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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조회수 | 1,987
작성일 | 06.10.12
재산이 많았던 부자 청년, 결국 그 재산 때문에 예수님 추종에 실패했던 부자 청년에 대한 복음을 묵상하면서 두가지 영상이 계속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슬픈 얼굴로 예수님 곁을 떠나가는 부자 청년, 그는 결국 자신의 어깨에 잔뜩 걸치고 있던 부와 명예, 안정된 생활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해 쓸쓸히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부자 청년 마음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동경, 보다 경건하고 영적인 생활을 위한 적극적 의지로 가득 찼지만, 최종적으로 재산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고 다시금 현실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자 청년 모습에 이어 가난과 결혼했던 '가난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성인(聖人) 중 성인입니다. 가장 예수님을 닮은 성인이기에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들도 이분의 사상과 영성을 추구합니다. 서구에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대라면 서슴없이 프란치스코를 첫 번째로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중세 교회 모습은 부끄러운 구석이 많았습니다. 귀감이 돼야 할 지도자들은 제 몫 챙기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고위급 인사들이 갖은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부를 축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위풍당당한 대성전들과 수준 높은 예술작품 등으로 외관상 교회는 활짝 꽃피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심할 지경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았던 그곳에서 예수님 자취는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암울했던 시절, 프란치스코는 예수님과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가장 자유로운 모습, 가장 가난한 모습, 가장 겸손한 모습,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역설적이게도 무너져가던 교회를 구하려는 해결사로 등장했던 프란치스코가 지녔던 것은 '완벽한 가난'이었습니다. 허물어지던 교회 기둥들은 가난과 해탈의 영성으로 무장했던 프란치스코에 의해 다시 세워졌습니다.

프란치스코 전기를 읽고 묵상할 때마다 길게 여운을 남기는 단어는 '자기 포기', '자기 해방'과 같은 단어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해방의 여정'입니다.

청년 프란치스코는 보다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을 위해 집을 나섭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님 가난을 자신의 삶에 완벽하게 재현하고 싶었기에 인간세상의 모든 달콤한 것들과도 과감하게 결별합니다.

그러나 가족 반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출가한 프란치스코에 대한 실망도 더욱 컸습니다. 집요한 부친의 집착을 떨쳐버리려고 프란치스코는 눈물을 머금고 극단적 방법까지 동원합니다.

영화 '프란치스코'를 보신 분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대성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옷을 훌훌 벗습니다. 완전히 알몸이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옷을 아버지에게 건넵니다. 하느님 앞에, 사람들 앞에 완전히 알몸으로 섭니다.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정녕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또 다른 예수님 모습으로 교회를 나섭니다.

모든 애착으로부터 훌훌 털고나온 프란치스코였기에, 보다 홀가분해진 프란치스코였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던 교회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보다 큰 자유를 얻으려고, 보다 큰 가치관을 선택하려고 지니고 있던 값진 것들을 창밖으로 내던지던 프란치스코 모습이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돈을 발견하게 되면 '헛되고 헛되며 세상만사 헛되니' 우리는 발로 밟는 먼지와 같이 그 돈을 거들떠보지도 맙시다."

▶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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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조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 복음은 바로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본 제 수도생활 늘 부끄럽기만 합니다. 입회 때, 첫서원 때, 종신서원 때, 사제서품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폼이란 폼은 있는 대로 다 잡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만을 따르겠다"고 수백 번도 더 다짐을 했었건만, 돌아보니 버리기는커녕 엄청 쌓아만 왔습니다.

때로 "다시 한번 버리자"며 옷장을 정리한다, 대청소를 한다 설쳐댔지만, 또 다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줍잖은 모습으로 대충대충 살아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에게 있어 진정한 버림은 내적인 버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옷장 안에 걸려있는 옷가지 몇 벌이나 제가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은 마음 한번 크게 먹으면 단 10분만에 박스 몇 개에 넣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버림은 내적인 버림, 영적인 버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버림은 그릇된 우리의 의지를 과감히 접고 하느님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참된 버림은 하느님의 뜻을 보다 적극적으로 따르기 위해, 이웃을 보다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우리의 쓸데없는 고집, 지나친 자존심, 우월감, 자리에 대한 지나친 애착, 경직되고 완고한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일입니다.

