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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조회수 | 2,193
작성일 | 06.10.05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또한 그 도움을 받음으로써 현재의 부족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족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합니다. 이것은 존재와 역사를 연결하는 고리이고, 더 나아가 공동체의 길이고, 역사 속에 반드시 나타나야 될 그 본질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부족한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협력자를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기와 가장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을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고 하느님의 생각대로 인간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협력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법을 바꾸시기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에 모세가 이혼장을 써서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 뜻대로 결혼의 본 뜻, 공동체의 본 뜻을 일러주시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분명히 들어보면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이 말씀은 인간에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에 대하여 엄격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게 알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알아듣기 힘든 것은 남녀 문제, 결혼 문제, 예수님을 시험한 이야기 뒤에 어린아이 이야기를 덧붙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뒷부분을 떼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 매일 미사 책에도 짧은 독서를 할 경우에는 그 부분은 생략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를 헤아린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마르 10,11-12)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교회에서는 결혼의 불가해소성(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고, 바로 여기 등장하는 이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를 넣음으로써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가 하나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덧붙이신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도움 없이, 하느님의 은혜 없이 사람은 살 수가 없다는 원칙을 일부일처제, 불가해소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살펴본다면 유럽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생각, 하느님의 뜻, 이것이 우선하는 것이다. 그것이 없을 경우에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우리가 결혼했을 때 하느님의 은혜로 부정적인 의미의 간음과 같은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신앙 때문이라면 결혼했던 사람이 갈라질 수 있을 것이고 신앙 때문이라면 갈라진 사람도 다시 결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오로 특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우선하고 그 다음에 남녀의 문제가 나오면 모세와 같이 단죄를 받지 않고도 이혼을 허락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우선하는 이런 자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린이와 같이 모든 것을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어린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원천이 하느님의 뜻에 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뜻을 우리는 제1독서에서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들어 놓으시고 보시기에 저렇게 혼자 있는 게 좋은가 나쁜가를 생각하시다가 오늘 말씀에서“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당장에 결혼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사람이 혼자 있으면 하느님의 뜻을 받들기에 무엇이 좋지 않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서 모든 것을 좋게 보셨습니다(창세 1,31). 그런데 아담에 대해서는 좋게 보시면서도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좋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창조물이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제대로 하는 기능을 가질 때 좋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제대로 못할 때에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담이 혼자 있으면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 같이 있어서 이룩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창조의 일을 계속하는 겁니다. 창조의 일, 그러면 즉시 여러분 생각은 남녀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 창조이지 뭐가 창조인가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먼저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낙원을 가꾸고, 보존하는 일을 위탁하셨습니다(창세 2,15). 그러고 나서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조 때 부여해 주신 하느님의 축복을 통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인간이 해야 할 기본 일이고, 이것이 혼자서는 안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을 도울 사람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셔서 여성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처음에 목적하신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느님 앞에 평등한 존재로 동등한 창조의 사업을 이어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남녀 평등의식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이 결혼 생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여성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함으로써 인간 전체에 대한 이해를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1독서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고 인간과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관계를 창조의 각도에서 생각하도록 돕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창조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아담이 잠든 사이에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어 협조자를 정해 주셨습니다. 아담이 잠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성이 아담의 뼈에서 나왔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아담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출가외인이라고 할 때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남자와 산다고 하지만 성경에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창세 2,24)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남녀가 같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어가는 의무를 동등하게 부여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하였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아담이 각 피조물의 이름을 불렀을 때와는 달리 여자에 대해서는 자기의 이름과 동등한 이름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남녀가 동등하다는 것뿐 아니라 남성이 여성을 이해할 때 동반자이며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인이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다른 인간에 대해서 아담은 바로 자기와 동등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담과 같은 위치, 같은 지위에 있고,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최초의 남성이 자기와 다른 인간을 처음 만날 때 생각한 것은 “나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이구나.”, 달리 말하면 “나하고 공동체를 이룰 수 있구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을 부름으로써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실 때에도 “이 사람은 너하고 같이 창조를 이어갈 사람이다.”라는 의미를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대에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제일 먼저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볼 때, 어머니가 어린 자녀를 볼 때, 스승이 제자를 볼 때, 정치 지도자가 국민을 볼 때 제일 먼저 인식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을 이룰 수 있는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합니까? 또 인간이 처음 만났을 때는 무엇을 먼저 생각합니까? 흔히는 아름답다, 능력이 있다, 집안이 좋다, 하는 식으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데 첫 남성인 아담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해서 제일 먼저 표현한 것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3)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 대해 모두 아시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신 면이 있습니다. 그것의 하나가 오늘 제2독서에 나온 대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히브 2,9).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바로 당신의 동반자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으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고 인간을 하느님같이 만들 수 없으니까 당신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고통까지도 당해 가시면서 같이 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히브 2,11).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이 은총의 소치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통해서 이룩하신 그 일을 완성하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동등한 위치에서 동반자로 인식한다면 그 사람과 같이 되는 것, 곧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낳는 것이 창조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과 같이 되고 싶어 하시는 그 속에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와 같이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점이 창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 창조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평등의식이나 동반의식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나 생명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단군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권력을 쥔 사람들이 국민을 동등한 자격으로 대한 경우가 드뭅니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을지문덕 장군, 박혁거세, 단군? 누가 정말 국민들과 동등한 자격이 되지 못해 애쓴 사람으로 그것이 곧 창조로, 그것이 곧 하느님께 대한 태도로 여기며 살았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창조 사업이 이어지는 일이 없다고 봐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그저 본능적인 생명을 생산하는 것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완성한다는 자세로 인간을 동반자로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나약함이나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새롭게 드러낸다는 것은 달리 말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부족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이 세상에 온갖 불안과 고통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득을 보려고 애쓰고, 피해를 본 사람은 다시 그것을 회복하려고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대전에 이 동반자 의식이 가장 결여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가정에서는 독재적인 가장이라고 할 수 있고, 교회에서는 교황, 주교, 신부라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께 대한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면서 교우들을 동반자라든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도하고 끌고 가야 하는 양 같은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요즘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톨릭도 입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교회가 매력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가면 매일 돈 내라는 소리나 하고, 뭐 해라, 뭐는 하지 마라는 소리나 들으니 오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제가 비신자라도 “저 목회하는 사람들은 직업을 잘 선택해서 편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가지 않겠습니다. 교회를 책임지고 계시는 분들이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느님 대전에서만 볼 수 있는 동반자 의식, 동등 의식을 갖게 되지 않으면 교회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이나 부부간이 동반자나 동등하다고 인식한다면 상대편에 대해 그 어린아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귀담아 듣는 겸손한 마음의 준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을 통해서 새로운 생각이 우리에게 떠오르고,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리 예쁜 미인을 보거나 아무리 큰 사건을 보더라도 하느님을 보는 것만큼 큰 행복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러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고 우리 인간이 자기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았는지 반성하고 한 달 동안 성모님께서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구원 사업에 있어서, 창조에 있어서, 하느님의 부탁하신 그 생명을 이어가는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인간을 동반자로, 같은 자격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때 우리 옆에 계신 분은, 남편 혹은 아내, 아이들 혹은 친척들, 본당의 신자와 이웃 사람들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김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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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참다운 기초

