 있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김호준 시몬 신부
  |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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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응답하는 순간부터 마리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마리아는 죽고 주님의 종만 존재합니다. 종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인을 위한 존재입니다.종은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종은 주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인의 뜻을 펼쳐야 합니다.자신을 주장하고 고집하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니라 주인이 되고 맙니다.

아무나 하늘의 큰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철저히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자신을 낮추고 비워 빈자리가 되는 사람이 하늘의 큰 뜻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빈자리가 되는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빈자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대자비(大慈悲)의 손길을 펼치기를 원하십니다.당신이 작고 가난할 지라도, 배운 것이 없고 별 재주가 없다할 지라고 염려하지 마십시오.당신을 귀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응답하십시오.당신을 통해서 하느님의 큰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강영구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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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통일왕국을 이루고 사방의 원수로부터 평온해진 어느 날, 다윗은 예언자 나탄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지어 바치겠다는 뜻을 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와 달랐습니다. :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디에 모셔야 하는지 그래서 하느님을 어디서 만날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합니다.

그곳은 ‘너와 나의 삶의 자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 ‘나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하였다.’(2사무 7,9 참조)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돌로 된 성전(건물) 안에서만 하느님을 찾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성전 밖에서 사람들을, 특히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전 안에서’ 십자가에 입을 맞추기 위해 까치발을 디딜 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이보게 친구, 자네는 내 발에 입 맞추기 위해 나를 밟고 있다네!” 말하자면 우리가 이웃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외면한 채 성전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살아 있는 돌(사람)’로 이루어진 성전(삶의 현장)입니다. 물론 이 말은 감실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과 성당 안에서의 신심활동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이지요.

복음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성모님에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인간의 삶의 자리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임을 확증해 주시는 것이지요(마태 1,23 참조).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가운데, 특히 가난한 이들 가운데 탄생하시고 머무르십니다. 성탄을 목전에 둔 우리가 깊이 성찰하고 새겨야 할 대목인줄로 믿습니다. 아멘!

<마산교구 김순곤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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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삶

성탄절입니다. 추운 날씨에 연말연시까지 겹쳐 마음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참으로 분주하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따뜻한 마음, 따뜻한 말씨, 따뜻한 얼굴로 자칫 얼어붙기 쉬운 우리들의 모습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겉으로만 맴돌거나 바깥출입에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살다 보면 힘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일하기 싫을 때도, 밥하기 싫을 때도, 공부하기 싫을 때도, 성당에 가기 싫을 때도, 식구들이 보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힘들고 주어지는 현실의 짐들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이상과 현실의 사이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구세주의 탄생이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 바로 하느님이 몸소 사람의 모태(어머니의 뱃속)를 통해서, 생명이 수태되고 출생하는 사람의 깊은 곳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방식이 우리의 생활 현실,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벗어나지 않듯이, 성탄을 준비하는 우리들의 모습,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들의 마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는 방식 역시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 현실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살기가 너무 힘들고 눈물이 날 정도로 괴롭다 할지라도, 나에게 주어지는 삶의 현실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마리아처럼 한 번쯤 반항의 몸부림을 칠 수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고백처럼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라는 복잡하고 힘든 파도를 헤치며, 가족과 친지, 여러 인간관계 안에서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사목자로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증거하는 사제로서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마산교구 양태현 그레고리오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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