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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조회수 | 1,934
작성일 | 06.10.13
지혜7,7-11 | 히브4,12-13 | 마르10,17-30

묵상길잡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은 물욕이 얼마나 무서운 우상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재화는 세상 만민의 생존을 위해 있는 것이다“내 것을 내 맘대로 쓰는데 왜?”라는 태도는 잘 못된 것이다. '내 것'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 있음을 잊지 말자

1. 제자들의 충격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고 묻는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대답하는 청년을 대견해하시며, 완전한 길을 제시하신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떠나가는 부자 청년을 보시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고 하신다.

질병과 가난은 죄인이 받는 벌(罰)이요, 건강과 부(富)는 하느님의 축복이라고만 알고 있던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하며 충격을 금치 못한다.

2.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공산주의가 내 세우는 이상은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쓴다.”는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공산주의는 빈부격차가 없는 만인평등의 사회를 부르짖고 추구하였다. 1917년 소련에서 공산주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하여 공산주의 이념을 근간(根幹)으로 하는 사회가 출범하였고, 1980년대 공산주의가 붕괴되기까지 반세기 이상 공산주의는 인류의 1/3을 물들이는 큰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있다. 일찍이 고르바초프는 콩을 싣고 가는 트럭에서 콩이 줄줄 흐르고 있음을 보면서도 그냥 트럭을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인간은 자기 것이라야 아끼고 더 열심히 일을 한다. 반세기 이상의 실험을 통해 공산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맞는 체제가 아님이 증명된 셈이다.

그러면 자본주의는 완벽한 것인가? 무제한적인 절대적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초래하게 되어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제도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교회는 평등한 재산분배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唯物論)과,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숙청 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수단이 정당하지 못할 때 그것은 배격되어야 한다.

3. 재화(財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재화(財貨)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모든 재화(財貨;재산과 돈)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는 데서 출발한다. 다른 말로 하면“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천부적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만인의 재산 사용권'이라고 한다. 그러면 ‘사유재산권’은 무엇인가? 사유재산권은 '만인의 재산 사용'을 구체적으로 누리게 하는 한 방법(수단)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사유재산권을 주장함으로 빈부격차가 극심해 질 경우, 사유재산권은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엔 사유재산권이 오히려 모든 이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부(富)를 누리도록 하는 적당한 방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문헌에서는 "어떤 사람이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다면 남의 것을 훔쳐먹어도 그것은 죄(罪)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사목헌장,69항 '가난한 자의 권리' 참조) 이것을 '가난한 자의 권리'라고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사유재산권’의 병폐를 보완하기 위해 상속세, 종토세, 공한지세, 종합금융 소득세 등의 세금제도와 '토지공개념'에 따른 '토지거래 허가제' 등 법적 제도를 통해 부(富)의 편중을 막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에 살아온 우리들은 사유재산권이 절대적인 것인 양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내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해 주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내 것’ 안에는 항상 ‘남의 몫’이 함께 있다 는 것이다. 맘몬(物神)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없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형편이 좀 나아지면 남을 돕고 나누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결코 남과 나누지 못할 것이다. 자기 것을 나누는 것은 평소의 수련 즉 연습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다.”고 말한다. 좋은 취지를 가진 여러 후원회에 가입하여 동참하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가진 바를 나누는 확실한 수련의 길이라 하겠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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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부자 청년 이야기]

복음 말씀은 재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다. 살아가면서 하루라도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재물이다. 어떤 이에겐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하고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을 오늘 주님은 만나신다. 그리곤 그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다. 그러나 청년은 망설인다.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미적거리다가 제자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오라 하셨던 것이다. 그 말씀이 그를 낭패하게 만든다. 이유는 무엇일까. 재물이 아까워서 그랬을까. 나누어주는 것이 억울해서 그랬을까. 그건 아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이 청년을 붙잡은 것이 아니다. 청년을 붙잡은 것은 재물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물의 힘이 예수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재산을 나누어 준 뒤에 오라고 하셨다. 재물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꿀 수가 없었다. 예수님과 함께 재물의 위력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가고 만다.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비유로 말씀하신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부자이겠는가.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그런 사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가 말하는 부자는 재물의 힘이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재물의 위력에 굴복하여 재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이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부자들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함을 느낀다. 누구나 궁핍함을 경험한다. 만족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물이 많건 적건 이 표현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객관적 판단으로 저 사람은 부자다 하더라도 당사자가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다, 나는 늘 부족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가난한 사람인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보기에 저 사람은 가난하다, 별 볼일 없다, 이렇게 판단하더라도 그가 가진 것에 만족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분명 부자인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구원에 도달한다. 구원은 만족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맡기며 내 힘을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우리는 재물이 최고라고 말해선 안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말하더라도 우리는 그 위에 주님의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야 한다.

복음의 끝에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왔음을 고백하자 예수님은 백배의 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든 내세에서 이루어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말씀에 희망을 걸면서 살아갈 뿐이다. 재물은 인간의 마음을 늘 세상으로 쏠리게 한다. 그리하여 물질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게 한다. 재물보다 귀한 것이 있음을 믿는 우리들은 깨끗한 부자들이다.

