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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조회수 | 2,161
작성일 | 06.10.2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리고에서 소경 한 사람을 눈뜨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들이 기적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우리도 기적을 찾아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기적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 놀라운 은혜로움을 체험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체험을 회상하여 기적 이야기들 안에 담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소경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분이며, 신앙인들은 그분의 뒤를 따라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우리가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을 회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서, 그분들이 남긴 말씀과 하신 일에 감사하기도 하고, 우리도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다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부모나 선생님에 대한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이 하느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그들 안에도 살아있게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는 초기 신앙인들이 하느님에 대해 믿던 바와 그들의 실천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걸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 곧 구원자를 뜻합니다. 그들은 다윗의 자손에게서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바치던 기도입니다. 루가복음서에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한”(18,9-14)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입니다. 바리사이는 기도에서 자기가 지키고 바친 일들을 나열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었습니다. 세리의 기도가 참되다는 결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며 빌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하느님과의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흘러들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를 비는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청하는 소경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너의 간청이 간절하기에 고쳐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자기 안에 일하시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시면, 우리도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장애가 생겼을 때, 그것을 치워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게 해 주고, 수험생을 입학시켜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주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초능력을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인간이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내세에서 만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결국 인간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 미래를 위한 불안을 해소해 주는 하느님입니다.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발생하는 종교적 언어들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서 우리의 염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그분의 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함께 계시고 내세에도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하느님으로 열린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소경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열리는 넓은 세상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듣고 그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으로 열리는 넓은 세상에서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예리고의 소경은 예수님에게 자비를 간청하였더니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그 자비의 눈으로 보고 행동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자비의 눈으로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오늘의 소경은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자비를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도 제지하는 목소리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 밖에서 들립니다. “자비는 소용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따끔한 변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비를 실천하면 손해만 본다.” 우리 안에서도 밖에서도 들리는 자비를 제지하는 소리들입니다. 신앙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서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든 이에게 또 언제나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자비의 지평은 우리가 사는 지평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서 움직이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소경과 같이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야 합니다. 그 자비를 부르고 외치면서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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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도 오늘의 바르티매오가 되어 보자

‘아름다운 향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예리코는 장미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워도 볼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눈먼 거지인 바르티매오가 겪는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예리코를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하고 큰소리로 외쳐 부른다.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이사야 35, 5)을 믿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도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라’ 하신다. 그 분이 당신을 부르시니 용기를 내어 일어나라는 사람들의 말에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간다. 그에게 겉옷은 암울했던 자신의 인생을 버티게 해줬던 버팀목이다. 그랬던 그 겉옷을 과감히 벗어 던진다는 것은 도무지 자신을 돌아볼 여력조차 없이 살아왔던 생각의 때를 벗기고, 불쌍한 처지로 그렇게 오랜 세월 살다보니 차라리 그게 능력이 되어 굳게 닫혀버린 마음의 빗장을 과감히 열어 보이는 것 다름 아니다. 바로 그 때, 그는 눈을 뜨게 되고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 대목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어 봄이 어떨까. 우리 : “선생님께서는 그에게로 가시는 대신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왜 눈 먼 사람에게 오라고 하셨습니까?” 예수님 : “그가 나를 불렀고 나도 그를 불렀다. 일을 그렇게 해야 ‘내가 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 :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예수님 : “그렇다. 그러나 그건 내 쪽에서 할 말이다. 바르티매오가 스스로 ‘내 믿음이 나를 살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 : “물론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마땅히 ‘주께서 저를 살리셨다’고 말해야겠지요.” 예수님 : “그런데 참 많은 사람들이 말을 뒤바꿔 하면서 살고 있구나.”('예수에게 도를 묻다' 이현주)

그렇다. 믿음에로 이끄는 분은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자비를 청하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자리에서 이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많은 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이제 그는 구걸하기를 그만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서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를 묶어놓는 생활습관이나 행동양식, 그리고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자, 이제 우리도 오늘의 바르티매오가 되어 보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 김성규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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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찬미예수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이가 어떻게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한마디의 말을 듣고서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향해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이 사람은 예전처럼 다시 보고 싶은 애태움 속에서도 듣는 것에 더 많이 익숙해져 있었나 봅니다.

