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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총을 받은 마리아
조회수 | 2,220
작성일 | 05.12.16
대림 제4주일을 맞는 교회공동체는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라는 여인의 대화를 듣습니다. 대천사의 인사말을 직역하면 ‘기뻐하라, 혜택받은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 ‘혜택받은 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은총을 받은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인사말은 이 일반적인 표현에 담겨, 전 세계 모든 천주교인이 구세주의 어머니께 바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그런데 이 ‘혜택’ 또는 ‘은총’은 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유대관습은 혼인하지 않은 처녀가 임신하는 것을 부정한 행위로 간주하고, 그 처녀를 관습에 따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 관습은 바로 하느님의 율법이고,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하는 ‘은총’을 은총이 아니라 오히려 천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라는 처녀는 그 ‘은총’, 아니 천벌 앞에서 탄원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고 그 뜻을 차분하게 묻습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대천사는 엘리사벳의 일을 예로 들면서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마리아에게 가르칩니다.

교회의 옛 문헌에 따르면 ‘이 순간 바람이 불지 않았고, 파도도 치지 않았으며, 모든 동물과 새도 숨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마리아의 대답에 숨을 죽이며 귀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귀 기울인 그 여인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장황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고, 마리아의 대답을 숨죽여 지켜보던 온 세상은 아마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을 구원하는 사건은 한 여인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에서 시작하여,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그 여인의 아들이 드린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바로 세상의 구원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을 듣는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입니다. 우리를 알지 못하고 우리도 모르는 한 유대 처녀가 “예”라고 응답한 사건이 열쇠가 되어 하느님 구세사의 장엄한 문을 열고,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는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마리아는 꼭 “예”라고 응답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응답은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없다”고 한 가브리엘 천사의 가르침은 엄격한 의미에서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라고 응답하지 않는 이상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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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성모 마리아는 여성으로서 평범하게 사시던 분이었다. 어른으로 성장하여 약혼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루가 1,27)

그런데 어느날 은총을 가득히 받고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인사를 받게 되었다. 친구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았다면 별말을 다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인사를 받고는 ꡒ뭘요ꡓ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ꡒ이제 팔자 고치겠구나ꡓ또는ꡒ운수 대통하겠구나ꡓ하고 기뻐 날뛸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 천사의 말씀이, 지금까지 배워왔던 그분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가브리엘 천사가 언제 올까 하고 기다리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전하려고 그 천사가 나타났으니 성모님은 평정을 잃었다. 상식이나 습관에서 크게 벗어난 전혀 예견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성모님은 천사의 첫마디 인사에, 그때까지의 생각과 삶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흔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새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사말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였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취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하여 그 분을 뵈올 때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 떨리고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 까닭은 하도 끔찍하고도 엄청난 일을 많이 겪어서 떨릴 만큼 큰 충격을 받을 수가 없어서기도 하겠지만 남이 겪는 공포의 사건조차 동감하기에는 우리 마음이 너무 무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두려움을 공포와 동일시하고 피할 대상으로만 여길 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스러움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유물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려워할 만큼 하느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으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그 두려움을 없애시는 분은 하느님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그것을 거두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덕성스런 두려움도 잃고 인간이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기니까 혼란한 것이다.

사실 당황하는 마리아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진정시켰다.

은총이 가득하고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인사에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을 받으면 딴 사람이 될 것임을 알리는 것이다. 모세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받고(출애 3,12) 무력을 믿던 평범한 인간의 자세를 버려야 했다. 이런 변화는 기드온(판관 6,16)이나 사울(Ⅰ사무 10,7), 예레미야(예레 1,8)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은총을 복잡하게 분류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곱게 보고 함께 계신 것을 말한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니 재력, 권력, 지력 등을 다 합해 놓은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힘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그 은총을 인간적으로만 좋아할 수는 없다. 마리아도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예수라고 일컬어질 아기를 낳게 될 것과, 그 예수가 영원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는 또 한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벗는 탈바꿈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부르시는 대로 회개해야 했던 셈이다.

결혼을 뛰어넘는 유일한 새로운 양식의 탄생은 인간의 상식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여쭈어 보는 것은 새로운 탈바꿈의 과정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연스런 상식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예수를 낳고 그 예수의 미래에 관한 말씀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성취되었던 백성의 지도자 역할은 모세, 예레미야, 사울, 다윗(2사무 7,9) 등을 통하여 익히 알던 바인데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자연을 뛰어넘는 사건이 예고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적인 인과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닐 수밖에 없었다.(루가 1,37)

마리아의 물음에 천사는 친절하게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느님의 기운으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기는 경우가 있었는데(Ⅰ사무 11, 7 이하, 판관기 여러곳에 나옴) 이번에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알려 주었다.

