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19.6%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조회수 | 2,148
작성일 | 06.10.12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묻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하다고 부르는 부자의 말을 거부하시고 오직 하느님만이 선하시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이 파격적인 선언은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고백하는 부자의 인간적인 의존감과 절박한 심정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하느님의 뜻에로만 부자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예수께서 질문하신 계명들은 십계명의 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부자의 대인 관계 및 사회적 의무의 실천 여부를 묻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계명들은 어려서부터 지켜왔다는 부자의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신다. 그러나 부자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이다. 이것은 분명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두 계명(마르 12,28-34)의 실천이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뒤따르는 일로 구체화된 것이다. 소유를 경멸하고 자신의 귀중품을 바다에 던졌다는 그리스 철학자 크라테스(Krates)와 달리 소유는 나눔을 위해 포기되어야 하고 소유의 포기는 또한 예수 추종이라는 최종 목표를 지향한다. 이웃 사랑은 소유의 포기와 나눔이라는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고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제 영원한 생명은 예수와의 관계에 달려 있고 여기서 재물은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한다.

자발적인 가난은 나눔을 위해서뿐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가난은 재물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마음을 던져 버리게 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것을 바라고 의지하게 만든다.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하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계획과 준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나의 미래를 내어맡기는 믿음을 요구한다.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잃어야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느님의 능하심이 인간의 불가능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예수님의 모진 요구에 부자는 슬퍼하며(lupoumenos) 떠나간다. 나중에 예수님은 겟세마니에서 “내 마음이 슬픔으로 (perilupos) 죽을 지경”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부자의 슬픔도 함께 짊어지시고 그토록 괴로워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의 슬픔 속에는 이처럼 재물과 자기 자신에 연연하여 예수님을 뒤따르지 못하는 모든 이들의 슬픔이 담겨 있다. 예수님의 엄격한 요구는 심장에 박힌 가시처럼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요구 앞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한,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실 수 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능하심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의 믿음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백운철 신부
451 19.6%
무엇을 해 야 할까

우리 모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평생 동안 억만원을 꼭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워서, 구천 구백 구십 구만 구천 구백 구원을 모았다고 합시다. 이제 1원만 더 모으면 평생 필업인 억만 원을 채우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 돈을 어떻게 버나 궁리하며 길거리를 오가던 중에, 거지의 동냥통에 있는 1원짜리 서너 개를 보고서는 '아 ! 저 동전 중에 하나가 내 것이 된다면 나는 억만원을 채울 수 있을 텐데 !'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이 부자는 그 많은 돈을 부정한 행동으로 번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강도 노릇을 해서 번 것도 아닙니다. 그도 노력을 해서 번 것입니다. 그는 나머지 1원을 벌기 위해서 동분서주할 것이며, 억만원이 채워지면 또 다른 억만원을 목표로 세워 또 노력할 것입니다. 그는 기도도 착실히 잘하고,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 참례도 하고, 부모와 자녀, 친지들에게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지내는 그야말로 한마디로 무난한 신앙인, 무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을 잘 지킨, 착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코 10, 17-22)

그는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진 것을 쏠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착한 부자 청년은 이 대답에 침울한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 무난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를 더 요구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한 착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뭐, 이 정도면 됐지 ! 나는 주일에 헌금을 내 나름대로 바치고, 교무금도 내고 또 악한 일도 하지 않고 사는데 ! "하며 자족감에 빠져 있는 수가 있습니다. 이 자족감에 빠져 있는 우리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처럼 근심하며 침울해질 수 있는 우리입니다.

부자는 천당에 가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하신 예수님 말씀에 그만 기가 질려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합니다.

