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15.6%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조회수 | 2,199
작성일 | 06.10.13
신학생 시절, 성서수업 시간에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신부님!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다 할 직업도 수입원도 없으셨던 것 같은데, 예수님은 어떻게 먹고 사셨나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으로 수준 낮고,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는 티를 팍팍 드러내는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때 교수님은 하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아니면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빌어먹고 사셨지! 우리 신부들도 빌어먹고 살아야하는 거야, 그렇지!” 결국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제의 삶은 ‘빌어먹는 삶’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빌어먹는 삶! 쉽게 말해서 ‘거지의 삶’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지”하면 좋지 않은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유대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거지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지를 “하느님의 배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은 동족 간의 자선이나 선행을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일부로 여기며, 그 계약을 자주 이행하기 위해 동족 가운데 한 사람을 거지로 발탁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유대인 사회에서 거지는 하나의 직업인으로서 집도 있고 아내도 있고 구걸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동족들로부터 물질적인 혜택을 받은 거지는 학문을 연구해야하며, 동족이 핍박을 받거나 지혜가 필요할 때 랍비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거지가 정신적 선행으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합니다(“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 것”, 71~77 참조).

이렇게 보니 사제의 삶이라는 것이 거지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어쩌면 사제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다운 거지, 진짜 거지처럼 살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들이 주는 물질적 혜택으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신자들의 어려움이나 고민을 함께 들어주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안고 살아야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으니 완전 거지와 똑같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이 준비해주신 ‘거지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거저 받고 살며,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도움으로 살아 숨쉬고, 하느님이 주신 자연의 열매를 먹고 생명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느님 덕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는 완전 거지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지로서의 의무를 망각할 때가 자주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으면서, 하느님이 주신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가는 존재들이면서 이웃들의 어려움이나 고통을 해결해주어야 하는 거지의 본분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느님의 참된 거지가 되어 그동안의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법’을 열심히 공부하여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하겠습니다.

인천교구 김성훈 신부
450 15.6%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다. 계명을 잘 지키고 있는 그를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며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다. (마르 10, 17-30참조)

가을인가보다. 단풍이 들기 시작한다. 빨갛게 노랗게 변해가는 모습을 대부분 사람들은 예쁘다 한다. 누구는 처절한 몸짓이라고 한다. 초록 잎 그대로는 겨울을 날 수 없기에, 살 수 없기에 잎을 떨구기 위해 광합성을 멈추는 것이라고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무 생각이 났다. 생명을 얻기 위해 제 몸을 버리는 나무. 나는 어떤가.

작년에 본당을 떠난다고 신자들이 승용차를 사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냥 받기에는 너무 큰 선물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 차를 되팔고 돈을 돌려보내고 지금의 차를 사고… 수선을 피웠다. 그래도 내 형편엔 과분한 차다. 재산목록 1호다. 그런데 주님은 이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승용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시대정신에 맞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선뜻 자동차를 내어놓기가 쉽지 않다. 제 땀 흘려 산 것도 아니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버리지 못한다. 오히려 사제가 승용차를 구입할 때 신자나 가족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찜찜한 상황을 탓한다. 사목에 필요한 차를 사제 개인이 구입할 것이 아니라 교구나 본당에서 본당 전용차를 사주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주임신부, 보좌신부, 수도자들이 같이 이용하면 어떨까 등등 본질과는 한참 거리가 먼 핑계나 댄다.

통장에는 돈이 얼마나 있는지 이참에 정리해 봤다. 내 수입에 비추어 많은 돈이 있다. 이 역시 안식년 때 쓰라고 가족과 신자들이 모아 준 돈이다. 주님은 이것도 다 내놓으란다. 망설여진다.

내놓기에 앞서 이것 역시 받아도 되는 거였던가. 세상에서 오가는 갖가지 봉투들에 대해서는 손가락질 하다가 막상 내가 받을 때는 별 원칙 없이 받아놓고 ‘좋은 데에 쓰지’ 한다. ‘필요한데 유용하게 쓰겠다’하며 옹색한 변명이나 한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임을 알면서도 내놓기 싫은 거다. 언제 재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처럼 우울해진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게 재물만일까. 과연 내가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가능했을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그 이름에 매이지 않으시고 ‘사람의 아들’로 사셨는데 나는 어떤가. 나는 주위로부터 신부라고 이런저런 대접을 받는다. 그런 대접에 익숙해져 당연시한다. 나도 모르게 내 쪽에서 그런 대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사제라는 이름을 움켜쥐고 있는 거다. 버려야 할 게 참 많다. 부끄럽다.

