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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조회수 | 2,464
작성일 | 06.10.05
우리는 주변에서 혼인생활에 실패하는 부부들을 많이 본다. 혼인의 실패는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다. 이번 주간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랑은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원초적이고 보편화된 인간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오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며 인간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사랑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이혼”에 대한 법을 단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독서: 창세 2,18-24: “살에서 나온 살”= 하느님 안에 일치-사랑.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23절)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한 실체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 부르리라”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린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24절),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상: 사랑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모세가 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이것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a): “내게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지만...(신명 24,1-4)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 즉 구원계획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즉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을 해주신다.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12절). 즉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마태오 복음(19,13-15)에도 그렇고 마르코 복음(10,13-15)에도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즉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이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실천하는 것에 있어서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어린이들)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제2독서: 히브 2,9-11: 예수는 새 아담이시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강생을 통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모든 인간적 제약과 고통, 그리고 죽음과 악 앞에서조차 무력한 태도를 취하신다. 이것으로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의 불행과 절망을 이해하실 수 있다. 이렇게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로부터 왔으며, 때문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형제들”을 부르기 위해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고, 자신을 희생하셨듯이, 그래서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듯이,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 우리 자녀들이 우리들을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를 결심하며, 주님의 은총과 지혜를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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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롯불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둘이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셨으니, 그분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결혼과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 그 말씀은 광야에 울려퍼지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합법적이고 유효하게 이뤄진 혼인의 끈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결코 풀 수 없다고 가르치는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곧 일부일처여야 하며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함께 살거나 반대로 한 여자가 여러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혼인의 단일성(單一性)’이라는 혼인의 두 가지 특성을 가르칩니다. 신자인 우리는 과연 그 가르침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녀가 서로 합하여 부부가 되면 연애할 때와는 다른 사랑을 하게 됩니다. 연애할 때는 모닥불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마주 앉으면 모닥불의 화려한 불길과 그림자 때문에 마주앉은 사람의 진면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화려한 불꽃같은 사랑을 하지만 계속해서 새 장작을 넣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결국 다 타버린 장작처럼 식어버릴 뿐입니다. 또한 그 새 장작은 서로의 사랑을 불태워줄 매개체처럼 보이나, 실상은 또다시 반복되는 서로의 욕망과 허무함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 일치를 이룬 사랑이야말로 다함이 없는 참사랑입니다. 혼인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랑은 화롯불 사랑입니다. 열렬한 사랑을 불태운 후에 남은 모닥불의 불씨들을 모아 화로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화롯가에 앉으면 배우자의 모습이 가깝게 보입니다. 재로 묻어둔 화롯불이 약하다고 해서 들쑤시지만 않으면 그 불씨는 밤새도록 따뜻한 온기를 전해줍니다.

화롯불을 들쑤시는 행위는 사랑의 일치를 방해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의 마음을 들쑤신다면 그들 사랑의 불씨는 다시 살릴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해질지도 모릅니다.

결혼생활은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결혼으로 한 몸을 이루나 온전한 결합은 결혼생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화롯불에 재를 덮어주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단점을 받아주고 덮어주고 토닥여준다면 사랑의 불씨는 영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협력자를 보내주시고 혼인으로 한 몸을 이루어 우리 모두가 완전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 박현성(레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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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나는 배우자에게 힐링(healing) or 킬링(killing)의 존재인가?

“가정 폭력으로 결혼 생활을 더 이상유지할 수 없는데, 이혼해도 됩니까?”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한데, 이혼해도 됩니까?” “배우자의 외도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격 차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1년 이혼 11만 4,300건, 부부 1,000쌍당 9.4 쌍이 이혼한 현실이 우리 가정의 자화상입니다. 혼인기간 4년 이하 부부의 이혼율(26.9%)이 가장 많고, 혼인 기간 2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사회의 법적·제도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혼인하기 전 혼인의 의미와 부부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준비교육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은 현 시대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혼인과성, 출산에서 약자인 여성! 이혼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사상, 대중 매체의 홍수 속에 사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의 대화를 통해 혼인의 근원적인 차원을 묵상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을 당시 혼인율은 낮았고, 이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존중받지 못했고, 혼인법도 여성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처럼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를 버려도 되는지’를 정당화해 주는 법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독신으로 지내며 책임없는 삶을 즐겼고, 따라서 이혼 문제에서 여성들은 약자였고 피해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인간이 만든 법과 제도, 선택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계획안에서 바라보십니다. “창조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을 이루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살아가지만, 그 구별은 일치를 지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담처럼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한” 고독한 존재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한 여인을 얻고, 기뻐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임을 통해서 한 몸(일치)을 이룹니다. 교회는 혼인을 성사로 축성하였습니다. 혼인은 인간적인 사회제도의 차원으로 국한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를 때 혼인의 아름다움과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지 드러납니다. 부부가 서로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고 존중하는 가운데, 참된 협력자, 서로에게 삶의 힐링(healing)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교부테르 뚤리아누스는 말합니다. “하나의 희망, 하나의 소망, 하나의 신뢰, 하나의 봉사와 섬김으로 뭉친 두 신앙인의 유대는 얼마나 놀랍고 경탄스러운가? 그들은 둘 다 형제이고, 절친한 봉사자이다. 그들 사이에는 정신이나, 육체에서 더 이상 거리가 없다. 그들은 진실로 한 몸 안에 둘이고, 몸이 하나인 곳에 정신도 하나이다.”