“나는 당신을 내 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것은 혼배예식 때, 하느님과 교회 앞에서 고백하는 합의입니다. 그리곤 사제가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 혼인의 거룩한 계약을 맺으면,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둘이 아니라 한 몸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한살(一身)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육적으로만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결합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이혼 허용 여부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신명기 24, 1-4에 따라 남편이 이혼장을 규정대로 써주면 이혼이 가능하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관습에 제동을 거십니다. 우선, 혼인에 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며, 혼인은 그 신성한 합의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혼인에 대한 가르침은 부부는 ‘더 이상 둘이 아니고 한 몸이다(마르 10, 8).’ 는 것입니다. 사랑의 숭고함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후반부에 어린이 이야기를 두는 것은, 혼인의 결실인 어린이를 통해 우리도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즉 어린이는 누군가에게 기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부부도 서로의 약함을 핑계삼아 떨어지려 하지말고, 각자의 약함을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야만 하는 하나인 존재로서,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기대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부부의 하나 됨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이듯 일치의 표상인 부부의 숭고한 사랑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가정 생활의 평화로움이 교회의 참다운 기초로 자리 매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부터 예수님의 말씀은 실천되어져 나가야 합니다. 친절한 작은 말 한마디나 미소 한 번으로도 충분히 그 사랑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문득, 내 자신이 무기력해지고 짜증이 많아지고, 가족의 구성원들이나 사람들이 멀게만 느껴진다면, 내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감사할 거리를 찾아서 자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작은 실천에서부터 이루어집니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존중해주며, 배려할 수 있는 마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 강병규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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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결혼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와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약성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언행에서 하느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아듣습니다. 오늘 두 개의 이야기가 모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늘의 첫째 이야기는 모세가 허락한 대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모세가 남성들에게 준 특권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에 그 사실을 감안해 모세가 그 법을 제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법을 남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이 남성들의 학대에서 여성들을 구출하는 수단으로 모세가 제정한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학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성을 학대하는 문화권은 아직 있습니다. 유엔이 발간한 세계 인권 현황을 보면, 세계 곳곳에서, 특히 중동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많은 여성이 여러 가지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에게 네 명까지의 아내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나 남편의 뜻을 거역한 여성은 잔인한 체벌을 감수해야 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가 거론하는 것은 신명기(24,1)가 전하는 법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눈 밖에 나면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법입니다.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회이고 시대였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그 여성은 학대당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여성을 남편의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해, 아내를 집에서 내어보내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남성들은 그 법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해석하였지만, 실제로 그 법은 그 시대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살리는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게 하여 약자인 여성을 구해내는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두 사람 사이에 살려내어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이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갈비뼈는 심장을 보호하고 심장의 고동이 들리는 뼈입니다. 부부는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면서 상대를 보호하고 위해주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또한 여성은 남성을 ‘거들어 줄 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들어 준다.’ 혹은 ‘돕는다.’는 말은 보조적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느님도 인간을 거들어 주고 도와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거들고 도와서 상대를 살리는 노력을 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은 서로의 존재를 은혜롭게 생각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짝지어주셨기에’ 하느님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계시게 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짝지어주고, 함께 있어 행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완고하여 미워하고, 서로 갈라집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이를 데려와 예수님이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을 청하였고, 제자들은 그들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언짢아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받아 안고 축복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린이와 같이 겸손하라는 교훈으로 알아듣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어린이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작고 약합니다. 어린이는 자신감을 갖지 않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베풀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삽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녀가 부부로 가정을 이루고 살 때,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듣고, 상대를 거들어 주어 살리고 용서하면,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린이와 같이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고, 짓밟아서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함께 있는 배우자를 은혜로운 존재로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결혼의 불가해소(不可解消)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만든 법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헤어질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부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재혼하면, 신앙생활에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 정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 마음이 완고한 것을 감안한 모세는 법을 만들어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구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서로에게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불가해소법’은 부부가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만 충실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라지면, 완고하고 모진 인간의 마음만 남습니다. 혼배 조당 법도 이 모진 인간 마음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결혼했거나, 이혼했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이거나 모두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분,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 자비하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상처를 받고 이혼한 사람, 그리고 새로운 배우자를 맞아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에게도 자비하신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교회는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 안에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살아있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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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에 적혀있는‘주님의 기도’ 한 대목을 잠시 소개해 봅니다.“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것이지만, 나의 기도는, 내 뜻을 이루어주길 원하는 기도가 대부분이고, 하느님을 윽박지르는 것 같은 기도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안타깝게도 나의 기대와 염원이 실현되어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의 종이라 하면서도, 그분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나의 기도 이면에, ‘두려움’이나‘불안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나의 기대와 염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나 불안함 말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처럼, 온전히 순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낯설게 느껴지고,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싶은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나도 불안함이나 두려움 대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순명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 말씀은 그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불안함, 두려움을 이기고 순명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행위를 했건, 너는 나의 아들딸이며, 너의 숨결 한순간 조차에도 내가 함께 있다는 불변의 약속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든 안 믿든,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는 그 사실이, 다시금 우리를 용기 내어 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 모두를 성모님과 마찬가지로‘가장 사랑하는 이’로 받아들여 주십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순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주님의 종이오니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는 고백과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 앞에, 우리도“예.”라고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순명과 응답이 부족할 때, 우리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을 비추는 희망과 위로의 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부산교구 김두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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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묵주 한 알