▶ 김영욱 요셉 신부
  | 10.10
450 15.6%
애착을 버려야 보이는 하느님 나라

찬미 예수님!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떠안고 살아갑니다. 내 것으로 생각하는 재물들과 그것만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하는 많은 물질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재물들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에 매여서 그 재물들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지는 않나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일생을 그 재물들을 주워 담느라고 허리가 휘고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재물이 우리를 소유하고 있는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르십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진 것을 팔라고 하십니다. 팔아서 하늘나라의 보물을 사라고 하십니다. 하늘나라의 보물은 밭에 묻힌 보물(마태 13,44)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못하고 또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또 가끔은 속아서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가짜 보물, 즉 사이비, 이단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그 보물을 우리가 얻기 위해서는 그 보물이 묻혀있는 땅을 사야 합니다. 그 땅이란 바로 씨, 즉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질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곧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허황된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밭에 숨겨진 보물처럼 나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또한“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소유한 재물 하나하나에는 애착이 붙어있습니다. 그 애착은 무서운 기세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나갑니다. 그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예수님의 그 사랑의 길을 기꺼이 따라 나설 수가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재물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악이 아닙니다. 그 재물에 마음을 다 줘버리는 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재물을 품고 있는 그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가진 것을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마음, 즉 하느님을 위해 나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마음, 곧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를 깨닫는 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지혜 7,11)입니다.

인천교구 한태경 바오로 신부
  | 10.12
450 15.6%
[인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진지하게 여쭙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지상에서 보통 100년을 살다가 죽어지는 그런 목숨이 잘 먹고 잘 살자고 예수님께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 무엇하러 ‘영원한 생명’을 묻습니까? 도대체 ‘영원한 생명’이 무엇이기에 말입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 10년이면 되겠습니까? 한 100년쯤? 혹 1,000년쯤?
혹시 불교에서 말하는 억겁의 시간이?
죽은 나무에게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꽃을 피우는 것이 쉬울까?
스러져 한 줌 흙이 되는 것이 쉬울까?

죽은 나무에게 아무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도 죽은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은 나무의 겉을 물감과 페인트로 칠하여 살아있는 나무처럼 그릴 수 있고, 또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꽃을 달아 예쁘게 꾸밀 수도 있습니다. 보는 사람들이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죽은 나무를 살아있는 나무로 보이게 하려고 겉을 꾸민 것이지 죽은 나무가 살아서 꽃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드는 것(구원되는 것)이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음을 안다면, 인생으로 주어진 100년이 ‘찰나’와 같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영원’이란 무한정 길게 늘어진 시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제정신이 들어 자기에게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게 할 능력이 없음을 알아본다면,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음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죽은 나무에 꽃이 피게 만드는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찾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집니다. 자기를 믿고 의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믿음’은 자기를 믿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고, ‘따름’은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런 삶을 받아들이기 쉽겠습니까?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이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 인천교구 송재훈 마르코 신부
  | 10.09
450 15.6%
[인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한 초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는 줄 것이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준다’의 미래형은 ‘나는 받는다’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무언가를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만 집중하지는 않았을까요? 바로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풍요로운 사랑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원인은 내 안에서 울리는 작은 외침 때문입니다. 내 것을 더 가져야 한다고, 내 것을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등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쉽게 갖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있는 이 작은 외침은 결코 만족을 모른다는 겁니다. 무언가를 계속 갖고 싶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이 여기서 등장하지요. 사랑이 어려워지고, 행복해지기도 힘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은 주님께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

이에 주님께서는 십계명을 말씀하시지요. 그러자 부자 청년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냥 허언이 아니었는지, 주님께서도 부자 청년이 열심히 살아왔음을 인정하시듯 사랑스럽게 바라보십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면을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그는 올바른 청년이었지만 자신의 재산을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결국, 울상이 되어 주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지혜서의 저자 역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지혜 7,8-9)

주님과 함께하는 지혜야말로 세상 어떤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까지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주님께서는 딱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주님이십니다.(히브 4,12 참조) 그러므로 이제 세상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는 데 집중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꿔서 쓰면 욕심을 빼면 뺄수록 행복은 자꾸 더하기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을 빼면 뺄수록, 분명히 주님을 따르면서 더해지는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울상이 되어서 주님 곁을 떠나는 부자 청년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기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평화신문 2018년 10월 14일
  | 10.11
450 15.6%
[인천] 성경과 가난한 사람들

누구나 삶에 대한 열망이 있다. 신앙인에게 궁극적 삶의 멸망은 영생을 얻는 것,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서는 것 일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계명을 열심히 지켜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다. 나눔의 실천이었다. 그가 요즘 어떤 부자들처럼 비영리재단을 세우거나 기부를 통해 가진 것을 나눴더라면, 혹은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프랑스어로 ‘귀족은 그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실천 할 마음이 있었다면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재물을 소유했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도가난한 사람에 대한 연빈도 없었다. 이어서 제자들도 놀랄 만큼 단도직입적 선언을 하신다. 그렇다면 가난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는가?

