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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우리가 청해야할 신앙의 빛
조회수 | 2,468
작성일 | 06.10.27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의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지”로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즉 바르티매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제1독서: 예레 31,7-9: 소경과 절름발이가 위로 받으며 돌아오리라

1독서에서 예레미아 예언자는 바빌론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돌아오리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기적에는 또 다른 기적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능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이 구원사건에 포함하고 있다. “소경, 절름발이, 아기 가진 여자, 아기 업은 여자도 섞여...”(8절). 하느님께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기적을 통해서 완전히 새롭게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 이 기적은 자연적 능력이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상황의 “새로운 변화”이다.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주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자비를 드러내신다. 그래서 예레미아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큰아들이다”(9절). 즉 기적이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표징이다.

복음: 마르 10,46-52: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복음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맹인의 치유사화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 치유사화는 마태오 복음(20,29-34)과 루가 복음(18,35-43)에도 나타나는데 모두가 수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수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맥락은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찾는 장면을 시작으로(마르 8,22-26),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과 예수께서 수난에 대한 예고를 하셨을 때 베드로가 펄쩍 뛰는 장면을(8,31-33) 생각할 수 있다. 신앙의 절정 상태에 있던 베드로조차 하느님의 계획에는 눈이 멀려고 한다. 하느님의 계획들은 결코 어떤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빛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치 베싸이다의 소경이 서서히 시력을 회복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복음을 보자.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께 절규에 가까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눈이 멂”으로 당하는 비극적 현실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자기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전 생애를 거쳐 그 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이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난다. 그의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시고,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2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소경은 어떻게 하는가? 그 소경은 눈을 뜨자마자 “예수를 따라 나섰다”(52절). 이것은 “믿음”이 그의 눈을 열어주어 그리스도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분을 따라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보는 데만 호기심이 있고 그 수난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군중들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세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메시아라는 명칭을 거절하지 않으신다.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도 받아들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되어야 할 목적지에 도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시아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유다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의미의 메시아는 아니셨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치유된 소경 바르티매오가 한 것처럼 바로 그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바르티매오의 치유는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징표일 뿐이다. 믿음은 그 소경의 경우, 예수의 중재역할로 그를 낫게 하여 구원하였듯이 우리를 예수님과 결합시켜 그분이 가신 희생의 길을 따라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된 치유를 베풀어주고 또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해준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p. 125-126).

제2독서: 히브 5,1-6: 너는 멜키세덱의 사제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2독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구약의 사제직을 무한히 초월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희생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구약의 대사제는 여러 번 그리고 백성들과 자기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의 제물을 봉헌했지만(3절),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에 단 한번 희생제물을 바치셨지만 완전한 제물을 봉헌하신 것이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형제들을 위해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희생적 ‘의지’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히브 10,10).

여기에 나오는 ‘멜키세덱의 법통을 이은’(6절)이라는 것도 그가 창세기에 나오는 신비스러운 왕이며 사제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척도는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절대적인 ‘새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희생에 이르는 그 길을 따르기 위해서는 예리고의 맹인 바르티매오와 같은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당신의 신비를 깨달아 알아보고, 베드로와 같이 하느님의 뜻에 눈이 멀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신비를 우리의 삶으로 실천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을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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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는 눈

예전에 파리에서 선교 집회가 열렸다. 그때 초라한 옷차림의 시각장애인 한 명이 헌금 바구니에 27프랑을 넣었다. 헌금을 거두기 위해 바구니를 돌리던 헌금위원은 초라한 시각장애인이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토록 많은 돈을 헌금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언젠가 저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1년 동안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 값이 얼마쯤 드는가 하고. 그는 내게 1년 동안 등잔의 기름 값으로 거의 27프랑이 들어간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이 보시다시피 나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기름 값이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등불을 밝히기에 필요한 기름 값을 푼푼이 모아, 육신의 어둠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영혼의 시각장애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주는데 사용하려고 모아둔 돈입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육체적인 눈이 보이지 않아 장애인의 삶을 살지만, 그의 마음과 영혼은 더는 장애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육체적인 장애의 삶을 승화시켜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볼 수 있는 영혼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인이 “인간이란 눈을 뜨면 세상을 보지만 눈을 감으면 하늘을 볼 줄 알아야 된다.” 고 했다. 바로 육체적인 눈과 영혼의 눈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영혼의 눈은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세상 것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돈을 벌기 위해 부릅뜬 눈, 용서하지 못해 증오와 불만이 가득한 눈, 나누지 못하고 자신만 아는 탐욕스러운 눈, 감사함을 알지 못하고 불평불만만이 가득한 눈, 그밖에 교만,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절망과 좌절로 가득한 눈!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했다.

내 마음이 돈을 원한다면 돈만을 바라볼 것이고, 내가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면 미운 사람만 보이며, 또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불만스럽게 보이는 것이 바로 나의 눈이다. 만일 내가 이러한 눈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바르티매오처럼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장 51절) 라고 소리 높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눈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의 눈으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코 10장 47절)

