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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공수래 공수거
조회수 | 2,353
작성일 | 06.10.14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참된 ‘부’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포기할 줄 알고 또 끊어버릴 마음을 갖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 버리고 놓아 버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 청년의 낙담하고 풀이 죽은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청년은 한마디로 반듯하게 살아왔던 사람이었으리라. 하느님의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왔고, 그래서 그는 충분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고, 주님께서도 그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던 것이다(마르 10,21).

그러나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 청년에게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에서 그는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소유한 스러져버릴 지상의 재물로부터 비롯되는 치명적 위험에 처해 있는 청년을 우리는 지금 바라보고 있다. 부자였던 젊은이, 그가 기대어 살아왔던 물질적 재화에 대한 애착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 자체이신 그 유일하고도 참된 선을 온전하게 추구하는 것을 방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 첫 자리에 놓으라는 제1계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재물이 그 청년에게는 하느님이었고, 그가 쌓아 온 물질적 재화야말로 그의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고 보루였기에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는 복음에서 만난 부자청년이 되기를 은근히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돈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거의 없는 우리 사는 세상에서,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바로 우리가 아니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며...

주님께서 지금 그리고 여기의 우리에게 준엄히 하나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신다. ‘끊어버림’은 당신을 따르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라고 말씀하신다. 신기루같은 세상의 재물에서 온전히 자유롭기는 힘들 테지만, 공수래 공수거의 지상 소풍에서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기적을 바라는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워 지도록 기도하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아멘.

부산교구 정승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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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는 이와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구약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도 더 큰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준 다음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이 많았던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에 울상이 되어 떠나가 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가 울상이 되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어놓을 수 없음’ 때문이었고, 내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아야 한다고 말씀하실까?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함은 단순히 죽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유에서의 떠남’을 요구하신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서 신앙의 성조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것, 자신이 누리던 특권, 자신에게 익숙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떠남’과 하느님을 향한 ‘투신’이 있었기에 신앙의 성조가 되었고, 아브라함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이 세상에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기에 ‘소유’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전적인 투신’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고,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는 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재물, 내가 가진 안락함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방해가 되는 것, 나를 울상 짓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시작이며, 영원한 생명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 강헌철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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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지난 연중 제27주일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혼인에 관한 논쟁을 벌이신 예수께서는 "이혼(離婚)"은 없고 오직 "혼인(婚姻)"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천명하시고 난 뒤 바로 사람들이 데려온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16) 예수께서 일을 마치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시려 할 때, 느닷없이 어떤 사람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려 하면서 필자가 지난 복음의 내용을 서두에 언급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느님이 맺어주신 신성한 혼인과 이로 인해 형성된 가정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이유나 장치에 의해서 해체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부부의 사랑이 낳은 어린아이들을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울러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지상 최대의 임무가 바로 부모와 아이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데려가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예수께서 먼저 -유다인들이 인정하든 않든- 수난과 부활로 닫혀진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자신이 열려진 문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문제는 세상의 모든 가족들이 어떻게 하늘의 문을 통과하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가 오늘 느닷없이 달려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생(永生)의 방법을 청하는 사람의 머리를 가득 채웠던 것이다.

오늘 길가는 예수를 붙들고 영생의 길을 청하는 사람은 재산이 많은 부자였고, 그에게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어릴 적부터 십계명의 모든 것을 잘 지켜왔다고 하니 틀림없이 율법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걱정 없이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왜 사생결단의 자세로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묻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가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러나 부자의 기대 밖이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오너라."(21절)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한다. 이 부자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정녕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길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를 따르는 길밖에 없는 것인가? 그때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자기만, 또는 가족의 영생을 얻겠다고 집안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성당이나 교회 일에 정신없는 자매나 형제신자가 있다고 치자. 꼭 이래야만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인가? 한 가정의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줘버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자. 오늘날 예수님이 어디 계시기에 베드로와 11제자들처럼 그분을 따라나서겠는가? 그렇다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오늘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신흥종교들이 종용하는 것처럼- 나설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계시며, 그분의 가르침 안에 계신다.

예수께서 당시 부자나 12제자들에게 요구한 추종의 모양을 똑같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길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길은 많지만 그 뜻 같다는 것이다. 재물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추종과 영생의 길에 그만큼 방해가 된다는 것이며, 행한 만큼의 보상은 분명히 주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것이다.

