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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하느님이 우선
조회수 | 2,087
작성일 | 05.12.16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쁜 성탄을 잘 맞이하고자 지난 대림 시기 동안 회개와 기도와 자선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보다 훨씬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앞두고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삶의 우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삶의 우선 순위를 하느님보다는 세상 것에 두고 살아왔던 점을 고쳐서 하느님을 삶의 우선으로 두고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무엘 하권을 보면 다윗의 큰 바람은 하느님께 영화로운 집을 지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갸륵한 마음을 보시고 그 보답으로 영원한 왕권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은 다윗이 언제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세상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그 전형이 오늘 복음에 나타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느 ㄴ언제나 하느님 뜻대로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시켜 이렇게 전합니다. '두려워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후라 하여라."(루카 1,30-31). 그러자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3)라고 대답하십니다.

마리아의 이런 태도는 하느님이 모든 것에 우선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세상 것이 우선인 사람들은 결코 이런 일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리아의 표양을 따라 하느님이 우선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어 성탄을 맞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예수님, 저의 삶을 당신께 맡깁니다. 제 안에 영원히 머무십시오."

정비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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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님은 삶의 고백 속에 잉태되어 오신다.

사제가 되기 전, 한 달 피정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그분은 과연 나에게 있어서 어떤 분인가? 당시 약간의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고,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는 여러 모습 속에서 그분들과 다름이 없는 삶을 살아가야 될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하나를 잡아 두어야겠다는 다급함이, 아마도 한 달 피정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피정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화두(話頭)를 ‘하느님’으로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과제로 주어진 묵상과 기도 시간 외에는 온전히 ‘하느님’을 화두로 온 몸과 정신을 채우려고 애썼습니다. 학과 과정에서 배워 알게 된 ‘하느님’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응답하고 계신 바로 그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저 감실만을 바라보았고, 산보를 할 때도 발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의 끝자리에 서 있게 되었고, 소성당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감실만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문득 하느님과 모세의 대화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중략)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3-14) “나는 있는 나다.”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의 체험을 참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림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들려오는 말씀은 성모님과 가브리엘 천사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저는 이 만남에서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1.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에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뛰어난 점 중의 하나는 지적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생각합니다. 머리로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 천사 가브리엘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득하려고 애쓰고 있는 마리아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고는 따지고 들지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렇기 때문에 이러 저러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쓸 수 없는 표현을 가브리엘 천사가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3. 하느님의 존재성을 비로소 고백의 형태로 응답하고 있는 마리아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신 하느님, 그분을 잉태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받은 것으로 혹시 하느님과 단절의 담을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그분은 그런 분입니다. 그 분 앞에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고백하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이상철 세례자 요한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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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

감추어진 신비

이 같은 질문과 답이 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드십니까?”

“인간들이 품고 있는 시기와 증오와 질투를 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하느님께서는 늘 교만한 자, 높은 자를 내치시고 겸손한 자,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 제일 슬퍼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을 잊을 때 가장 슬퍼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내려오신 뜻도 바로 이와 같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 인간들이 집착 속에 늘 품고 지내는 시기와 증오와 질투, 그것 때문에 일생을 괴로움 속에 사는 가련한 인간들의 얽매인 사슬을 끊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언제나 소외와 억눌림 속에 잊혀진 가난한 이들, 핍박받는 이들, 고통 속에 있는 이들, 멸시받는 이들, 한마디로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시고, 그들이 떳떳이 기를 펴며 살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교만한 인간들이 저 잘난 양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느님 따위야 하며 그분을 가슴과 생각에서 지우며 살 때, 다시금 당신께서 현존하신다는 것, 지금 우리와 함께 여기, 이 땅에 머물러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인간 세상에 오신다는 신비, 우리는 이 신비의 신앙을 2천 년 전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도 언제나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셨던 분, 오실 분이 아니라, 지금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는 오셨던 주님의 탄생을 다시 한 번 기뻐하며 그 신비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고, 앞으로 다시 오시겠다는 재림의 약속을 희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진정 성탄은 화해와 용서이며, 낮추임의 겸손과 자기 비움이고, 오신 주님의 현존을 굳게 믿는 축제인 것입니다. 양육강식의 세상, 저마다 자신이 높아지려는 아귀다툼의 이기적 세상에서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이 같은 낮아짐의 기적을 오시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루신다는 것이 성탄의 신비이며 기쁨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밝힙니다.

