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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대범함과 포용력
조회수 | 1,893
작성일 | 06.09.29
태풍 매미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인명 피해와 재산피해로 실의에 빠져 있는 수해민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자연 재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이 이러한 자연 재해를 더 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자연 재해는 크기의 차이는 있으나 매년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예방이 힘들고 매년 인재라는 항의가 끊이지 않는 것은 불가항력이라는 면도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부처 이기주의도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부처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일들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재해방지라는 목적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집단 이기주의가 더 앞섭니다. 감사원에서 지적했듯이 하천관리는 건교부, 농업시설은 농림부, 재해 구호는 복지부에서 맡고 있고 자연재해 대책 위원회는 행정자치부가 관장하는데 각 부처는 행자부의 업무 조정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재해 대책이 총괄 조정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업무 분리는 견제와 전문지식의 활용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통합 조정되지 못하고, 각 부처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재해방지를 뒷전으로 미룬다면 이러한 업무 분리는 비효율성과 예산 낭비만 가져올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인간이 가진 좋은 일에 대한 애착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 가운데는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좋은 일에 대한 욕심, 다시 말씀드리자면 내만이 그 좋은 일을 했으면 하는 독점욕 같은 재미난 심리를 발견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만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독점욕의 표출로 인해 그 일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날 때 입니다.

부처 이기주의 때문에 재해 방재라는 공공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 비근한 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욕에 사로잡힌 대표적인 집단은 종교입니다.

종교는 구원과 사랑 인간의 행복을 가르치는 어쩌면 가장 의미 있고 좋은 일을 하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우리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좋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우고 인간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구원과 진리라는 종교의 본 목적이 좋은 일을 독점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와 이익이라는 현실원칙에 입각한 편협한 집단 이기심에 가려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인간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 보면 요한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이 비교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가로막았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사실 요한의 이러한 태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예수님과 삶을 같이 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장점보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개인의 잇속을 챙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거짓 교설을 전달할 위험성도 있습니다. 아마 요한은 이러한 점이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적어도 예수님만은 우리가 독점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독점 의식을 넘어설 「선의의 마음」이 요한의 본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 여겨 보고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요한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말리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도에 대한 거부로 들립니다. 요한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태도와 부정적 독점의식에 대한 거부 뿐 아니라 어쩌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호해야한다는 선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심도 포기하라는 요구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독점의식 뿐 아니라 충성심과 열정이라는 선의의 독점의식마저 버리고 대범하고 개방된 구원관을 가지라는 요구요, 하느님과 예수님은 누구의 손에 의해 독점될 수 없다는 명백한 가르침입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그 생각과 말과 처신이 예수님과 닮았다면 숨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현대 가톨릭 신학계의 통설을 뒷받침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대범함과 포용력 다양성 이라는 영원한 이상을 속 좁은 우리에게 묵상의 주제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 원주 교구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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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데기는 가라

18년 전 보좌신부 시절 첫번째로 고니꼴이라는 공소를 갔다. 자전거를 타고 토끼 길처럼 나있는 산길을 가는데는, 본당에서 2시간30분이나 걸렸다. 찻길이 없는 곳인데도 공소 건물을 세를 수 있었던 것은 6․25때 헬리콥터로 재료를 날라다 준 미군 군종신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산비탈을 깎아서 밭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고니꼴 사람들은 거의 다 천주교인이었다.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절 하나둘씩 산 속으로 숨어들다 교우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다. 교우들이라야 어린아이까지 합쳐서 40여명,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신부가 오는 날은 동네의 경사가 있는 날처럼 깨끗한 옷들을 꺼내 입고, 함께 먹을 술과 음식을 준비하곤 했다. 교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날, 나는 고해성사를 주고 나서 미사를 시작하려다 말고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본당수녀가 미사짐을 챙겨주었는데 영대(제의 속에 걸치는 것)를 빠뜨렸기 때문이다. 신학교 전례시간 때 배우기를, 영대가 꼭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그것이 없으니 미사를 어떻게 하나! 안하자니 교우들이 실망할 것 길고, 하자니 미사를 불경하게 봉헌하는 꼴이 될 것 같고 하여 망설이다가, 결국 말씀의 전례만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갓 신부가 된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선배 신부께 말씀드리니 “이 사람아, 신부가 미사드리는 것이지 제의가 미사드리나?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미사가 안되나?"하면서 꾸중하였다. 훗날 군종신부 훈련 중, 어떤 신부의 영명축일 날 한밤중에 일어나 훈련받는 신부들끼리 팬티만 걸친 채 미사를 드리면서, 나는 “제의가 미사드리나, 신부가 미사드리지"라고 말한 선배 신부의 말씀이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벌거벗고 미사드리면 ‥‥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면, 법과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는 사람들을 꾸짖는 대목이 나온다. 모세가 선택한 70인 지도자중에서 조직과 형식과 제도를 일탈한 두사람, 즉 엘닷과 메닷이 있었는데, 이 두사람에 대한 제재를 요구하는 여호수아를, 모세는 형식과 제도보다 내용과 은총을 앞세우며 꾸짖는다,

또 요한이 예수께 사도들 중에 속하지 않는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좇아내고 있어서 못하게 막았다고 하자, 예수께서는 조직과 제도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며 형식과 제도에 얽매인 요한을 꾸짖으신다.

