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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조회수 | 2,389
작성일 | 06.10.08
오늘 소중한 이 시간을 시작하면서 김춘수 시인의 “나비”라는 시(詩)로 문을 열어볼까 합니다.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나비가 앉으면 순간에 어떤 우울한 꽃도 환해지고 다채로와진다. 변화를 일으킨다. 나비는 복음의 천사다. 일곱 번 그을어도 그을리지 않는 순금의 날개를 가졌다. 나비는 가장 가비야운 꽃잎보다도 가비야우면서 영원한 침묵의 그 공간을 한가로이 날아 간다. 나비는 신선하다.』

지난 여름에 우연히 알게 된 후부터 오늘까지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하는 시(詩)입니다. 보다 강하고, 보다 화려하고, 보다 분주하고, 보다 눈에 띄어야 스타가 되는 세상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 보다 부드럽고, 보다 소박하고, 보다 조용하고, 보다 겸손한 이가 만들어가는 세상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기에 이 시를 좋아합니다.

꽃은 아름답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하느님도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인간의 마음도 흔들어놓습니다. 마치 청혼을 하는 어떤 남자가 꽃 앞에서 일생을 건 도박을 하기도하고, 어떤 여인은 그 꽃으로 인해 그 도박에 인생을 거는 것처럼 꽃은 참 대단한 힘을 지닌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는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꽃의 화려함 속에는 보이지 않는 힘, 수많은 이웃들의 수고와 땀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의 탄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신성하리만큼 조심스런 손길이 필요한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꽃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나비의 수고로움은 없습니다. 부자의 화려한 옷은 있지만 그 옷을 꿰매던 투박한 여인의 굳은 손의 아픔은 없습니다. 마치 한 예술가의 고뇌와 시련은 뒤로한 채 예술가의 작품을 경매하는 부자들의 화려한 모임과 같은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세상은 승자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스타만이 화려한 조명을 받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재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알맞은 협력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정성껏 창조하신 이 세상을 아름답게 “일구고 돌보는 일”(창세 2, 15)과 그 일의 “협력자”로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꽃’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 나라의 꽃”을 피우기 위해 살아가는 “나비”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랑이신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는 신부인 교회 구성원 모두-성직자, 수도자, 신자-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오케스트라입니다. 그 어느 누구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높고,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으로 세상에 희망과 사랑을 꽃 피우기 위한, 각자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천교구 김성훈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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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이혼을 참 많이 하는 세상입니다. 산출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이혼율 자체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에서 알아줍니다. 이혼을 종목으로 한 올림픽이 있다면 대한민국은 꾸준히 메달권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을 보일 것입니다. 복음 말씀에 빗대어 이야기 해보면 완고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입니다.

이혼하는 이유로는 첫 번째가 성격차이, 두 번째가 경제적 문제, 세 번째가 외도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네가 이런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라는 배신감과 서로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는 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내가 ‘모르는 너’, ‘몰랐던 너’에 대해서는 완고하게 부정합니다. 그리고 결국 ‘알지 못하는 너’ 때문에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혼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때까지는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서로에 대해 다 알고 나서 결혼하려면 적어도 60년 정도는 연애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혼 적령기는 환갑 이후 쯤이 될 것입니다.