▶ 신은근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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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단어는 앞서의 구분에 관계없이, 혼용해서 쓸 수 있습니다. ‘잘생긴 또는 못생긴, 착한 또는 악한, 신사다운 또는 아름다운 사람’의 예를 통해 이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원거리에서 사람을 바라볼 경우, 대부분의 경우 육체적인 것을 먼저 바라봅니다. 그리고 근거리로 들어서면서, 점차적으로 정신적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사람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적인 평가는 각 개인의 주관에 의해 많이 좌우됩니다. 그리고 그 평가가 세월의 흐름 가운데서, 자주 뒤바뀌기도 합니다.

지금껏 제 인생에서 만난 사람 중에, 마음을 설레게 하고 함께 지내고 싶은 인물이 몇몇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타인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볼품이 있건 없건, 건강하건 노쇠하건, 학식이 뛰어나건 모자러건, 지위가 높건 낮건, 재물이 많건 적건,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빛이 발산되고, 향기가 피어나고 있기에,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그리고 곰곰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지금 나에게 붙여지는 수식어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수식어를 원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써, 이 ‘사람의 대인 관계 및 사회적 의무의 실천 여부’를 확인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다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뒤따르는 일’이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가는데 그 이유가,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두 계명(마르 12,28-34)’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추가됩니다. 그것은 앞선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소유의 포기와 나눔의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고, 하느님 사랑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뒤따르는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유의 포기는 나눔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자발적 가난은 재물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보장받으려는 마음을 던져 버리게 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모든 것을 바라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나,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불가능한 힘을 가능한 힘’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실 우리는 ‘영원한 생명’, ‘구원’, ‘하늘나라’에 관해 늘 소유의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바와 같이 ‘나눔-위함’과 ‘투신-믿음’안에서 그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눔-위함’과 ‘투신-믿음’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투신과 나눔’을 통한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마산교구 이성렬 요셉 신부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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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자기이미지의 함정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한 좋은 자기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력을 다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좋은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바른 사람이다. 완벽한 사람이다. 성공한 사람이다. 거룩한 사람이다.’같은 자기이미지를 지키려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애쓰며 산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자기이미지들이 모든 죄와 욕심의 근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런 자기이미지가 깨지는 일이 생기면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무의식적이고 부정적인 반응들을 보이는데,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우울감에 빠지거나 자기비하로 비뚤어지거나 방탕해지는 등 불행 속으로 스스로 더 빠져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부자청년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자기는 좋은 사람입니다. 세속적 성공은 물론 어지간한 계명은 다 지키며 착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만 얻게 되면 모든 면에 성공하고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청년에게 영원한 생명은 완벽한 자기이미지를 위해 채워야 할 품목의 하나쯤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하느님의 뜻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부자청년의 자기이미지와 욕심에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 것을 내어주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청년은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납니다. 부자청년의 슬픔은 진복팔단의 슬픔이 아니라 자기이미지와 욕망을 채우지 못한 사람의 미숙하고 비뚤어진 슬픔입니다.

복음의 부자청년이 어리석어보여도 실재로는 저보다도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성찰 됩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청년보다도 못할 가능성이 높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우리 각자가 빠져있고 물들어 있는 자기이미지의 함정을 깨닫고 또 그 함정의 자리에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버리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따르는 것 아닐까요? 우와, 정말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 마산교구 이상원 베네딕토 신부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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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내가 받은 것은? 내가 나눌 것은?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고 자신했던 것 같습니다. 그 자신감은 선조들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계명을 어김없이 다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 소유하고 있는 많은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고 했을 때 실망하며 돌아갑니다. 이 실망감과 원인이 자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조언을 실천하지 못할 자신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본인만이 알 것입니다.

멕시코 과달루페 성모님 발현 성지를 갔을 때, 성전 밖에서부터 무릎을 꿇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을 봤습니다. 저는 차마 허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지, 그리고 올바른 행위인지 알 수 없으나 정성을 다해 자신을 낮추고 기도하는 모습에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그 감동은 저의 기도 생활을 성찰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바쳐온 기도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를 깨달았고, 그러면서도 자만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져 반성했습니다. 하지만, 평신도보다 부족한 사제라는 반성이 저를 분발하게 하는 기회를 준 것 같아 값진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한 모습의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해야 하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더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가진 재물과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엔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만 기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많이 성장한 모습입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을 통하여 세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하게끔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 드린 일’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 드리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연히 ‘해 드려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하느님과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만 바라는 신앙인들에게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는 겁니다.

오늘 두 독서에서는 지혜이신 하느님만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많은 것을 가진 솔로몬 왕은 지혜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번 한 주간 내가 가진 재물과 재능이 하느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고, 다른 이들과 나누는 지혜로운 신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더 큰 선물을 하느님께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마산교구 김형렬 요셉 신부 : 평화신문 2018년 10월 14일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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