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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나눔 + 버림 = 영원한 생명
조회수 | 2,360
작성일 | 06.10.13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무엇', 오늘 복음 속 젊은이의 재물과 같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 그래서 묻어 두고만 싶은 비밀과 같습니다.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간직하려다 보니 '늘어나는 재물'과 같습니다. 결국 포기 못한 채 끙끙 짊어지고 가는 삶이 애처롭게 보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마르 10,21).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돈이 많아서 베풀지 못하고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변해가는 사람들…. 그들은 비록 그 돈으로, 그 권력으로, 크고 화려한 낙타를 살 수 있지만, 그러나 하늘나라의 바늘귀를 넓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누구나 있습니다. 부족한 점, 못난 점, 때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들…. 오늘 주님 앞에선 우리들의 부끄러운 멍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얼마나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무엇이 우리들에게는 버리지 못하는 재물입니까? 무엇이 주님과 바꿀 수 없는 나의 자존심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감추어둔 '나의 비밀'입니까? 주님은 알고 계신데, 이미 다 알고 계신데,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부요하셨지만 가난하게 되신 분,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 우리도 그런 주님을 따라 나눔으로써 부요해지는,  버리고 떠남으로써 영원해지는 생명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때문이라면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춘천교구 원용훈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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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울고 웃는 ‘나눔의 기적’

인생은 고역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욥 7, 1~3)

구약의 욥과 같이 고통의 긴긴 밤들을 기약 없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아직도 도처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지 않는다면 하느님 진노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웃들에 대한 예수님의 측은지심 마음을 본받지 않으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같은 신앙은 거짓된 신앙일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나눔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하느님 사랑의 배려일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성당이 자신들의 관할 구역의 가난한 이들을 진실로 돌본다면 세상은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분명 나눔의 삶을 실천해야 하고 나눌 때 기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목자들과 교우들이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듭 가르쳐 주시고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 향한 믿음만 있다면 가능할 수 있는 일인데, 우리의 부족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너무 큰 집착과 미련이 나눌 수 없도록 만들어,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구원의 기회가 왔는데도 잃어버리는 불행을 자초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 27)

그렇습니다. 누구나 나눌 수 있고 나눔이 있을 때 기적은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 같은 실천이 있을 때, 신앙과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지난 5월 2일 일간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얼굴이 달아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문 기사의 제목이 ‘종교계 베푸는 삶, 인색하다’였습니다. 기사의 내용인즉, 2003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그해 대한민국 전체 종교계가 사회사업 및 복지 시설 등에 쓴 금액이 총 590억원 이었습니다.

한국을 ‘종교 박람회장’이라고 하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가 그야말로 성업(?)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같은 금액이면, 그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분이 실지 신의 분노를 피하기 어려울듯 싶습니다.

그중 천주교가 1위로 47.3%인 279억원을 썼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개신교가 28,7%인 170억원을, 다음은 불교가 16,5%인 97억원을, 그리고 기타 종교계가 1.5%인 9억원을 썼습니다.

천주교가 1위라고는 하지만 그 금액 역시 한국 천주교회의 양적 성장의 수치에 비교하면 얼굴 부끄러운 금액인 것입니다. 더욱 많은 나눔이 없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불가능의 천국을 지향하며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감자탕 교회를 아십니까?

서울 강북 수락산 기슭에 위치한 ‘광염교회’는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모든 교우들은 이 교회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감자탕 교회로 불리게 된 것은 5층 짜리 상가 건물에 1층에는 감자탕 집이 있고 교회는 3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옥상에 매달린 감자탕 집 간판은 크고 교회 간판은 너무 작아 멀리서 보면 ‘감자탕’이라는 글자만 눈에 띄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의 상가에 세들어 사는 이 교회가 교우들에게는 천국을 맛보며 살게 해주고, 세상에는 천국의 기쁨을 나누며 산다고 합니다.

이 교회 교우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사랑이 넘치는 교회’, ‘천국을 경험하고 확장하는 교회’, ‘주일이 기다려지는 교회’, ‘우는 이와 함께 울고 웃는 이와 함께 웃는 교회’, ‘교회재정을 100만원만 남기고 집행하는 교회’, ‘절기헌금 전액을 구제비로 집행하는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절대 예배당을 짓지 않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해마다 5천만원이 넘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재정의 30% 이상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살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작은 예배당에서 2002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에 지출한 내용을 살펴보면, 캄보디아 광염대학 건립지원 5천만원, 장학생 지원 3천만원, 광염학사 건립지원 3천만원, 설날 불우 이웃 사랑의 과일 700박스 전달, 북한동포돕기 쌀4톤 지원, 중국 광염관 정미소 건축에 1500만원 지원, 두 달간의 복지지원 총액이 2억원 이었습니다.

나눌 때 분명 기적은 일어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믿음과 용기가 없기 때문이며, 내 본당, 우리 신자들에게만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나눔이 없을 때,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가실 것입니다.

▶ 배광하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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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은 구원의 은총이다

젊은 시절, 기발한 착상이라도 한 듯이나는 어느 노(老) 사제에게 넌지시 말씀을 드렸다. “신부님! 요즘 같은 세상에 죄를 짓지 않으려면 식물인간이 되어야 할까 봐요. 모든 것이 죄의 유혹이니 그렇게 되면 선하게 삶을 마칠 수 있지 않겠어요?” 노(老) 사제는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죄는 짓지 않겠지만 덕(德)이 없잖아! 천국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라 덕이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야!” 미처 몰랐다. 죄를 피하는 것만이 지혜인줄 알았는데….