보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작고 잔잔한 시냇물을 포기하듯이 보다 크신 하느님께 잠기기 위해 우리의 작은 인간적인 욕구나 애착을 자제하는 것이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버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솔직히 느끼는 바인데, 요즘 인사이동철만 되면 수도회나 수녀회 인사권자들은 골머리를 앓습니다. 물론 변화무쌍한 시대에 걸맞게 순명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하다" 싶은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데는 어디든 좋습니다만 거기만큼은 못 가겠습니다. 그 일만큼은 제발 제게 맡기지 말아주십시오." 어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가라고 말씀하시는 대로 어디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왕이면 남들이 다들 가기 싫어하는 곳, 가장 힘든 곳으로 저를 보내주십시오." 수도자의 자세는 이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버린다는 것은 "높이 한번 올라가 보겠다" "내 계획대로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올라가 보겠다"는 인간적인 가차없이 접고 또 다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일,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쇄신시키는 일,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버림입니다.

▶ 양승국 신부 (살레시오회)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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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하나 (마르 10,17-27)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하셨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부족한 것 하나는 무엇인가? 그 하나는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일 수도 있다. 그 하나가 무엇인가를 오늘 묵상하도록 하자. 그것은 하나이지만 어떻게 보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전부일 수도 있다. 또 그 하나를 얻으면 전부를 얻는 것일 수도 있다. 그 하나는 마치 집에 들어가는 열쇠와도 같은 것이다. 그 하나는 전쟁터에 나간 군인에게 총알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비행기를 타려는 여행자에게 비행기 표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동생 마리아보고 "자기 일을 도우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한 마르타에게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가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많은 일을 하느냐고 분주한 마르타를 칭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왜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느냐?"라고 꾸짖으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시면서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우리도 이처럼 필요한 것 한 가지가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소홀히 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예수님이 이 부자 청년에게 지적한 부족한 것 한 가지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 청년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하고 대답한 이후에 하신 말씀이시다. 그러니까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지켜 온 것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라는 계명들을 충실하게 지켜왔다. 그런 많은 것들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레 바라보며" 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신 말씀이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어보면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해도 예수님이 지적하신 하나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한 가지를 행하는 것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그럼 그 하나가 무엇인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지켜온 것들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었다. 그 계명들을 지킨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들이었지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행동들이 아니었다. 이 청년이 어려서부터 지켜왔다고 말한 계명들을 이 청년이 지킨다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 해서는 안 된다."라는 계명들은 " ... 하라"는 계명이 아니고 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따라서 그런 짓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게 그런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굳이 그 계명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굳이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횡령 등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것들은 주로 돈이 없어 먹고 살기가 어려운 가난한 사람이 하는 행동들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 그런 계명들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부자 청년은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재산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키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이 청년은 무척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기를 위해서는 많은 재산을 모으고 갖고 있으면서도 남을 위해서는 하나도 베풀지 않는 인색한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이다. 이 부자 청년이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도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재물도 명예도 얻었으니 내친김에 영원한 생명까지 얻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고 명예를 갖고 있다하더라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무엇이든지 소유함으로써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은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영원한 생명도 소유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자기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즉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내놓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무엇이든지 소유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자기 것을 내놓는 것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인색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는데 그 이유는 많은 재물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재물을 내놓음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느님나라는 재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많은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음으로써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자라는 것은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다.