천주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지난날의 조직과 형식, 법과 제도 등에 치우쳤던 점을 반성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형식보다는 내용이, 제도와 조직보다는 말씀과 은총이 더 중요함을 천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영대 하나 때문에 미사를 못드렸던 나처럼, 조직과 형식, 벌과 제도의 무거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전하다.

오늘날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벌과 제도인가, 말씀과 은총인가? 교회와 그 조직원들이 제도와 형식의 이름으로 은총과 내용에 제동을 걸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식인종 출신의 아프리카인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아프리카 어느 추장의 아들로서 우수한 성적으로 공부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0년후 백인 동창생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다가

그를 만났다. 영국에서 유학까지 마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추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동족들과는 달리 추장은 양복을 입고 매우 세련된 모습으로 동창생인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시간에 보니 추장은 다른 식인종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여행객은 놀라서 “아니 영국에서 명문대학까지 나온 분이 어떻게 사람 고기를 먹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추장은 한 손을 높이 들어 보이면서 “아, 그래서 나는 이렇게 포크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다른 이들은 손으로 먹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의 차이지요"라고 말했다 한다. 이 추장은 공부를 하였는데 본질은 접하지 못하고 껍질만 보고 왔던 모양이다.

마음이 변하고 내용이 변화되어야 하거늘, 풀로 만든 옷이 양복으로 변하고,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이, 껍데기와 형식만 바꾼 것은 변화라 할 수 없다.

법과 제도에 얽매인 교회

인간을 영육의 존재라 말하고, 우주의 원리에도 음양의 양면성이 있듯, 구원의 원리에도 신과 인간, 은총과 자연, 말씀과 형식, 성령과 제도 등의 양면성이 있다. 이 양면성은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너무 감정적인 것에 흘러 오류를 범하는 것이 개신교라면, 아프리카 추장이 손가락으로 먹던 음식을 포크로 먹듯, 껍데기와 형식만 변화된 것이 천주교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여호수아와 요한처럼 교계제도와 정통신학과 교리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모세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제도와 형식을 넘어선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 되도록, 말씀과 은총과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해야할 것이다.

김영진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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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의 교훈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밀쳐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은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인데 주님의 평소 표현이 아니고 냉혹한 것이어서 당황할 정도입니다. 보잘것없는 이웃을 죄짓게 하면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맷돌은 소나 나귀가 돌리는 큰 연자 맷돌을 말하는 것으로 손 맷돌과는 다릅니다. 팔레스티나 주위에서 중죄인에게 내려지는 가혹한 형벌로 남을 죄짓게 한 잘못도 자신의 죄 못지 않게 크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서 생명을 얻는 것에서 방해되는 자신의 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육체와 밀접하고 중요한 부분인 '손' 과 '발' 그리고 '눈'(마르 9,43-47)이 죄를 짓게 하면 없애 버리라는 강한 표현을 하십니다. 손과 발 그리고 눈 그 자체가 죄를 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지체들을 통한 죄의 동기, 유혹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겸손해야 된다는 말씀(마르 9,33-35)과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겸손하지 못해서 오는 독선을 경계하라는 것과 죄의 유혹과 가능성까지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수도회에서 지낼 때, 온상을 만들어 채소와 고추를 가꾼 적이 있습니다. 온상 바닥 흙에 거름을 주고 작은 씨들을 뿌리고 물을 주며 기다렸습니다. 몇 일 지나고 보니 싹들이 예쁘게 돋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나는데 자세히 보니 잡초들도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잡초를 뽑아 주었는데, 그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간을 일 때문에 온상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모처럼 온상에 들어가 보니 잡초들이 무성해서 어린 채소를 덮는 것이었습니다. 그 잡초를 뽑는데도 애먹고 시간도 많이 걸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때그때 뽑는 것이 얼마나 쉽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죄와 그 유혹을 잡초에 비유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그때는 물리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이 악과 연결되어 자라나면 날수록 거기에서 헤어나기가 점점 힘들고 파멸과 지옥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또한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늘 깨어 기도하며 선을 행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정인준 신부
  |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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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함께 이르는 하느님 나라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보았고, 그가 제자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에 그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요한에게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 첫 마음이 이제는 예수님보다 그분을 따름으로 얻게 되는 자신만의 특권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간절히 염원하고 중요한 것을 얻게 되면, 쉽게 잊고 다른 것을 바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요한에게도 가장 중요한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에게 더 집중하고 그분을 우리의 삶에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금 당신이 생명임을, 하느님나라로 향하는 길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우리가 생명에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길 바라십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신지 죄 짓는 손을 잘라서라도, 절음발이나 외눈박이가 되서라도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께서 정말로 우리가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신다면, 그만큼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님의 바람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뜻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걸어야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마르코 9,41) 우리의 삶에 자리에서 함께 그리스도를 향하는 모든 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 위로할 수 있어야 하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가면 출발이 빠를 수는 있겠지만 함께 가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보다 우리가 함께 생명으로, 하느님 나라로 가길 바라신다는 것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모세는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민수기 11,29)고 말합니다. 우리도 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가 하느님 나라로 가길 간절히 바라면 좋겠습니다.

▦ 원주교구 박동규 마르코 신부 : 2018년 9월 30일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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