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40%
[인천] 대림절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조회수 | 2,138
작성일 | 05.12.17
대림절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림절의 인간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과거와 오실 하느님의 미래 사이에서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그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지평선을 꿈꾸며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이다. 그의 삶을 통해 우리는 대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대림은 구세주가 이미 오셨지만 실은 아직 오고 계시는 중임을 알려준다. 대림은 구세주가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지만 실은 숨어계신 분임을 알려준다. 따라서 대림은 우리가 정착할 만한 자그마한 장소도 없이 끊임없는 여정을 계속해야 하는 순례객임을 알려준다. 대림절의 인간은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참고 기다리면서 저 영원한 빛에로 끊임없이 걸어 나아가는 사람이다.

대림절의 인간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는 그런 인간의 전형적인 예를 복음에서 본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마리아가 고백한 이 말씀은 “~이라면”이나 “그러나”라는 제한이나 조건 없는 전적인 순명을 표현해 준다. 그녀의 순명 때문에 하느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마리아에게 오실 수 있었다.

만일 마리아가 “예” 대신에 “아니오”라고 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순전히 이론적인 물음이지만 실제로 가능한 물음이다. 이는 마치 첫 번째 인간이 죄를 짓지 않고 계속 낙원에 머물렀으면 어쩔 뻔 했나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결단해야만 하는 전적인 가능성이다. 우리는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다릴 수도 있고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야만 하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처지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교회가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공허하고 위로받지 못하는 찢겨진 단편적 시간들이 아니다. 우리의 현재 안에 영원한 하느님의 미래가 도래하여 구원이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 교회의 복음 선포 핵심이다. 이 엄청난 복음의 내용 때문에 대림절의 인간은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신앙 안에서 ‘행동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신앙 자체가 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관건은 어떻게 그런 신앙을 우리의 삶에서 드러내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기심, 분노, 미움 등 죄로 얼룩진 단편적 현재에서 하느님의 영원에로 향한 힘든 회개를 시작할 때, 우리가 만일 이웃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려고 노력할 때, 우리가 만일 남을 용서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 우리가 만일 불안과 회의에서 용기를 갖고 마리아의 “예” 대답을 끊임없이 따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어둠에서 빛을 보는 대림절의 사람인 것이다.

김승욱 신부
451 40%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바른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누구일까? 그분은 주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성모님의 삶을 조금만 본받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완벽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신약성경에는 성모님의 삶의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많이 전해 주고 있지 않지만 성경의 횡간을 들여다보면서 나름대로 유추할 수 있으리라.

우선 성모님은 매우 긍정적이시고 활기 넘치는 삶을 사셨을 것이다. 아울러 자신감이 넘치고 차분하시면서도 생기 넘치는 삶을 사셨을 듯하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늘 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분의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느끼시면서 사셨기에 매사에 자신 있게 행동하셨을 듯하다. 그리고 성모님은 인내심을 갖고 행복감에 젖어 사셨을 것이다. 물론 그분께서도 인간적 고뇌와 아픔 등으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번민하시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보다 더 큰 주 하느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계심을 믿고 계셨기에 고통 가운데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셨으리라.

사랑받는 이는 행복하다. 행복한 이는 기쁘게 산다. 기쁨은 행복에서 베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출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내적으로는 평화와 편안함을 느끼고 외적으로는 얼굴이 밝아지고 기쁨의 윤기가 저절로 흐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평온함과 기쁨 안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은 빛이 난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에 의하면 천사는 성모님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첫 인사말을 하였다. 천사의 이 인사말은 바로 성모님의 삶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주님의 은총과 기쁨, 그리고 주님의 현존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좌절과 절망, 그리고 혼돈의 상태로 점점 빠져 들어가는 듯하다. 보다 나은 삶이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지 불과 한해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실망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들의 과도한 탐욕의 바벨탑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는 우리를 더 우울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듯이 힘들고 어렵다고 한숨과 푸념 속에서 세상 탓만 하는 것은 결코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이 아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이요 아픔인 죽음의 암벽을 깨고 부활하여 우리의 희망이 되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분의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은 우리 삶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본받아 희망과 활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 37)

우리가 겪는 고통보다 주님의 은총이 크고, 능력이 크시기에 이 모든 것을 극복할 힘과 지혜도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이 같은 믿음을 갖고 힘들어 하는 내 이웃들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따스한 미소와 격려의 말 한마디를 나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성모님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준, 천사와 같은 사명이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에게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자! 용기 내어 우리의 희망이신 주님을 맞으러 나가자! 그분만이 유일한 우리의 희망이시다. 지금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오고 계신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성모님이 지니신 마음으로 희망을 갖고 기쁜 맘으로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자.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해결 해 주시리라.