부자다 또는 가난하다 하는 것은 물질이나 돈이 많다, 또는 적다하는 외적인 물량의 척도로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복8단, 즉 여덟 가지 행복된 사람의 조건 중, 첫번째 나오는 말씀은 그냥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지 않았고,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매우 가난하지만, 욕심이 많아서 남의 것을 탐만 내고, 자기의 현재 위치를 불평이나 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가난한 가람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온갖 사리사욕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부자는 사랑이 없는, 자선심이 없는, 이기적인 부자를 두고 말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이와 부자에는 네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① 마음으로 가난하고 실제로 가난한 이들-(자기 위치에 기쁨을 느끼는 착한 사람, 착한 신앙인)

② 실제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남을 돕는 착한 자선 사업가)

③ 실제로 가난하지만 마음에는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들-(자신의 현재 위치에 불평불만만 하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④ 실제로 부자이고 마음의 부자(이기주의자)-(구두쇠형)

과연 우리는 이 네 가지 부류에서 어느 형에 속하는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우리에게 굶어 죽을 정도로 비참하게 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환경에서, 풍부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가르침입니다. 다마 이러한 재물, 또는 환경, 지위에 너무 집착되어, 이런 것에는 온 정신을 쏟으면서 우리의 신앙 생활, 하느님께 관한 내적 생활,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등한히 하는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다.

오늘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모인 우리 교우 모두는 다 착한 신앙인들이며, 또 열심인 분들입니다.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도 모두 지켜왔습니다.

“너, 꼭 하나가 부족해!"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세 가지 반응이 난타납니다. “어휴, 그것은 못하겠군!"하며 떠나가는 무리와 “그것은 약간 곤란한데"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자 청년의 형과,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하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스도교의 사랑, 애덕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그만큼, 하느님을 위해서 남을 더 도와줘야겠다는 애덕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자의 보람과 애덕을 맛보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도와주는 기쁨, 애덕의 기쁨,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쁨이며, 성인 성녀의 기쁨입니다.

▶ 함세웅 신부
  | 10.10
451 19.6%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요즘 우리들의 생명을 제일 많이 위협하는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대인의 불치병인 암, 에이즈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암이나 에이즈는 사람의 육체만을 공격하고 죽이지만 이 병은 인간의 영혼까지도 죽이고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끊게 만들뿐만 아니라 형제지간의 왕래까지도 단절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 바도 돈의 유혹이라는 병입니다. 황금만능주의라는 병입니다. 이 재물의 욕심에 빠지면 인간은 완전히 초토화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그 병에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의 모습니다. 오늘은 재물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옛날에 어느 의좋은 형제가 함께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금 덩어리를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꿈에 부풀어 기분 좋게 길을 가던 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형제는 어느 큰 연못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춘 동생이 금 덩어리를 꺼내 연못 속으로 멀리 집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얘야, 너 무슨 짓이냐?󰡓

󰡒저 금 덩어리가 생긴 순간부터 형이 없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어요, 형님. 그래서 금 덩어리를 버렸습니다.󰡓