성경 이 말 하 는 가난은 두 가지이다. 구약성경에는 가난을 지속적이고 고통스런 악으로 간주하는 표현이 많이 있 다. 특히 예언자들은 일체의 사치와 낭비, 빈민들을 생겨나게 하는 모든 여건을 단죄(이사야 3,14 / 호세아 1 2 , 8 / 미가 3 , 9-11) 할뿐 아니라 가난의 고착을 방지하는 구체적 지침도 제시하고 있다(레위기 23 , 22 / 신명기 24,19-21). 이렇게 볼 때 물질적 가난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가난을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은 ‘아나윔’이라는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다. 기원전 7세기경 스바니아 시대부터 메시아의 구속 사업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가난한 자(아나윔)’ 라고 불렀는데 (스바 3,12) 이때부터 가난한 자라는 용어가 정신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정신적 가난이 하느님께 가는 선행조건이라는 것이다. 시편도 이 종교적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주님을 아는 자들은 그이를 찾는 자들이고(9,11;34,22) 의로운 이며 완전한 이요 성실한 이들(37,16-18.28)임을 천명하며 가난한 자들을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으로 드높인다. 이 가난은 물질적 의미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의 겸 손, 복종, 헌신하는 정신적 순박함을 뜻한다. 마태오 복음도 산상설교를 통해 주님의 처분에 자신을 온 전히 바치는 심성으로서의 정신적 가난을 강조했다.

성경에서는 물질적 가난을 바람직한 상태로 보지 않았다. 더 나아가 타인을 착취해서 부자가 되거나 겸손하지 않고 오만한 사람은 하느님나라와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자신을 비우고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때 정신적 순박함으로서의 가난이 성취된다. 하느님의 역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상대의 물질적 대박을 기원해 주고, 법정 스님이 입적한 날 그의 <무소유>가 최고 경매가를 갱신하는 아이러니한 자본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재물과 정신적 순박함으로서의 가난에 대해 깊 이 생 각해 보면 좋겠다. 가져서 누리는 기쁨 보다 나누고 베푸는 기쁨이 아직은 우리에게 더 크지 않은가.

▦ 인천교구 홍현웅 바오로 신부 : 2018년 10월 14일
  | 10.12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원] 진정한 권위는 봉사와 사랑에서 
!   [광주]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봉사하는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   [부산]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   [인천] 그리스도교적 모든 권위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봉사적 권위이다. 
!   [서울]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청원  [1]
703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섬기러왔다]  1528
702   [부산] 공수래 공수거  [5] 2338
701   [수도회] 자기 해방의 여정  [5] 1970
700   [수원] 안다는 것과 실천하는 것  [5] 2214
699   [대구] 내 깡통  [3] 2114
698   [군종] 부자와 하느님 나라  41
697   [서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6] 2138
696   [의정부] 소유와 나눔  [4] 2245
695   [안동] 부족한 것 하나  [2] 1077
694   [마산] 나눔의 훈련을 하자  [4] 1934
  [인천] 거지는 ‘하느님의 배려’  [5] 2199
692   [전주] 영원한 생명  [2] 2138
691   [광주] 우리의 봉헌은 떳떳한가. 그러면 무엇이 내 것입니까.  [1] 61
690   [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4] 2346
689   [원주] 영적법칙  [1] 69
688   [대전] 그 놈의 돈이 뭐길래  [3] 2439
687   [청주] 부족한 한 가지  83
686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4] 1570
685   [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1] 660
684   [원주] 휴가증  71
683   [부산] 창조 사업을 함께 하는 남녀  [5] 2194
682   [인천] 나비는 가비야운 것이 미(美)다.  [6] 2373
681   [서울] 남자의 감격  [6] 4363
680   [대구]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고  [1] 2219
679   [마산] 기도의 보루(堡壘)로 진을 치자  [4] 2272
678   [안동] 사랑의 공동체 가정  [2] 2068
677   [수원] 하느님 안에서의 사랑의 완성  [4] 2464
676   [광주] 혼인은 새로운 탄생  [1] 2174
675   [전주]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에 맺어준 사건, 혼인  [2] 88
674   [대전] 어린애 하나를 더 낳아 나눠 갖게  [2] 2234
673   [군종] 4주간의 탐색기간을 드리겠습니다  1934
672   [춘천] 최고의 기적  [2] 2369
671   [의정부] 둘이 하나가 되는 사랑  [3] 107
670   (녹) 연중 제27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3] 1656
669   [부산]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단  [2] 1822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