요즘은 그리 흔치 않은 돌탑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어릴 적 마을 초입 혹은 산자락에 숙연히 서 있던 돌탑, 그 쌓이고 쌍인 작은 돌들에서 움트는 신비로움이 그립기도 합니다. 돌 하나에 마음을 담고, 손끝에 작은 염원을 모아 그렇게 돌탑은 쌓여 갑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쌓여서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이어진 뭇사람들의 삶을 보듬고 또 거기에 적셔진 눈물을 하늘을 항해 두 손 모으던 바로 그곳. 그래서 우리의 저 돌담은 단순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거룩한 기도의 합송이자, 숭고한 성가의 향연입니다.

우리 부산교구의 수호자,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인 오늘, 묵주기도(로사리오)그 한 알 한 알에서 정성으로 쌓여간 돌탑 위의 고운 손길들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묵주기도의 유래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집트 사막의 은수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시편 150편을 외웠는데, 작은 돌멩이나 곡식 낟알을 머리에 쓰는 관처럼 동글게 엮어 하나씩 굴리며 기도의 횟수를 세었다고 합니다. 이때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시편대신' 주님의 기도'를 150번 바치기도 했고, 수를 셀 때 불편하였기에 열매나 구슬 150개를 노끈이나 가는 줄에 꿰어 사용하였답니다. 이런 관습들이 묵주기도를 탄생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마치 돌 하나에 신비를 담아 돌탑을 쌓듯, 오랫동안 신앙의 삶을 엮어서 로사리오를 바쳐왔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의 시구를 빌어 표현하자면, 묵주 한 알에 우리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과, 묵주 한 알에 우리교회의 심장에서 불타오르는 사랑과, 묵주 한 알에 우리 교구민들의 눈물과 고마움, 묵주 한 알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담아, 우리는 복되신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며 정성스레 묵주 한 알 한 알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묵주기도는 우리 신앙의 삶 구비 구비에 담겨진 그 신비 속에 함께 하는 것이며, 오늘 하루를 교회의 삶으로 다시금 엮어가는 신앙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삶의 굴곡진 굽이굽이마다 쌓아올리던 그 한 알 한 알은, 이윽고 무덤 위의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 내가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머무시는 그 부활의 돌무덤 되어, 자랑처럼 하늘나라의 푸른 이끼로 무성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천경훈 신부 : 2018년 10월 7일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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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세상에서 가장 오래도록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사람들의 입쌀에 시달리는 인물을 떠올려 보면 단연 ‘하와’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위 무신론자들마저도 삶이 무겁고 곤고할 때엔 으레 선악과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담과 하와의 죄를 탓하는 것을 쉬이 볼 수 있으니까요.