“나, ○○○은 당신을 남편(아내)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혼인 성사 때, 부부가 서로에게 바치는 혼인 서약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신의를 지키고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모두 ‘약속은 지켜야 한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부터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지 않는다면 상대방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나부터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게다가 하느님 앞에서 나눈 약속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호칭 중에 “배우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부부의 한쪽에서 본 다른 쪽, 즉 남편 쪽에서는 아내를, 아내 쪽에서는 남편을 이르는 말입니다. 혼인 서약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은 바로 이 호칭, 배우자에 담겨있습니다. 부부는 ‘배우자!’의 자세로 살아야합니다. ‘가르치자!’의 자세가 될 때 분란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가르치자!’로 살면 서로에게 나의 생각과 주장을 강요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내 말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너’는 계속 알지 못하는 너, 이해할 수 없는 너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배우자!’로 살면 먼저 이해하려 하고 들어주려 합니다. ‘알지 못하는 너’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더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배우자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교우 여러분, 한방에서는 체질을 중요시 합니다. 건강하려면 나의 체질에 맞는 음식과 생활 습관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입맛에는 딱 맞는 음식이지만 몸에는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체질의 사람에게는 좋은 음식이지만 내 몸에는 안 맞을 수가 있습니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다른 부부에게 좋은 것이라고 우리 부부에게도 마냥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내 입맛에만 맞는 행동이 부부라는 한 몸에는 해로울 수도 있습니다. 한 몸인 배우자의 체질을 알아야만 부부의 사랑도 건강해집니다. 배우자에게 배웁시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음 말씀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최경일 빈첸시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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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혼인에 관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사실 바리사이들의 이 질문에는 두 가지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아니다”라고 대답하시면 그건 모세의 규정을 어기는 것으로 율법을 어겼다는 죄로 고발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이혼과 재혼을 비난했다가 목숨을 잃은 것처럼 예수님도 같은 운명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그렇다”라고 대답하시면 예수님의 가르침(마태 5, 32)과 반대로 대답한 것이 되고 예수님의 권위가 추락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시기 전에 먼저 바리사이들에게 물어보십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을 통해 먼저 바리사이들의 입장에 대해 물으십니다.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일에 관한 규정은 신명기 24장 1-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그 말을 확대 해석해서 온갖 사소한 일도 이혼 사유가 되는 것으로 남용하고 실제로 예수님 시대에는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 규정들을 악용하는 사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 규정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이 혼인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혼인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도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고,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한몸이 되게 한 것도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니 사람이 그 일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결합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결혼은 육체적, 경제적 결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결합, 인격의 결합까지 포함하는 완전한 결합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두 인격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기쁨, 즐거움, 행복뿐 아니라 슬픔, 고통,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께 결혼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먼저 양보하고, 더 많이 이해하고, 더 자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우리 각자가 될 수 있도록 필요로 하는 하느님의 은총들을 잘 청해야 하겠습니다.

인천교구 김혁중 신부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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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 추석 명절 연휴 기간 중에 산을 다녀왔습니다. 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산에 가면 기분이 참 좋아집니다. 특히 나무가 울창한 숲 속을 거닐 때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상쾌한 기분을 얻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산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 산에 가면 그런 마음이 들까요? 그와 반대로 자연 속이 아닌, 사람들이 많은 곳을 가게 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픕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게 되면 그 자체로 쉽게 지치게 됩니다. 왜 산에서 느끼는 감정과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단순히 산에는 공기가 좋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공기가 나쁘기 때문일까요?

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나무는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직 끝없이 주기만 하다가 사라진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들이 나무가 있는 숲 안에 들어갈 때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바로 나무는 준다는 생각조차 없이 계속해서 주기만 할 뿐이고, 더군다나 주었다고 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를 가까이하면 편안하고 상쾌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과 함께 하면 어떻습니까? 특히 어떤 물질적인 것들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받기만 하려고 하지요. 그래서 쉽게 지치고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를 기억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한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어떤가요? 그들을 통해서는 오히려 괜히 힘이 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욕심과 이기심을 끊임없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괜히 힘이 빠지면서 그 자리를 도망가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요? 혹시 내 곁을 빨리 떠나고 싶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웃들에게 힘이 되어주기보다는 힘을 빼앗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정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가정 안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런 배경인 것이지요.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가정 안에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 역시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맺은 혼인이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사랑의 완성이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가정의 구성원들은 나로 인해 얼마나 힘을 얻고 있나요? 또한 우리 가정 안에서 사랑의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만 하지 마시고, 가정 안에서의 내 모습을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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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천주교는 뭘 줘?” ‘나는 무엇을 주고 있는가?’

97년, 동기 5명과 함께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물론 각자 다른 훈련소로 갔지만, 보충대에서 만큼은 서로를 바라보며 위안을 삼곤 했습니다. 훈련소에서의 어려움이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매주일마다 종교 활동을 하게 되는데, 불교와 개신교 그리고 천주교였습니다.