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된 것은 전부 자기 자신의 안일과 편안함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 재산을 모았다면 아무리 많은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코전 13, 1-3)라는 바오로의 말씀이 바로 한가지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신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재물, 시간, 재능, 명예, 권력, 건강 등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것들이다. 또 주님을 따르는 목적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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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고 계신 예수님 앞에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합니다. 사회에 영향력을 지닌 젊은 권력가인 그 사람이 (루카 18, 18 참조) 급히 ‘달려와’ ‘무릎을 꿇은 모습’ 과 존경을 담은 호칭 ‘선한 스승님’ 으로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그의 진지한 태도와 함께 그가 예수님을 자신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실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 젊은이가 묻습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 (마르 10, 17)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은 무엇인가요 ?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뒤에서 다른 말로 표현되어 나옵니다.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23절) 이며 ‘구원받는 것’ (26절) 이지요.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 라고 하는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 (19, 16) 에서 보면 그 젊은이는 자신이 어떤 ‘선한 일’ 을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선’ 을 인간의 성취에 의해 평가되는 어떤 것으로 보려는 그 사람의 잘못된 생각을 먼저 지적하십니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마르 10, 18) 그리고 그 사람의 질문에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에 속하는 다섯 계명 (탈출 20, 12 – 16; 신명 5, 16 - 20) 을 다른 순서로 제시하십니다.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지켜야 할 계명인데, 예수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신 계명 가운데 하나, 곧 ‘횡령해서는 안 된다.’ 는 십계명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이 명령은 이 이야기의 병행 구절인 마태 19, 18 – 19과 루카 18, 20에는 나오지 않고 마르코복음에만 있습니다. 아마도 권력을 지닌 부유한 젊은이에게 적용시킨 보충 계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이 계명이 본디 십계명에 속하지 않으므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고요. 예수님의 말씀에 젊은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 (마르 10, 20)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그렇다면 그것을 보상할 어떤 행위를 예수님이 알려주실 거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가 지닌 진지한 종교적 열심을 대견해하시며 사랑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십니다.(21절)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것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많은 재산을 지니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첫째,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이는 ‘영원한 생명’ 을 방해하는 장애물인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와서 나를 따라라.” 이는 ‘영원한 생명’ 을 자신의 행위로 인해 얻을 수 있다는 생각과 재물에 대한 애착에서 돌아서서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그를 묶어놓고 있는 재물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때 그가 구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젊은이는 추구하는 것을 얻으려면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럴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슬퍼하며’ 자리를 뜹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특별한 자기 부인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는 이 부자 젊은이한테는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떠나고 난 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3절) 그 말씀에 제자들이 ‘놀랍니다’. 유다인들에게 ‘부유함’ 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재물이 구원에 장애물이 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지요. 당신 말씀에 놀라는 제자들을 예수님은 ‘얘들아.’ 하고 부르시며 불가능한 것을 묘사하는 유명한 유다 경구를 사용하여, 재물에 대한 기본 자세를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자기의 재물을 믿고 의지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우리 눈앞에 가장 큰 동물인 낙타가 가장 작은 구멍인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며’ 서로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 (26절) 구원이 그렇게 어렵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탄식이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길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절). 하느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재물에 묶여 있는 부자의 마음이 언젠가 열리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올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누구한테나 자신에게 ‘소중한 것’ 을 버리고 구원으로 향하는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있고, 믿음으로 그것을 실천할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에페 2, 8)

이에 제자들의 대변인 자격으로 베드로가 우쭐거리며 말합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마르 10, 28).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와 달리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지요. 베드로의 이 말에는 ‘그러니 우리가 받을 보상이 무엇입니까 ?’ 가 함축되어 있습니다(마태 19, 27).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나를 따름으로써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가족과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 많은 재물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영원한 생명’ 을 받을 수 없었던 부자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지요 ? 언젠가 그가 믿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애착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져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 인 ‘하느님 나라’ 를 얻지 않았을까요 ?