다시 말해 보고자하는 움직임 가운데 들려지는 것을 듣는 고요함에 길들여져 있다고나 할까요. 바로 이러한 자기의 자리에서 소리 없는 소리로써 지나가시는 예수님과 상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꾸짖음에도 그의 마음자리는 분명했습니다.(48절) 깊은 밤 스치는 가을 바람소리에도 곡식이 영근다는 이치를 말입니다. 즉 군중들의 비위를 거스른 듯 하면서도 그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그 마음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준비의 자리가 “그를 불러오너라”(49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들 자격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예수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근거로써 겉옷을 벗어 던질 수 있었고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50절)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겉옷을 벗어 놓은 자리가 바로 넘어졌다 일어난 자리요 여태껏 인욕으로써 정진해왔던 한 인간의 길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 소경은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하시는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51절)라는 물음 앞에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는 사랑으로 응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다운 말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네 믿음(52절)인 것입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51절)라고 말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보여주시는 말씀으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라고 하심으로써 말씀이 눈이 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을 뜨게 해주시는 행위가 아닌 보이지 않는 것도 보게 되는 혜안을 얻게 해주신 것입니다. 바로 자신이 지금까지 입고 살아왔던 누더기 속에 하늘의 자비가 이미 품어져 있었음을 보게 되는 밝은 눈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기는 가되 자신을 있게 한 그 본래의 길을 따라 나선 것이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52절)

▶ 박갑조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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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며 살아가면서도 또한 많은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관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하여 동일한 것을 달리 보거나 보지 못하는 그늘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만을 보려는 경향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보아야 할 것까지도 보지 않거나, 보지 못하는‘소경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인 예리코에서 만난 소경 바르티매오.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분을 꼭 만나 뵙고 싶었던 이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시자, 겉옷을 챙길 여지도 없이 서둘러 예수님께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믿음으로 자신의 소망을 예수님께 청합니다.“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무런 의심도 없이 예수님께 매달림으로써 구원의 길로 들어선 바르티매오의 믿음은 커다란 신뢰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두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맹목적인 신뢰는 자비를 간청하는 외침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용기를 갖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그 순간, 지금껏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겉옷을 벗어 던집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던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은“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을 뜬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제1독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사제이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오늘 바르티매오가 보여준 믿음과 신뢰를 본받아야 합니다. 비록 허물이 많아 주님 앞에 나올 자격도 없지만, 그분의 자비는 내 허물보다 크기에“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쳐야 합니다. 아집과 교만, 위선의 겉옷을 용기 있게 벗어 버리고, 안주하며 안락을 구걸하던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사고, 마음의 눈이 멀어 보고도 못 본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는 눈을 주십사고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멘.

► 부산교구 심원택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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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르티매오가 청했던 볼 수 있는 삶을 묵상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가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가사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한때 길을 잃었으나 이제 그분이 나를 찾았고 한때 장님이었으나 이제 나 보이네” 성경에서 보지 못함이 죄의 상태를 뜻하고 “다시 보게 되다‘는 회개의 삶을 뜻한다면, 오늘 바르티매오가 청했던 것은 다름 아닌 회개의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회심사건을 통해 눈이 열리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삶을 전환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윤리와 영성생활’수업 때 자주 접했던 은사님의 짧은글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가치를 보느냐가 다르게 행동하도록 도와줍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이글은 우리의구체적인 ‘행동’과 세상을 바라 보는‘시각’,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작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행동이 그냥 나온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정체성이 숨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자각 때문에 세상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볼 수 있는 삶을 청했듯이 우리도 먼저 주님의 뜻에 맞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시선으로 세상을 다르게 보려면 먼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합니다. 그 분이 나에게 누구이신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구원자, 그리스도,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신 분”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보여주신 그분 덕분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가치를 다르게 보는 눈이 열렸고, 복음의 가치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판단하기에, 그 분의 뜻을 먼저 행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이 번 한 주간을 지내시면서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의 기쁨 때문에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한 주간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만나는 이웃 사람들과 공동체 안에서 주님을 만나 뵙고, 그분이 의롭게 여기는 일을 먼저 실천하는 한 주간이 이시길 기원합니다.

▦ 부산교구 최성욱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2018년 10월 28일
  |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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