이학노 요셉 몬시뇰
  | 12.20
451 40%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본당신부를 하다 보면 참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데 본당의 여러 군데를 살피다 보면 이것저것 손이 가지 않는 곳이 없기에 일도 많이 배우게 됩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연장도 알아야 하기에 여러 가지 도구에 대해서 쓰임새와 방법도 알게 됩니다. 지금 저희 본당에서 가장 효자 역할을 하는 연장은 다름 아닌 압축기라는 도구입니다. 공기를 모아 압축한 힘으로 다양한 연장과 연결하여 사용할 수 있기에 참 편리하고 일의 능률도 높아집니다.

도구를 어떻게 잘 사용하느냐에 따라 일의 결과가 더 좋게 나올 수 있지만 우선 도구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칼은 날카로워야 하는 것처럼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도구의 성능이 좋아야 한다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도구로서 하느님의 일이 더 잘 실현되도록 그 쓰임새에 맞는 마음과 행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마음과 행동을 성모님의 모범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은 성모님의 믿음과 겸손함을, 행동은 성모님의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인 구원계획을 실현하는 첫 번째 역사인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성모님은 하느님의 도구로서 믿음과 겸손함이라는 마음과 순종이라는 행동을 통해서 실천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에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굳은 믿음으로 대답하시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지극한 겸손을 보이십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천사가 전해주는 주님의 말씀이기에 순종으로 그 말씀을 따르십니다.

하느님의 도구로서 우리는 일의 종류에 따라 압축기에 연결되는 연장과 같이 각자 쓰임새에 맞게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갈고 닦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여야 하겠지만, 달란트 이전에 연결되는 연장에 힘을 주는 압축기와 같은 덕목으로서 성모님께서 직접 몸소 보여주신 믿음과 겸손 그리고 순종이라는 기본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하느님의 일인 구원사업에 도움이 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을 맞으며 우리는 이제 대림 시기의 마지막 한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맞아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도구로서 충실히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하느님 구원역사의 첫 번째 도구이셨던 성모님의 모범인 믿음, 겸손, 순종의 덕을 쌓는 한주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

홍성훈 시몬 신부
  | 12.15
451 40%
어떤 책에서 보니까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른 코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걱정에 대해서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다고 하네요. 즉, 남자는 걱정에 대해서 스스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걱정에 대해서 누군가가 해결해주었으면 마음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걱정에 대해서 어떤 사람에게 말할 때, 남자는 단지 상대방이 들어주기만 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이고, 여자는 상대방이 해결책을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차이 때문에 부부간에 싸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선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걱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해결해주려고 노력을 하면 어떻게 할까요? 분명히 자신을 간섭한다고 짜증을 낼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는 남편에게 해결책을 원하면서 자신의 걱정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냥 들어만 줄 뿐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아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화를 낼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남녀 간의 관계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지요. 이 세상 곳곳에서 서로간의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아무리 쌍둥이라 할지라도 차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지요. 이렇게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큰 선(善)을 위해서 활동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를 위한 선(善)을 위해서만 활동하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즉, 나만을 위한 하느님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여기서 이런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서, “싫어요.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되지요? 나 말고도 할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저는 아직 어리고, 또 결혼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일도 너무나 많다고요. 따라서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라고 말했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우리들은 얼마 뒤에 맞을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앞서 제가 상상했던 성모님의 말이 바로 우리들이 평소에 자주 쓰고 있는 각종 핑계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즉,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내가 하느님께 맞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못된 죄를 지어도 곧바로 벌을 주시지는 않지요. 또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과연 우리들의 노력은 어떠한가요? 이제는 하느님께 맞추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조명연 신부
  | 12.17
451 40%
기다림…….

대림 4주입니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은 끝나가고 성탄을 준비합니다. 대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 기다림의 기간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기다릴 수 있습니다. 희망은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기에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희망이 있기에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약속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하느님의 약속을 이야기하고 그 약속의 완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약속의 완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탄생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희망의 시작이 되고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에게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기억과 희망입니다. 성모님께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고백을 하십니다. 약속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면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기다리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기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기다림의 끝에 있는 기쁨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면 희망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하느님의 약속을. 그래야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약속을, 우리의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1993년 10월 10일, 1994년 10월 21일, 1995년 6월 29일, 1999년 6월 30일, 2003년 2월 18일, 2014년 4월 16일을…….대한민국의 희망이 사라졌던 날들을 기억하시나요? 기억을 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약속을 할 수 없고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과거, 우리들의 약속을 지금 얼마나 기억을 하고 있습니까? 많은 우리의 이웃과 친구들 그리고 아이들을 보내면서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반복되는 슬픈 현실들이 우리가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기억 해야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그 기다림의 끝에 기쁨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기억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1993년 10월 10일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06월 29일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06월 30일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사고
2003년 02월 18일 대구지하철 참사 21명 실종
2014년 0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9명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양승진, 고창석,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인천교구 이홍일 토마스 신부>
  | 12.19
451 40%
사막의 교부 안토니우스는 하느님 심판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님,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 죽고 어떤 사람들은 고령으로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가난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유합니까? 어째서 악인들이 부유하고 의인들은 가난합니까?”