► 강선남 님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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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오직 하나 주님만을 모실 수 있도록 제 영혼을 비워 주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어느 수도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수도원의 묘역에는 커다란 조각물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조각물은 ‘바늘귀’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수사님들의 묘역에 웅장한 ‘바늘귀’는 펑 뚫린 구멍에 하늘을 담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6)라는 전前문맥에 이어지는 오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받을 상급에 대해 전하고 있습니다.(28-30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17절) 하고 질문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요한복음에서 주로 사용되며, 공관복음에서는 ‘하느님 나라’,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는 말씀으로 선의 기준을 하느님께 돌리시며 영원한 생명이 계명준수에 있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알려주십니다.(18-19절)

십계명 4-8계명과 “손해를 끼치지 말라.”(19절; 신명 24,14-15; 집회 4,1 참조)는 말씀은 생명과 가정의 존엄성 그리고 소유권을 보호하고 정직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금명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는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켜온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였습니다.(마르 10,20.22) 그러나 그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보다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로마 10,2-3 참조) 그래서 그는 자신의 힘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지금까지 해온 생활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것인가 하며 예수님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명을 준수하며 정도正道를 걸어온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마르 10,21ㄱ) 그러나 부를 가진 사람들한테는 계명 이외에도 또 다른 소명이 부여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십니다.(21절) 그러므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 단순히 계명만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포기와 추종’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운명을 함께하는 그 길에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많은 재물에 매여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한 채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22절)

재물은 생활에 유용한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면 사람을 조정하는 마력을 지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23.25절)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제자들은 놀라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26-27절) 구원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로서 그분을 만난 사람 앞에서 재물은 그 마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합니다.(28절)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포기해야 할 항목으로서 ‘집과 형제와 자매,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와 토지’, 곧 ‘재물과 혈연관계’를 말씀하십니다.(29절) 포기와 추종에는 두 개의 상급이 따르는데, 현세에서는 박해와, 재물과 혈연에 대한 백배의 상급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30절) ‘복음과 예수님’ 때문에 혈연을 끊어야 하는 비정함과 선교의 터에서 어려움이라는 박해가 따르지만, 하느님 안에서 만나는 형제 · 자매들이 새로운 가족과 재물로 등장합니다.

‘포기와 추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지만,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저절로 추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가 십자가라면, 추종은 십자가를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후後문맥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2-34절)로서 추종이 십자가를 향한 길임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말씀처럼, 그 길은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로 이르는 길이 될 것입니다.(지혜 7,7-11)

▪ 묵상 (Meditatio)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버리고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 내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다른 것을 담을 수도 없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아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이는 재물이 없어서 가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손을 펴서 이웃 앞에 내어놓지 못하는 내 마음에 가난과 탐욕이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텅 비어 있으면 남한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 이제 그만, 텅 빈 마음에 예수님만을 모시고 달려가려 합니다.

▪ 기도 (Oratio)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욥 1,21)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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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참된 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나는 진정 지혜를 찾고 있는가?’, ‘그것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찾고 있는 지혜, 그것은 참된 지혜인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고백합니다.“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 7)

이는 “주어졌고”와 “나에게 왔다”라는 동사에서 알 수 있듯이, 지혜는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분의 영께서 “오신”으로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는 주어진 선물인 이 지혜는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능력”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의 들음’에서 옴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 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 13)

오늘 <복음>에서는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부자청년과 우리를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하느님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곧 당신의 한 말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라는 말씀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 29 참조)는 말씀이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그들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이 들통 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 17)라는 부자인 어떤 사람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 26)라는 베드로의 질문 사이에는 애시 당초부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부자인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질문을 하지만,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베드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 21)

이는 그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단지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지난 주 월요일 <복음>에서,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오늘 <복음>의 부자인 어떤 사람과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루카 10, 25), 예수님의 반문에 그가 <신명기> 6장 5절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으로 답변을 하자,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마르 10, 28)라고 하신 것처럼, ‘말씀을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 29 참조)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사랑하되, “당신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비록 그가 집을 떠나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하나,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일 뿐, 복음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원해서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 드려 그 지혜가 내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듣는 마음과 말씀에 승복하고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지혜이신 하느님을 믿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0월 14일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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