성모 마리아는 구약에 여러번 언급되는 야훼의 종을 연상시키는 고백으로 가브리엘을 통한 하느님과의 대화를 끝맺는다.

대림절을 끝내고 예수의 탄생을 곧 맞이하는 우리도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에 흔들릴 수 있어야 하고, 곰곰히 생각하고 여쭙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이 불편 없이 오시게 된다. 그 대화는 그 분이 오시는 길을 평평하게 한다.

심용섭 신부
  |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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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믿음과 예수님 오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공통된 심리적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정 - 분노 - 흥정 - 우울 - 수용의 단계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부정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내가 아직 이렇게 젊은데 그럴 리가 없어. 이 검사는 잘못된 거야!” 이어서 분노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에게 화를 냅니다. “이런 일이 저에게 일어나다니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정도 분노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흥정의 단계가 나타납니다. “주님, 낫게만 해주신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흥정도 소용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이어지는 단계는 수용의 단계입니다. 부정도 분노도, 흥정도 우울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고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패배의 순간일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순간일 것입니다.

이 다섯 단계는 영적인 성장 과정에서도 발견됩니다. 천사가 전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리아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부정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저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마리아는 혼란에 빠집니다. 두려워합니다. 처녀가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을 사건입니다. 약혼이 파기될 수도 있고, 율법에 따라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도 흥정을 벌였는지 모릅니다. “다른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만은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어렵고 힘겨운 상황입니다. 고뇌와 갈등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리아의 위대함이 발휘됩니다. 남들은 여전히 부정하고 분노하고, 흥정하고 우울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마리아는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딛고 있습니다(百尺竿頭進一步 백척간두진일보). 위대한 수락과 수용의 순간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들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마리아의 비장함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열었습니다. 자신을 하느님께 송두리째 맡겨 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마리아의 이 믿음은 아기 예수님이 세상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열린 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참으로 잃음으로써 얻고, 죽음으로써 다시 사는 것인가 봅니다. 믿음은 마리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순백색의 마음! 그래서 오늘 대림 4주일에 우리는 흰색의 초에 환하게 불을 켰습니다.

박성칠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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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순종과 성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으로 알려진 도스토예프스키라는 러시아 소설가가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식들을 불러 앉히고 부인에게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이 말씀을 들은 다음, 자녀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얘들아, 방금 들은 것을 절대로 잊지 마라. 하느님을 무조건 신뢰하여라. 그분의 자비를 결코 의심하지 마라. 나는 너희를 사랑하지만, 내 사랑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자식들에게 자기의 재산이나 무덤 관리에 대해서 유언을 했을 터이지만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에 대한 소설을 썼던 그였기에 하느님을 가장 귀중한 유산으로 자녀들 가슴에 깊이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일생을 하느님 안에서 사셨던 성모 마리아를 만납니다. 어느 날 문득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인사를 드리며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는 말씀을 전달합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가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하고 반문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고 알리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고, 인류를 구원 할 메시아를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좇았다가 힘든 인생살이와 죽음을 벌로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이 이 세상에 죽음과 저주를 가져왔다면 성모 마리아의 순종은 구세주 탄생으로 이어져 이 세상에 축복과 구원을 가져다줬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축복과 구원이지만 자기 욕망을 따르는 삶의 결과는 죽음과 저주라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줍니다. 이것은 비단 아담과 하와 시대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똑같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큰 은총 속에 이스라엘 첫 번째 임금으로 뽑혀 영광의 자리에 올랐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결국 자기 욕망을 좇다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성경 시대 인물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마치 아담과 하와 시대를 방불케 합니다. 하느님을 떠나 스스로 서보려고 자기를 믿고 욕망을 추구하다가 죽음의 길로 떨어졌고, 노예 같은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아담과 하와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죽음 문화를 상생 문화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오늘 성모 마리아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을 떠나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생명과 축복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많은 환자들의 소망을 들어주셨습니다. 소경이 눈뜨기를 청하면 볼 수 있게 해주셨고, 나병 환자가 고쳐주시기를 청하면 손으로 만져서 치유해 주셨지요. 예수님은 죄를 짓고 죽음에 처한 여인을 용서해 주셨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했던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품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청하는 사람을 결코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하느님 말씀에 두고 현실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삶이라는 것을 생활에서 체험하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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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도구