그러자 형이 동생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잘했구나. 나도 그랬단다.󰡓

그리고는 자기 몫의 금 덩어리를 꺼내 연못 속으로 힘껏 던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돈보다 형제애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두 형제가 형제애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면 둘이 함께 가는 길에 아마 비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비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온 사회의 각계각층을 휩쓸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간이나 부모자식 간에도 돈으로 인한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만 있는 실정이지요. 돈 때문에 혈연사이에 의절하는 경우,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고 하루 아침에 돈으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정치인, 경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누구도 이 돈이라는 것에 자유롭지 못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와 무릎을 꿇고 절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으니 하느님을 따를 수 있지 않느냐고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대견해하시며 마지막으로 이런 요구를 하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10,21)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산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포기한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신자들 중에도 부자 청년과 같은 결단을 하고 당연히 예수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이 아니냐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내 재산을 포기해야 하고 또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어야 한다면 그럴 사람이 있겠는가 회의하며 부자 청년의 입장에 설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부자 청년의 결정에 동조하는 사람이라면 재산 문제가 생길 때 부모와 형제보다는 재산을 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깊숙이, 지켜져야 할 마지막 보루까지에도 속속히 침투된 황금만능사상이 우리들의 삶을 참으로 힘겹게 만들고 있습니다. 돈이 하느님과 사람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시대의 비극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간의 가치는 거듭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어떤 것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사람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깨닫고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요즈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마지막 노후를 길거리에서 보내고 있습니까? 그 근간에는 부모보다도 자녀보다도 형제보다도 재물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황금만능사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지요. 재물에 대한 유혹이 우리 시대를 비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흐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직접 부모가 가르치고 보여줘야 합니다. 그럴 때 살아있는 교육이 됩니다.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사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매일 싸움을 많이 하여 마침내 파경을 맞게 된 부부가 있다고 합시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돈이 부부애보다 우선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만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반대로 그렇게 어려울 때일수록 부부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자녀를 위하며 산다면 그 자녀들은 온몸으로 가족애를 배우게 됩니다. 돈보다는 가정이 중요하며 부부간의 사랑이 큰 재산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말은 소용없습니다.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효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은 형제가 많은데도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어서 부모가 이리저리 짐짝처럼 떠밀려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집이 좁다는, 또 아이가 대학 입학시험 공부 중이라는 이유들이 다 있지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나중에 그 부모를 모시게 되겠습니까? 더하면 더했지 절대 부모가 바라는 효도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렵고 힘들어도 나를 키워주시고 나를 위해 헌신하신 부모에게 최대한 정성과 공경을 드리는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는 또 그래도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과 제자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사는 아이들, 또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만 챙기고 편애하는 교사가 아니라 모든 학생을 사랑하고 아끼려고 노력하는 교사의 모습을 보인다면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존경하며 닮게 될 것입니다. 촌지라는 불순물이 끼어 들어도 끄떡 안하는 스승을 존경하며 닮게 될 것입니다.
또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무리 신심을 강요하고 잔소리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가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첫째로 모시고 주일이면 만사 제치고 미사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또 정성을 다해서 교무금과 헌금을 준비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부모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일생의 중요한 시기때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며 성사로써 삶을 꾸려 가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 당연히 부모의 신앙을 이어가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각계각층에서 돈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와 사랑과 정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 자녀들은 하느님과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 현실에 만연한 비극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부자라면 부모도 잘 모시고 형제간에 우애도 더 챙기며, 하느님께도 잘 봉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실천의 잣대는 재물의 유무가 절대 아닙니다.

며칠 전에 저는 어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2001년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환경학자 󰡐도넬라 메도스󰡑라는 사람이 펴낸 유고집이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이 세계가 만일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하는 재미있는 수치를 제시해 놓았습니다. 63억 세계 인구를 100명의 숫자로 집약해 본 것입니다.

「먹을 쌀이 있고 월세나 전셋집이 있다면 100명중에 75명 안에 드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100만 원짜리 중고차라도 있다면 100명중에 7명 안에 드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대학을 나왔다면 100명중에 1명 안에 속하는 축복 받은 사람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부유하며 또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가난해서 부모나 형제, 또 이웃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재물을 중시하기 때문에 나눌 수가 없을 뿐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재물보다 중요하다는 기본 정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인간답게 사는 길은 돈보다도 하느님과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기억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람과 하느님이 우선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재물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리면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마는 비극의 사회가 온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모든 것에 우선되어야 함을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부자 청년의 어리석음을 답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우선인 삶을 살 때 나도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 이기양 신부
  | 10.10
451 19.6%
와서 나를 따라라