“하느님은 내가 전하는 복음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로, 또 오랜 세월 감추어 두셨던 신비의 계시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아 주실 능력이 있는 분이십니다.”(로마 16, 25)

우리는 다만 이 성탄의 무궁한 신비의 힘을 믿고 마리아의 대답을 주님께 드리면 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태어날 아기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께서는 분명 쉬실 집도, 머리 누일 자리도 없으셨습니다. 철저한 비움, 낮추임, 가난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셨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소외되고 박해받는 이들이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구세주인 표징은 불가능해 보이는 기적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소박하고 가난한 모습의 표징이라고 루카 복음사가는 증언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 12)

이 같은 가난과 겸손의 낮추임이 끝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자유와 해방을 이룰 수 있고 그곳에 구원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가난의 위대한 이 아기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풀어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 5)

결국 가난과 낮추임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세상 어떤 지혜와 지식으로도 따를 수 없는 놀라운 경륜가이시고, 세상의 그 어떤 권력과 통치로도 따를 수 없는 용맹한 전지전능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곁에 우리가 친근히 부를 수 있는 보호자인 아빠, 아버지,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놀라운 기쁨의 하느님께서 오늘 작은 아기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이 기쁨을 대림시기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창생이 죽음으로 멸망할세라 자비의 사랑으로 굽어보시어 죄인들 구원의 길 가르치시며 기진한 이 세상을 구원하셨네”

이 같은 영광과 평화의 길을 비천한 인간에게 보여 주셨기에 우리는 오늘 천사의 환호를 함께 외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배광하 신부
  |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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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아룀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 나자렛으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다. 그러고는 이제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찾아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28~31) 라고 하였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이 은총인가?’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이 이야기에 마리아는 그 뜻을 헤아린다. 그러고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라고 당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천사의 아룀’을 은총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는 이 사건을 저주라고 생각하고 그 아룀을 부정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은총과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은총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성모님의 순명과 겸손의 신앙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맹목적인 순명이 아닌 당신의 삶을 통해 이 사건을 순명의 정신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우리 역시 신앙의 삶을 살아가지만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순명과 겸손의 삶을 봉헌하지 못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모님의 예수 잉태에 대하여 “예수를 몸으로보다 정신으로 먼저 잉태하셨다”라고 표현했다. 이 말씀으로 우리 역시 신앙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잉태할 수 있어야 한다. 성탄은 우리가 마음속에 주님께 대한 순명과 겸손을 통한 ‘받아들임’이 있을 때에 다가옴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우리는 탄생하실 예수님을 어디에 모실 것인가?
성모님은 당신의 순명과 겸손으로 아기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이셨는데,
과연 우리 는 어떤 마음과 모습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하고 있는가?

우리가 탄생할 아기 예수님을 신앙의 정신과 삶으로 맞이하지 않는다면 이번 성탄에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신앙의 눈이 없는 사람에게 주님은 보이질 않으며, 십자가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탄생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된 일이며 은총의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했던 은총의 선물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곰곰이 묵상하여야 한다. 이러한 용기를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과 순명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성모님께서 은총을 왜 가득히 받으셨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천사의 아룀’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남은 대림 시기는 내 신앙으로 만든 삶의 자리에 아기 예수님의 쉼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최혁순 신부
  |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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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성탄이 다가오면서 거리와 상점은 화려한 조명과 신나는 음악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탄의 참 기쁨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신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제 마음속에서도 성탄의 기쁨을 그리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신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는데, 우리는 왜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 까닭을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생각해 봅니다.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인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마리아가 응답합니다. “저는 주님의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를 통해 참 기쁨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실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잘 간직하며 살아 갈 때 체험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고, 은총을 잃어버린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것들이 주는 거짓 기쁨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기만 할 뿐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겸손과 순명의 삶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겸손과순명의 삶을 통해서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잃어버린 주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가 잃어버린 성탄의 참 기쁨을, 삶의 참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밤에 기념하는 성탄의 의미를 세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첫째는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기념하고 경축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 마지막 날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며, 셋째는 우리 각자의 마음에 매일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탄의 참 기쁨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그 기쁨을 살아가는 것은 매일 새롭게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 춘천교구 엄기영 안드레아 : 2017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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