우주 만물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가 계시고, 그 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것들을 만드셨습니다. 우리 인간도 피조물 중 하나이며 창조주의 목적을 지니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 속에서 드러난 창조주의 창조 목적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한 창조주의 도구’가 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의 교만, 자만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느님의 길을 막아 서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나 때문에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이고 하느님의 도구라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고 고백했지만, 실제로는 도구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무엇인가를 하려 합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심지어는 하느님까지 자기 도구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 인간이 하느님의 도구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인간 삶의 본질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시는 신비로운 계획을 감행하시면서 인간 측의 역할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그 역할 중에 가장 중요했던 역할이 바로 성모님의 역할이었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기꺼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종이라 고백하며 불합리한 요구에도 겸손하게 순명함으로써, 하느님을 세상에 낳아주는 하느님의 그릇, 하느님의 구유가 되셨습니다.

겸손은 우리 인간에게 필수적인 덕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직시하여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생각에 불합리해 보이는 하느님의 뜻에도 순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논리와 하느님의 논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논리가 하느님의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성모님처럼 늘 곰곰이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여정입니다. 또한,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인간이 모르는 차원에서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 신앙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게는 힘든 과정일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에게 닥치는 힘든 과정들을 수용하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불합리한 분도 받아들이는 그런 것 아닙니까? 라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합니까?

고찬근 요셉 신부
  |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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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얼마 전, 잘 알고 있는 한 형제가 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나더니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평생 부끄럽지 않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잘 돌보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큰 죄도 짓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봉사도 하며 살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건강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암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으니 하느님께도 섭섭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하필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슬픕니다.”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할말을 잊고 그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안아주었습니다. 한참을 울던 그 형제가 작은 목소리로 “신부님! 그래도 지난 세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더 많은 거 같아요. 내가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감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애써 웃으며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희망을 걸고 붙잡을 수 있다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으로 돌아갈 영혼의 고향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에 마리아는 절대 믿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자칫 정숙하지 못한 여자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런 상황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을 것입니다. “아니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그녀는 상황을 백번 천 번 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 상황에서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보통 그렇습니다. 도망칠 수만 있으면 도망을 칠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 벼랑에 내몰립니다. 그럴 때 우리 신앙인의 선택은하나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주세요. 모두 당신께 맡깁니다.” 보통 그때부터 하느님께서 움직이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처녀 마리아도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을 하느님께 의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권능에 의지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신앙의 응답을 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교회의 으뜸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겸손한 믿음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신심은 모든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성모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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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탄생을 맞이하면서 각 교구의 교구장님들께서 교구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주된 내용은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본 받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맞이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교구의 교구장님들은 ‘보육원, 요양원, 장애인 공동체, 노숙인’들을 찾아가셔서 성탄 미사를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성탄 장식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말에 이루어지는 각종 시상식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 명예, 재물이 가득한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던 분들이 있습니다.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었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던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은 깨어있었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기 위해서 행동을 하였습니다. 많이 배웠고, 율법의 수호자라고 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가득한 책 속에서 탄생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헤로데와 대사제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권력의 중심은 예수님께서 태어나기에는 너무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양양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시간은 단축되었지만 가는 길에 많은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밝았던 시야가 좁아집니다.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터널을 지날 때는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터널이 끝날 즈음에는 곧 밝은 빛이 비추고,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4개의 터널을 지나온 것 같습니다.

대림 제1주라는 터널에서는 ‘깨어 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지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영원한 것들을 추구하게 됩니다.

대림 제2주라는 터널에서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은 깎아져서 평평하게 되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만과 욕망의 산을 깎아서 겸손과 온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어둠과 절망 그리고 고통과 걱정은 희망과 사랑 그리고 나눔과 봉사로 메워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들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모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림 제3주라는 터널에서는 ‘자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랐던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픈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외로운 이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그 주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의 뜻, 세상의 뜻, 욕망과 성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대림의 진정한 의미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성모님처럼 우리들 또한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욕망과 욕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행동하는 것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 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한해를 보내며 많은 모임이 있는 때입니다. 후회와 아쉬움도 있는 때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나의 앞을 가로 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다가올 성탄을 생각하면서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좀 더 기쁜 마음으로,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주님과 함께 주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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