수원교구 유주성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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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하느님 작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 대부분은 “그리고 그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맺어집니다. 오랜 역경과 시련을 헤치고 사랑을 쟁취한 한 쌍의 남녀는 이제 더는 슬픈 이별은 없을 거라고 다짐하며 두 손을 꼭 잡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란 걸 동화 속 이야기는 말하지 않습니다. 별로 재미없거든요.

혼인으로 결합한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 놓고 살아보라고 한다면 그 꼴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는 밥이 먹고 싶은데 다른 하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고, 하나는 피곤해 죽겠는데 다른 하나는 놀자고 하고, 하나는 산이 좋은데 다른 하나는 바다가 좋다고 하고, 하나는 덥다고 하는데 다른 하나는 춥다고 하고…. 서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따로 지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한데 묶어놓았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면서 어찌 되었던 합의를 보아야만 하니 그 불편함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오래 함께 산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당연히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러면 불편해서 살수가 없거든요.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서로 합의를 한 사항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취미, 취향, 습관, 하다못해 방귀를 뀌고 코고는 것까지 합의를 하지 않은 사항이 없을 것입니다. 한데 묶어 놓았으니 말이죠. 오죽하면 서로 방귀 트는 사이가 되어야 비로소 부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까요.

둘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나와 다른 너로 인하여 생기는 불편함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그렇게 오래가나요? 점점 사랑하는 배우자에게서 더는 심장의 떨림을 느낄 수 없게 되면 이제부터는 전쟁입니다. 더욱 유리한 고지에서 나에게 필요한 합의를 도출하려고 부부는 온갖 작전을 동원합니다. 필요하다면 싸움도 불사합니다. 그것도 다 작전이거든요. 그래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하나봅니다.

대부분의 부부는 서로 합의하며 불편함을 최소화시켜 나갑니다. 그래서 조금씩 닮아갑니다. 입맛도, 취미도, 성격도, 습관까지도 비슷해집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작전을 짜고 다툼을 벌였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게 다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놓으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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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부부 사랑을 은총의 여정으로

혼인성사 때 부부가 될 이들은, “나 아무개는 당신을 내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고 서약한다. 그러나 이 약속을 지키면서 살기란 쉽지 않다. 사람은 자신의 이기심과 욕심을 상대방에게 자주 강요하게 된다. 처음에는 변치 않을 것 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약해지게 되고, 심하면 그 사랑이 깨지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빛, 하늘, 땅, 달과 해, 별들과 온갖 생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창세 1,26-27 참조). 하느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오시자 아담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 이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하와를 아담에게 데려다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그분께서는 혼인을 통해 부부가신성한 인연을 맺게 해 주시고, 서로를 남편과 아내로 정해주셨다. 여자의 몸과 영혼은 남자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과 같이 여자도 당연히 하느님의 딸이며, 남녀 모두하느님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여자의 가치가 남자보다 낮고, 남자의 쾌락과 소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히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반려이며, 둘은 서로를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혼인성사는 이기적이고 깨지기 쉬운 인간의 사랑에 예수님의 신적인 사랑을 더하여 헌신적이고 견고한 사랑이 되도록 변화를 청하는 데에 있다. 인간 남녀의 사랑이 얼마나 약하고 깨지기 쉬운지는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는 죽음이 그들을 떼어놓지 않는 한 함께 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둘이 한 몸이 된다.’는 의미이다(마르 10,8참조). 하느님의 원래 계획은 남편과 아내가 일생을 함께 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부부 사랑의 결합을 지키고 보존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인성사를 하느님께서 주신 성실하고 항구한 사랑의 선물로 생각하며, 감사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배우자를 얻었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상대방에게 어울리는 배필이 되도록 매일 노력함으로써 행복해진다.”

혼인성사의 은총은 한순간에 실현되기보다는 부부 두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지속된다. 인간의 삶이 좀 더 성숙된 인간으로 성장하는 여정이듯이, 부부의 사랑도 더 성숙한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끊임없는 은총의 여정이다.

끝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사랑의 기쁨』에서 말씀하시는 혼인 성숙의 길을 마음에 새기자. “가정(부부) 안에서는 세 가지 말을 반드시 하여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말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입니다. 가정(부부)에서 우리는 강압적이지 않게 ‘해도 될까요?’라고 청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 가운데 누군가 자기잘못을 깨닫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가정(부부)은 평화와 기쁨을 경험합니다”(133항).

▦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10월 7일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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