때문일까요? 흔히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가 맨 날 지지고 볶으며 서로 미움과 애증에 얽혀 살았으리라 짐작하는 분이 많으십니다. 아담이 그 사건을 두고두고 곱씹어 기억하며 내도록 하와를 원망했을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아마도 선악과를 먹은 후, 아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아담의 못난 모습 탓이라 싶은데요. 그런 만큼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원망하며 갈등했으리라 어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원수처럼 지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치욕의 사건을 잊었을 리 만무한데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허접하고 치사하며 구차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 작은 거짓으로 인해서 낙원에서 추방당한 결과를 낳았으니 그 회한의 깊이가 엄청났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굳어져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로써 마감되는 ‘말세’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가 애증의 삶을 살았을 것이란 추측은 우리네의 비좁은 속내일 뿐임이 분명해집니다.

이 사실을 오늘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야말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여 살아냈던 ‘지혜’의 소유자라 느낍니다. 아담과 하와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진리에 밝았기에 서로의 허물을 탓하며 악다구니를 쓰지 않고 서로를 보듬으며 ‘홀로’ 지내지 않았을 것이라 싶습니다.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던” 주님께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니다. 콕 집어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는 하느님의 고백이 무엇일지 따져보게 됩니다.

웬젤 피터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일부.
오늘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 것이 결단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은 하느님의 뜻에서 한참 모자란다고 딱 잘라 선포하십니다. 이게 웬일일까요? 어떻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접고 인간의 뜻을 따르셨다는 것일까요? 묘한 일입니다.

성경은 완고한 인간들의 횡포에서 약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한 율법이 만들어졌다고 밝히는데요.(신명 24장 참조) 완고함은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으로부터 당신 백성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안전장치를 내려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불어 넣어주신 특별하고 특별한 피조물은 하느님의 뜻을 끝내 몰라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창세 6,5) 슬퍼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창세 8,21)이라시며 너무너무 속상해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예레 17,9)라고 한탄하시고 타락한 인류로 인해서 속을 끓이셨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속성이 이토록 하느님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주님의 설명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날 하느님께서 모세의 청을 들어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간청하고 애걸했던 모세의 ‘이웃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엄청난 하느님의 선언을 마다하고 오히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을 진노케 했던 동족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며 사생결단을 하고 탄원했던 모세의 동족 사랑이 주님을 감동시킨 결과였음을 감지하게 됩니다.(탈출 32장 참조) 이처럼 누군가를 위한 중재기도야말로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며 ‘홀로’ 지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곧 ‘홀로’ 지내는 일이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 곧 ‘홀로’ 살아가는 것임을 새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포용하며 백 번 천 번 물러서십니다. 더해서 완고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십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오직 우리를 위해서 봉헌 받으십니다.

때문에 하느님께 그리스도인은 당신의 온 것을 바쳐 얻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홀로’ 지내려는 습성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조항은 모두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즉 금지사항으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일러줍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고 이르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죄를 면피할 뿐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은 것에 만족하는 율법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에 동참해야 하는 존재임을 밝히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선하게 보이며 도덕적인 인간일지라도 꼭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고귀한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추한 삶을 고귀하게 바꾸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더 큰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곡히 기도드리며 우리의 죄와 허물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매달려 애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주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말씀을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세조차 누리지 못한 특은을 입은 은총의 복음인임에도 그러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마태 11,11)이라고 높여주신 그리스도인들이 도대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떤 것을 실천했느냐’에 주목하십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야고 4,17) 된다는 사실까지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좋은 낙원을 사모했기에 그분과 함께 지낸 기쁨을 잃지 않고 사랑하며 살았던 아담과 하와처럼 ‘홀로’ 지내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맹렬하게 기도함으로 예수님 어깨에 얹힌 죄 짐의 무게를 덜어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자녀의 자긍심을 지니고 주님의 협력자가 되어 세상의 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삶으로 도약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가톨릭 신문 2018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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