그에게 다름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스, 너 자신에게 집중하라. 이 심판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니 그것을 안다고 너에게 좋을 것은 없다.”

우리는 내 자신에게 집중하기 보다는 다른 외적인 것에 집중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불만을 품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자신이 행해야 할 것들, 특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역이 아닌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한 분을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어머니이며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받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대단하고 하느님을 찬양할 만한 일이지만, 당사자인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어떠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주님 잉태 소식을 듣는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만약 이 말을 듣게 되면 이렇게 말씀을 드릴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님, 물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하지만, 저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독신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신부(神父)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이를 가져보십시오. 해외토픽 감입니다.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아기를 가져서는 안 될 이유들을 세상의 논리를 내세워서 펼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면 이러한 일이 과연 불가능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하시고자 하시면 분명히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입장에서 그리고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단정을 내리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천사의 말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믿음은 오늘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 임금에게 하신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겠다.”(2사무 7,12)가 실현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 강생하시는 큰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게 하였지요(로마 16,26 참조).

하느님의 영역을 전혀 침범하지 않는 그 믿음이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살아야 함을 분명히 전해줍니다. 즉,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대신 내 자신의 영역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리고 이 삶은 주님의 뜻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네 개의 대림초가 모두 환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드디어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강생하신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매년 똑같이 반복적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라면서 하루 즐기고 쉬는 날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믿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할 때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가장 기쁘게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에 대해 성녀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느님 사랑, 돌아가신 하느님이 아닌 살아 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7년 12월 24일
  | 12.24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691   [수도회] 놀라운 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일  [5] 2275
690   [대전] 마리아의 대화  [1] 2261
689   [전주] 예수님의 탄생 예고  [2] 1993
  [인천] 대림절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5] 2138
687   [의정부]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3] 2162
686   [수원] 마리아 :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6] 1906
685   [서울] 은총을 받은 마리아  [6] 2150
684   [춘천] 하느님이 우선  [4] 2066
683   [대구] 말씀을 잉태한 사람들  [3] 1970
682   [부산] 하느님과 함께라면  [4] 1880
681   [마산] 인간의 협조를 통해 인간 역사에 동참하시는 주님  [6] 2134
680   [안동] 행복한 기다림  [4] 2255
679   [군종] 순명,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1] 137
678   [원주] 가장 아름다운 삶  [1] 98
677   [청주] 대림은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1] 91
676   [광주] 이 정도면 괜찮겠지?  [1] 105
675   (자) 대림 제4주일 독서와 복음  [3] 1873
674   [수도회] 조연으로서의 겸손함  [1] 1834
673   [전주] 주님을 맞이하는 삶  [3] 2173
672   [인천]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3] 2013
671   [청주] 화해와 용서  1431
670   [부산] 세례자 요한에 대해  [3] 2095
669   [서울] 요한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회개를....  [4] 2158
668   [수원]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차원 : 기쁨  [4] 2392
667   [춘천] 지금 당신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  [1] 1521
666   [안동] 하느님의 대안  [3] 2084
665   [마산] 사랑의 순수한 초대에 동의하는 삶  [4] 1999
664   [대구] 예수님의 손  [3] 2142
663   [원주] 주님을 찾는 사람들  [1] 112
662   [군종]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83
661   [광주] '항상 기뻐하십시오'  [1] 104
660   [대전] 물질적인 자선보다 정신적인 자선을  [1] 99
659   [의정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3] 113
658   (자)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독서와 복음  [3] 1885
657   [청주] 겸손한 마음  28
656   [전주] 세례자 요한의 선포  [4] 2107
655   [수도회]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  [6] 1991
654   [서울] 예수님의 신원이 갖는 신비  [4] 2138
653   [수원] 우리 일생이 대림시기  [5] 2120
652   [인천] 회개의 삶, 나눔의 삶  [3] 1893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