한국인은인생에서무엇을가장중요하게여기는가?’매년 실시하는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의 자료는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39.2%), 가족(28.9%), 돈(16.2%), 친구(4.8%) 순으로 비중이 크며 종교는 2.8%라고합니다.‘ 돈’의비중은점점더높아지고있으며 다른 연구조사에서‘나는 물질주의자이다’라는 비율이 50.4%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사실 제가 잘 아는 청년신자들에게 이와 비슷한 질문을 했을 때도 스스럼없이‘그야 물론 돈이지요!’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선, 이 사람은 높은 정신적∙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이 선(善)과 밀접히 연관되어있음을잘알고있습니다.“ 선하신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선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아리스토텔레스)이라면, 인간의 모든 욕망의 종점은 선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만물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은 선(善)자체이신 하느님 한 분 뿐이십니다(18절).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 부자에게“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21절)”하고 요청하시는 걸까요? 그리고 왜 이 부자는 주님의 이 고귀한 초대를 거부까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성 안에는 근원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갈망함과 더불어 이에 저항하는 뿌리인 물질적인 소유욕이 깊게 도사리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교회는‘인간은 무엇을 소유(所有)하느냐 보다 오히려 어떠한 존재(存在)이냐에 따라 가치를 지닌다(사목헌장 35항)’고 가르치는데 인간이‘존재’로는 선(善)을 갈망하지만 실제로는 소유욕에 사로잡혀 주저앉고 마는 현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 이율배반과 모순을 극복하는 길을 오늘 예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제시하십니다. 사실, 이 계명들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부자유스럽게하는 금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험악한 세상 안에서 무방비 상태로 던져진 나약한 우리들을 보호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따스한 배려인 것입니다. 이 계명의 근본 의미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외적인 삶을 규정하고 거기에만 머무르는 율법이 아니라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가 서도록(18절), 또 율법의 완성이시며 그 자체이신 당신을 만나고 함께 살기 위하여 따라 나서도록(21절)우리를초대하십니다“. 와서나를따라라.”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자주 직면하는 외적 생활과 내면 생활의 분리, 신앙과 행동의 분열을 보게 됩니다. 이 이면에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불신과 불순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받아 누리기는 원하면서 이 하느님의 사랑에 인격적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비신앙의 풍토 속에서 신학자 본회퍼는‘믿는 자는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는 믿는다’를 강조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응답이바로이를말해줍니다.“ 보시다시피저희는모든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 구요비 신부
  | 10.10
451 19.6%
예수님을 따르는 길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0,22)

예수님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과 연결 지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전제 조건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으로 채워진다는 희망을 내포합니다. 곧, 버림은 채워짐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전에 맡았던 일들을 버리고 친근한 사람들을 떠나야만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전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랫동안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친근했던 과거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지만, 마음과 감정까지도 떠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승리하고 미래에 관해서 흥미를 갖게 되지만, 여전히 사람들과의 친밀한 우정과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실망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일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혼동을 주는 시기지만, 이것을 통해서 과거에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서 앞에 놓여 있는 것을 향해 줄달음질치는 것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주 사람들은 즐거워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어떤 것들 때문에 즐거움을 놓칩니다.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일이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대해 할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현재에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 뒤에 있었던 과거를 봉헌하고 현재 처해 있는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일치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3-14).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획하신 일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손에 쟁기를 잡고 한때 있었던 그리고 다시 있지 않을 것에 대해 뒤돌아보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살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비록 우리가 지나간 날들과 똑같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재창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똑같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사람으로 현재의 하느님을 이해하고,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루에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문종원 신부
  | 10.14
451 19.6%
[서울] 하느님 앞에 반듯한 사람