오늘 복음 속에 등장하는 부자(富者)도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듯하다. 모든 계명을 잘지켜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재산도 있고, 스스로 의롭고 선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도 들고…. 예수님께 칭찬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던진다. 이 부자도 나처럼 죄를 짓지 않음이 곧 선함이라는 식물인간 논리에 빠진 듯하다.

요즘 우리 주변에 그럭저럭 잘 사는 사람이 옛날보다는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부자인 듯 보여 “당신 부자지요?” 라고 물으면 하나같이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친다.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거나, 자칫하면 재산에 손실이 발생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일 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부자일까? 매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기도하면서 그날 먹을 양식 이상이 있으면부자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큰부자다. 우선 일용할 양식 걱정은 없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부자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를 빗대어 구원이 불가능한 부자를 언급했지만 그 부자의 핵심은 나누지 못하고,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틀어 지적하는 말씀이다.

심리학자 황상민교수의 「한국인의 심리코드」에서 분류해 놓은 부자를 보면 재미있다. 1)배고픈 부자 2)철없는 부자 3)품격 부자 4)보헤미안 부자 5)존경받는 부자 6)나쁜 부자. 나쁜 부자에게 붙여지는 단어들은 비호감, 나쁜 가족관계, 불법, 졸부, 구두쇠, 과소비, 몰가치, 사회적 책임감 결여, 개인적인 탐욕 등이 따라온다.

나는 오래전 존경받는 한 부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굴지의 회사 사장인 그가 시골 본당에 다니러 왔을 때다. 그는 자신의 좋은 외제차를 마다하고 굳이 덜거덕거리는 내 차를 타고 구경을 가겠다며 동승했다. 돌아갈 때는, 본당에서 건물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왜 자기한테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느냐며 자신이 지금은 여유가 없지만 곧 돈을 조금 보내주겠다며 약속을 하고, 두번에 걸쳐 큰 도움을 준 부자였다.

글자 그대로 부(富)는 악이 아니다. 부는 선을 행할 기회이며, 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거부할 때 나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에는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은 없다고 한다. 나눌 수 있다는 풍요로움을 느끼는 부자라면 구원의 희망이 있을 것이다.

춘천교구 송병철 신부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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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주먹 쥐고 달리다가 자빠지면 안 펼 재간이 없다.

부자는 설사 낙타가 통과할 만큼 큰 바늘을 만들 수 있을지라도 자기가 빠져나갈 만큼 큰 바늘은 만들지 못합니다. 욕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문지상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이 자주 회자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라 하더라도 죽을 때는 입안에 솜 물고 갑니다. 욕심은 짠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고, 제 손 안에 든 음식도 주먹을 펴야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과 집착 을 버려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1서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 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테오 1서 6,7-9) 라고 말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영적 권고에서 “물질에서의 가난”은 가난의 한 측면이며, 예수님은 완전한 자아포기, 존경과 인정받을 권리의 포기 같은 “영적 가난”을 통하여 죄를 이기셨으며 순명이라는 가난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고 당신 나라를 세우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의 자애심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의 소유욕과 권리주장에서 파생되는 모든 영역에서의 포기입니다. 그리하여 참 가난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만 이루어지도록 자기의 뜻은 조용히 접어둡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에서 상처받고 화를 내는 것은 좋은 대우와 특별한 배려와 인정, 존경과 주목에 대한 기대에서 비롯되는데 이 모두를 마치 자기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 과제가 아니라 오히려 부당한 그 일을 조용하고도 평온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가난에서 우러나오는 힘입니다.”

춘천의 한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쓴
” 예쁜 손” 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엄지손가락을 힘껏 펴면/
나는 짱이야 주먹을 꽉 쥐고/ 검지 손가락을 펴/
내 볼에 찍으면 /
난 예뻐 주먹을 꽉 쥐고/
검지와 중지를 쭉 피면/
난 인기쟁이 주먹을 꽉 쥐고/
새끼손가락을 귀엽게 펴면/
나랑 약속해.
( “예쁜 손” , 어린이 강원일보 2010. 9. 2)

주먹을 쥐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만 주먹을 펴기 위해서는 큰 힘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 저 한 손가락만 펴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먹 쥐고 달리다가 자빠지면 안 펼 재간이 없습니다.

► 춘천교구 김재복 모세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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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하찮은 물건 하나 버리지 못하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 하십니다. 재물의 탐욕에 빠져 살면 그 사람은 하느님을 잃고 영혼까지도 잃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애용하던 하찮은 물건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매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입니다. 가진 것이 더 값진 것들이면 더 애착이 가기 마련인데, 그런 것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버리지 못하는 옷가지 하나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것입니다. 물욕에 빠지면 이렇게 헤어나지 못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신 그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있는 사람이 더 구두쇠가 된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가진 만큼 거기에 그만큼 애착을 갖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나 그토록 목숨을 걸고 움켜쥐었던 것들도 주님이 부르시면 한 순간에 놓아야 합니다. 모든 시간은 주님이 오라고 부르시는 그 길을 향해 빈틈없이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마르 8,36) 하십니다. 재물은 주님께로 나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유익하게 사용되어야 할 도구이지 목숨을 걸어야 할 목적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가르침 입니다. 재물에 방향을 맞추어 살면 오히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가로 막는 큰 장애가 되고 맙니다.

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하시는 또 다른 말씀도 기억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하느님 자녀답게 사는 길은 재물이 우선이 아니라 늘상 생명과 재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받은 재물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물질이든 영적인 재능이든 주님께 받은 것들임을 항상 기억하며 주님의 뜻에 합당한 도구로 쓰여졌을 때에 비로소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춘천교구 임헌규 안셀모 신부 : 2018년 10월 14일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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