문제는 종교행사가 끝난 후입니다. 각 종교로 예불, 예배, 미사를 다녀온 각각의 훈련병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불교는 뭘 줘? 개신교는? 천주교는?”이란 질문으로 어떠한 간식을 주는지에 대해서 알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종교행사 후 간식에 따라서 그 종교에 참석하는 인원수가 급격히 변화되는 것을 직접 보자니 웃음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한번은 군종 신부님께서 초코파이 대신 도넛으로 간식을 바꾸셨는데, 그 소문을 들은 훈련병들은 성당의 복도까지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실상 수많은 군인 중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장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황금어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군복음화를 위해 고생하시는 모든 분을 위해 열심한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혼인성사 때 주로 읽혀지는 내용입니다. 즉 혼인성사의 두 가지의 본질적인 특성인 혼인의 단일성(마르 10, 8)과 불가해소성(마르 10, 9)에 대한 내용인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한 몸이 되는 혼인은 알다시피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즉 서로간의 사랑으로 일치된 모습으로 변화되는 사건이 혼인인 셈입니다. 아울러 넓게 보자면 모든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 되고자 합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에 세례성사에 동참하여 주님과 하나 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신앙인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사랑을 나만을 위한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사도 20, 35)’라는 말씀처럼 사랑은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완성되어져야 하는데, 주는 것에 너무 인색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군에 있을 때, ‘천주교는 뭘 줘?’라는 질문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오늘날 나는 과연 무엇을 주고 있는가? 진정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내 삶의 자리에서 그 사랑을 주면서 지내는지 아니면 받으려고 하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 삶 안에서 ‘사랑, 용서, 일치, 신앙(믿음), 진리, 희망, 빛, 기쁨’을 주는 삶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미움, 다툼, 분열, 의혹, 그릇됨, 절망, 어둠, 슬픔’을 주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을 혹여 자신의 욕심으로 착각하여 오히려 ‘나는 무엇을 받으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만 한다면 웃음이 사라진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받기보다는 내가 무엇을 주며 살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하여 고민한 바를 서로 줌으로써 행복한 삶을 추구하여 웃음이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주고 있는가?”

► 인천교구 어경진 안스가리오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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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쀼

작곡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이야기

모세 멘델스존은 함부르크에 있는 한 상인의 집에 갔다가 그 집 딸 프룸체를 알게 되었다. 첫 눈에 반했지만 체구도 작고 기이한 외모 때문인지 프룸체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떠날 시간이 되자 모세 멘델스존은 큰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신은 결혼할 짝을 하느님이 정해 주신다는 말을 믿나요?’ 프룸체는 고개를 돌린 채 차갑게 대답했다. “그래요.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그러자 모세 멘델스존이 반색하며 말했다. “믿습니다. 제가 태어날 때에도 미래의 신부를 정해주시며 제게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하지만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나 는 놀라 소리쳤지요. ‘안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곱추로 만드시고 제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곱사등이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에 아리따운 프룸체는 그 제서야 고개를 돌려 모세 멘델스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순수한 눈빛에서 느끼는 바가 커서 그의 손을 꼬옥 잡아주어 모세 멘델스존의 헌신척인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의 손주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곡들, 특별히 <한 여름밤의 꿈>에서 ‘결혼 행진곡’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오동나무이야기