생각이나 행동이 비뚤어지지 않고 똑바른 사람을 보면 ‘반듯하다’고 칭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아왔 던 부자 청년(마태 19,20 참조)도 ‘반듯하다’는 칭찬을 들을 만합니다. 재산이 많으면 걱정 없이 평생 즐기면서 살 법한 데 이 청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즐거움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어렸을 적부터 십계명을 지키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반듯한 이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대신에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고 명하십 니다. 자신이 지닌 많은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던 청년은 울상이 되어 떠나갑니다. 왜 예수님은 기특하게 여기신 청년에게 그런 엄청난 요구를 하셨을까요? 재물의 위험을 간 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예수님이 부자 청년이 떠 난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경고의 말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 청년은 하느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면서 살았 지만, 실상은 하느님보다 자신이 소유한 많은 재산을 더 든든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는 옛말처럼 재산이 많으면 살기 위해 발버둥 칠 필요 없이 품위 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재산이 다 없어지더라도 그럴 수 있을까요? 가진 바를 다 잃어버려도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애 착, 하느님보다 재물에 더 마음을 두는 태도입니다. 예수님 이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 눠주라고 요구하신 이유는 그를 한 단계 더 높은 삶으로 인 도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반듯한 삶의 기반을 철저히 하느님께 두도록 ‘충격’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앞에서 정말로 반듯한 사람,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 도록 부자 청년의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말씀(제2독서)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이에게는 이미 이 세 상에서의 하느님의 보살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약 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하느님께 마음을 두 고 재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삶은 권력이나 재산, 건강과 외모보다 훨씬 더 소중한 참된 지혜(제1독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살면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1-13) 하느님 앞에서 반듯한 사람이 되 도록 한 걸음 더 정진합시다.

►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보좌주교
  | 10.09
451 19.6%
[서울]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길을 막 떠나시려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이에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갑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저는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주춤해지곤 합니다. 그러면서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이 한없이 쓸쓸해 보입니다. 한편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신 주님의 눈길에 마음이 자꾸 갑니다. 이어서 드는 생각은, ‘재물이 많은 성실한 젊은이가 이후 어떻게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을까?’입니다. 특히 삶의 굴곡 속에서 몸과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을 때 말입니다. 그는 그 어느 땐가 마음이 움직이면서 재산 일부를 희사하였겠고, 그러다 보니 자유로워지고 평화가 그를 감싸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차츰 자선과 희사는 그 액수를 더해 갔을 것입니다. 마침내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재산이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정하면서, 존재론적인 자유와 평화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였으리라 묵상합니다. 그리고 끝내, 그렇게 바라던 영원한생명이 내가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하면서 스스로 자문합니다. 지금 내가 소유하거나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재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이는데 분명 장애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앞으로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소중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나의 삶의 한가운데로 모시려고 애쓰는 나를 결코 놓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재산이 많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예수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젊은이가 마침내 그를 향한 사랑의 시선을 깨닫습니다. 깨닫는 순간 자유와 평화 그리고 기쁨이 엄습합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오늘의 복음 환호송입니다. “알렐루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알렐루야.”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 : 2018년 10월 14일
  | 10.12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25   [청주] 감사의 생활  [1] 2537
724   [대전] 권력보다 사랑을 택한 그리스도  [1] 958
723   [수원] 그리스도의 왕권은 어디로부터?  [2] 2072
722   [수도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4] 1917
721   [의정부] 주님! 왕입니다요!  [1] 1986
720   [안동] 그리스도 우리의 왕, 우리의 주님!  [1] 1985
719   [춘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  [2] 1993
718   [전주]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1] 143
717   [원주] 우리 삶의 왕이신 주님과의 만남  88
716   [서울] 예수님,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2] 2567
715   [마산] 우리도 그리스도의 왕직을 계승해야 한다.  [3] 1946
714   [대구] 구유에서 십자가까지  [1] 1864
713   [군종] 왕입니다요.  76
712   [광주] 이 세상 왕이 아니다  [1] 2018
711   [인천] 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2] 2014
710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독서와 복음  [4] 813
709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4] 2545
708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2] 1040
707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5] 2242
706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5] 2669
705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2] 2615
704   [대구] 빛과 소금의 삶  [2] 2053
703   [청주] 낼까 말까? 얼마 넣을까?  122
702   [광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109
701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8] 2704
700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4] 2366
699   [전주] 종말론적 교회  [1] 2500
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145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884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139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127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173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891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80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56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8
689   [부산] 참된 봉헌  [5] 2461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9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700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84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