▶ 박상대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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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는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는 것과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기억과 믿음과 실천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읽는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고 실천한 바를 알아듣고, 우리도 우리 삶의 여건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여건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것과 다르기에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반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듯이” 시대가 다르면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신앙과 관련된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한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바리사이파 율사로 활동하다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바울로 사도는 후에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겼습니다.”(3,8).

오늘 복음은 그 청년이 부자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재물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는 오늘의 복음에서 베드로가 할 고백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복음서들 안에 재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재물의 유혹과...욕심이 밀고 들어오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4,19)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6,24)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는 경지로 우리를 쉽게 몰고 갑니다. 진지한 모든 종교가 어느 수준의 무소유(無所有)를 권장합니다. 재물이 발산하는 현란한 빛은 인간을 쉽게 무분별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이는데, 많은 것, 특히 값비싼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한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이에게 가진 것 모두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이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하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은 권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쉽게 나누어 줍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데에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재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혹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힘을 주시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택한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때때로 하느님 앞에 눈감고 앉아서 반성해 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삶의 궤도를 수정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에게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 말을 고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선하십니다. 우리 안에도 선한 것이 보이고, 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말하는 길거리 선교사들이 알리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주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실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 서공석 신부
  |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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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한 사회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뒤떨어지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무엇이 부족하며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일어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마르10, 17∼30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계명을 소개하셨고, 그 청년은 그런 계명은 어릴 때부터 잘 지켜왔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셨습니다. 신앙의 삶에 자신감이 있던 청년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겨왔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나, 이 구원된 생명은 현실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사랑을 실행하는 삶을 통하여 드러나야 함을 깨우쳐 주십니다.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던 젊은이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는 삶을 뛰어넘어 하늘나라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사랑의 삶을 선택하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나의 모든 것 안에는 항상 남의 몫이 함께 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언제나 하늘나라의 가치를 모든 것 위에 두고 정의와 사랑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세상의 왕권이나 재산이나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솔로몬은 지혜를 선택함으로써 그 밖의 모든 것도 덤으로 얻었다고 지혜서는 전합니다.(지혜 7, 7이하)

우리 삶 속에서 살아계시는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뜻을 찾고 주님과 함께 그 뜻을 구현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좀 더 적극적인 삶을 추천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총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이 세상에 구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자신만의 안전을 위하여 쳐 놓은 울타리를 넘어서 하느님의 사랑과 질서를 이웃과 이 사회 속에 실현해나가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고 있음을 생각해 봅시다.

부산교구 이찬우 신부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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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에게 부족한 그것은?

오늘 복음 말씀에서 어려서부터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켰고 재물까지 많이 가진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은 대견해 하시면서도“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 21)고 하시자, 부자 청년은“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마르 10, 22)고 전합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남보다 더 잘 살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영원한 생명’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습니다. 사실 부자 청년은 계명은 잘 지키고 있지만 마지막 선택은 하느님 보다는 재물이라는 우상에 있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외형적으로는 계명을 다 지키고 사는 것 같은데, 어떤 것은 꽉 움켜쥔 채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을 외면하는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모습은 아닐까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 목적을 향해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재산이나 금전 문제로 동료, 형제자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하고, 썩어 없어질 육신을 챙기기 위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투자하여 온갖 약과 음식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당연하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천주교 신자가‘나는 가족을 챙기고 주일미사 잘 지키고, 봉사, 피정이나 신앙 강좌, 각종 기도회, 제 단체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고, 교무금, 헌금 잘 내는데, 이 정도면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면서“더 이상 내가 할 것이 뭐가 있나요?”하고 예수님께 묻는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잘 하고 있구나. ○○○야! 그러나 너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다. □□□을 하고 나를 따라라!”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못 들은 척 외면하거나, 맞는 말씀이지만‘그건 아니 되옵니다.’하고 도망치듯 주님을 떠나는 부자 청년과 같은 어리석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택해야 하고, 그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지혜롭게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 13)는 말씀처럼 신앙인의 삶은 주님을 따르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나의 부족한 하나’는 무엇인지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이 땅 위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참 행복’의 귀한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아멘.

► 부산교구 박재구 신부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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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891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80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56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8
689   [부산] 참된 봉헌  [5] 2461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9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700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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