우리 옛 어른들은 딸을 낳으면 텃밭에 오동(梧桐)을 심고 정혼(定婚)을 하면 그 아버지는 큰 나무로 자란 오동을 베어 시집에 보낼 장롱을 만든다. 그런데 오동을 심는 뜻이 딸 혼수품을 미리 장만하려는 단순함만이 아닌 더 깊은 뜻이 담겨있음을 보자. 오동은 봉황(鳳凰)이 깃든다는 상서로운 나무이고 봉황은 신조(神鳥)로서 숫 컷은 ‘봉’,암 컷은 ‘황’이라고 한다. 자웅 사이가 매우 좋아 부부애를 상징하기에 베개에 봉황을 수놓는 것도 그 사랑이 깃들게 함이며 ‘봉이 나매 황이 난다’는 말도 사랑하는 남녀의 천생연분을 뜻한다. 그러니 딸을 둔 아버지가 오동을 심는 뜻은 ‘봉’을 기다리는 ‘황의 아비’의 마음, 즉 좋은 사위를 맞으려는데 있 다. 이제 사랑으로 키운 나무는 딸이 갈 곳이 정해지면 가차 없이 잘라 내는 데 혼수를 빨리 만들려는 다급함 때문이 아니란다. ‘봉’이 이미 내려앉은 나무, 그 사위가 정해졌다면 다른 ‘봉’은 필요 없어 내려앉지 못하게 오동을 베어 혼수 가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부부란 이런 것임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로써 보여준다. 내 장점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나의 짝이 양보한 것이라고, 배 우 자 의 결점은 내가 상대방에게 전 해 주지 않 아 생 긴 빈구석임을 생각하도록 말이다. 오늘 창세기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있는 것 또한 부부지간의 금슬에 대한 말씀이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감탄하며 맞이했던 첫 쀼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는 지침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늘 당신 축복의 손길을 보내시건만 우리들의 모습이 그를 수용하지 못하는 바가 크다면 오늘 다시금 배우자의 손을 조용히 잡아보자. 그리고 유심히 그 손을 바라보자. 나 하나만을 믿고 함께 해주는 소중한 인연, 부부(쀼)라는 아름다운 단어의 주인공이 되어보자. 아멘.

▦ 인천교구 이근일 마태오 신부 : 2018년 10월 7일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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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대방을 나의 협력자로

어느 형제님이 인터넷에서 공감 가는 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자가 살다가 너무 힘이 들 때면 지갑에 있는 아내 사진을 꺼내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사람과도 살고 있는데,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나?’

자신의 심정을 잘 말해주는 글 같아서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아내이지만, 함께 사는 게 쉽지 않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요. 아내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어? 나랑 똑같네. 나도 힘들면 당신을 생각해. 이런 철없는 남자도 데리고 산다면서….”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가 나만 힘들다고, 나만 억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남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어떻게 다툼 한 번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모든 점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다툼이나 분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보다 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며,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가정 안에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이뤄지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 역시 사랑 안에서 완성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한번 맺은 혼인이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불가해소성(마르 10,9 참조)을 이야기하시면서 사랑의 완성이 가정 안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혼자 있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18)면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혼자 있는 삶이 아니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상대방은 나의 걸림돌이 아니라, 나의 협력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나만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은 왜 들까요? 상대방을 나의 협력자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완성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15)

어린이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라도 잠시 뒤면 오랜 친구처럼 사이좋게 놉니다. 상대의 문제점을 찾는 데 힘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린 마음입니다. 과연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배우자를, 자녀를 또 부모님을 맞이하고 있나요? 열린 마음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히브 2,11)라고 말합니다. 한 분이신 주님에게서 나온 우리이기에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삶이 바로 사랑으로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즉, 주님의 뜻인 사랑으로 철저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마음을 닫고서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 힘들고, 나만 손해를 본다면서 이웃을 나의 걸림돌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웃을 협력자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열린 마음을 갖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 나라가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평화신문 2018년 10월 7일
  |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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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   [안동] 그리스도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1] 1985
719   [춘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  [2] 1993
718   [전주]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1] 143
717   [원주] 우리 삶의 왕이신 주님과의 만남  88
716   [서울] 예수님,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2] 2567
715   [마산] 우리도 그리스도의 왕직을 계승해야 한다.  [3] 1946
714   [대구]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1] 1864
713   [군종] 왕입니다요.  76
712   [광주] 이 세상 왕이 아니다  [1] 2018
711   [인천] 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2] 2014
710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독서와 복음  [4] 813
709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4] 2545
708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2] 1040
707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5] 2242
706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5] 2669
705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2] 2615
704   [대구] 빛과 소금의 삶  [2] 2053
703   [청주] 낼까 말까? 얼마 넣을까?  122
702   [광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109
701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8] 2704
700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4] 2366
699   [전주] 종말론적 교회  [1] 2500
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145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884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139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127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173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891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80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56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8
689   [부산] 참된 봉헌  [5] 2461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9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700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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