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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법보다 크신 하느님의 사랑
조회수 | 1,699
작성일 | 06.09.30
신앙을 보호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선 제도나 법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신앙이 그것에 묶여서는 안됩니다. 그와 같은 모순이 신앙의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보다 넓게 열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깊은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바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에집트를 탈출했을 때는 그 백성의 수가 장정만도 60만 명이었습니다. 아마 딸린 식구를 합치면 백만 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큰 백성을 이끌고 이동한다는 것 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서로 싸우는 시비가 생겨서 각종 소송 사건이 많아지게 됩니다. 모세 혼자서 소송 사건을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장인의 충고에 따라 장로들을 뽑아 그 문제를 분담시키는데 이때 뽑힌 장로가 70명이었고 이들을 성막으로 불러 하느님의 영을 부어 주는데 웬일인지 두 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도 자기 집에서 영을 받아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한쪽에선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나오라는데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앞에 나서서 어떤 벌이나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달래면서 그러지 말고 오히려 그런 형태로라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영이 내리길 바라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축소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내용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사도 요한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또 그들과 어울리는 자도 아니기 때문에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말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오늘 성서의 대목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넓게 열려져 있습니다. 불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 심지어는 무당 할머니들에게까지도 하느님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좀 억설 같지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지옥에 빠졌다 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나 슈바이처 박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해서 그들이 구원을 못 받는다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정상적인 길은 물론 천주교이지만 그러나 우리 교회 밖에서도 구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무 교나 믿으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종교가 최고의 구원의 길이라 판단하여 양심을 바르게 갖고 선을 이웃에게 베풀면서 살았다 했을 때 그를 보고 당신은 세례를 받지 않았으니 구원을 못 받는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이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착하게 살기를 아주 간절하게 요구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고 상을 받지만, 대신에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큰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찍어 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 버리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의 자세를 성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옛날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법에 아주 능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법을 온전하게 지킨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구원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많은 죄를 안겨 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은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아직도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이 보다 넓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모르며 또한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선택된 백성이면서도 원으로의 길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어떤 법이나 제도에 묶여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그렇다고 법이나 제도가 가치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법이나 제도는 분명히 하느님의 은혜를 보다 효과적으로 나누고 보존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성실히 지키고 제도를 존경하되 그러나 먼저는 바른 양심 안에서 착하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믿음의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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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하느님은 악을 통해서도 더 큰 선을 창조하신다.

하루는 한 신자 분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왜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먼저 선악과 나무를 심어놓은 것이고, 애초에 인간을 천사와 같이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왜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죄, 어둠, 악을 허락하셨을까요?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어둠, 악을 통해서도 더 큰 선을 창조하시기 위해 그 것들을 허락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악으로 빠질 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벌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벌은 언제나 부모와 같은 마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아담의 벌은 아비로서 가족을 책임지며 땅을 일구어 먹을 것을 수확하 는 노동입니다. 또한 하와의 벌은 어미로서 자녀를 낳을 때의 고통과 이 고통과 더불어 얻어 지는 자녀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벌은 단순히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그 인간을 미워하고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벌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또 다른 깨달음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모상대로 만드셨던 하느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간을 인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 선택 중에 악을 선택할 때의 마지막 날의 결과를 경고하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손이 없다고 발이 없다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죄악의 시작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 마음을 잘라내는 것이 먼저인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아무리 부족한 죄인이라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습관처럼 이루어지는 죄악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나에게 가장 후회되는 일, 부끄러운 일을 지금 당장 고치도록 합시다. 바로 우리의 이런 결단과 실천이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 광주대교구 김정철 다니엘 신부 : 2018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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