▶ 한기석(마카리오)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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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해소에 들어오는 많은 교우들이 삶의 고통과 아픔을 토로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스스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아픔들이 조금은 풀어지시나 봅니다. 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치유의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실망하며 마냥 슬퍼하고 아파하기만 한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울부짖는 우리들처럼, 오늘 복음의 예리코 소경도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오히려 소경에게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그의 바람을 몰라서 질문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통해, 소경 스스로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바로 알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여, 단지 육신의 눈을 뜨는 것만이 아니라 신앙의 눈까지 뜰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열린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구원해 줄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보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게 됩니다.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은,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처지를 똑바로 바라보고 인식할 때 시작됩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는 시점이 바로 진실한 기도가 시작되는 출발점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기 힘만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것임을 통감하며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백할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기 시작합니다. 꼭 감고 있던 신앙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십자고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인격적으로 만나려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부를 때에 그분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 소경처럼 그렇게 절박하게 예수님을 만날 필요를 느끼는지,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강한 신념이 있는지, 모든 인간적인 체면을 포기하고 주변의 이목마저 개의치 않는 절실함이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진정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만나뵈올 것입니다. 예리코의 소경처럼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데까지 한없이 추락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만물의 주님이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분을 애타게 찾는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손수 우리를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 박현성(레오)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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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자비로운 마음 (능력 따로, 기적 따로)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가 간절하게 외칩니다. 눈이 멀어 구걸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엾은 처지에 있는 자기에게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고 소리칩니다. 예수님이시라면 ‘그깟 눈먼 것’쯤이야 한 방에 고치실 수 있을 것이니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잠시 자기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애원합니다. 잠깐이면 되는 자비이지만 자신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 제발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스승님, 제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살아가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더럽다는 이유로, 싫다는 이유로, 그 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길을 외면한 적이 얼마나 많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한 방에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한 번 도와주면 자꾸 귀찮게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아무튼 미리 짐작부터 한 탓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실 또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나면 절로 걱정이 앞서기 마련이기도 합니다.

저도 몇 번 좋은 마음으로 도움을 주었다가 된통 당한 적이(?) 있거든요.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누구를 돕는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닙니다. 세상은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할 바에는 아예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적당히 자선단체나 사회복지기관에 후원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선행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장 눈앞에 나타나서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청하는 이들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거듭 강조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그 능력이 신적이라고 하더라도 눈먼 이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별로 내세울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은 고사하고 알량하게 가진 것 몇 푼마저 빼앗길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 닮으려고 애쓰면서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그 몇 푼 안 되는 작은 관심이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답니다.

►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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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주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창제한 문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지만 훈맹정음(訓盲正音)은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든 국내 최초‘한글점자’이다 이는 박두성 선생과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가 7년간의 연구 끝에 1926년에 이르러 완성한 것이다. 박두성 선생은 빛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안배우면 마음이 닫히고 세상이 닫힌다.’며 점자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의 눈먼 이에 관한 말씀이다. 눈먼 이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는 온힘을 다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 본래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칭호이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은 오직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간청이기도하다. 그런데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고 하느님으로 보고, 세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은 그저 눈먼 거지라고 무시했지만, 눈먼 이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렸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고, 눈먼 이는 간절히 애원한다.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눈먼 이는 눈을 뜨고 곧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과거의 삶에 붙들지 않고, 즉시 겉옷을 벗어던지며, 벌떡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가난한 거지의 입장에서 겉옷을 던지는 행위는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그 겉옷은 거지에게 있어서 보금자리요, 방패막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다 가진다. 겉옷은 그를 추위로부터 보호해 줄뿐 아니라 행인들이 던지는 물체로부터 몸을 보호 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자선으로 그에게 건네지는 잔돈과 빵 조각 등을 보관해 두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눈먼 이는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곧 바로 그렇게 소중한 겉옷을 헌신짝 버리듯 벗어던졌다. 예리코의 눈먼 거지와 자기 재물을 생각하며 슬픈 표정을 지으며 떠난 간 부자청년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마르10,17-27참조)

‘눈이 먼 거지’라는 상태는 빛이 아니라 어둠의 상태이고, 하느님이 아니시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무지와 완고한 마음, 거짓, 교만, 대충 살아가는 무질서함 때문에 우리는 어두워지고, 점차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인 거지’이며 ‘눈먼 이’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으로 어둠이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길을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씀에서 찾아보자.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1요한 2,11)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1요한 3,14)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결국 “어둠에 싸인 세상을 언제나 밝혀주고 우리에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유일한’ 빛입니다.(복음의 기쁨. 272항 참조) 우리가 이웃에게 도망치고 숨고 나누는 것도 거부하고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다면, 눈은 뜨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눈먼 사람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좋은 것을 바라는데도 하지 못하고 악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로마 7,18-19참조)나도 눈먼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눈먼 이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만 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또한 구언 받은 눈먼 이처럼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10월 28일
  |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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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의견과 믿음의 차이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들은 빅데이터나 과학을 근거로 내려진 합리적인 판단에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첫 인상이나 통찰, 혹은 직관에 의한 판단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랜 연구를 통해 내려진 합리적인 사고가 꼭 다 들어맞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화론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의견이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믿음이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쿠로스 석상이 발견되어 박물관이 구매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조각상을 잠깐 훑어본 두 명의 전문가가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박물관은 이 두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이 석상의 진위여부를 판별하기 위해별도의 팀을 꾸려 14개월간에 걸쳐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의 예상대로 이 유물은 기원전 6세기의 진품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말해왔던 전문가들 때문에 계속해서 진품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재검증을 거쳤고 결국 1980년대 만들어진 가짜로 밝혀집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분석 작업보다 한 번 훑어본 전문가의 직관이 더 정확했던 것입니다. 14개월의 조사보다 첫 2초의 직관이 더 정확했다는 것입니다.[참조: ‘블링크’, 말콤 글래드웰]

의견은 쉽게 변할 수 있지만 믿음은 온 세상이 반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의 힘이 아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신의 부모라 여기는 것은 여러 분석에 따른 의견에서가 아니라 순간적인 통찰력을 통해 생긴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지 공부로 넣어지는 무엇이 아닙니다. 그리고 합리적 의견이 아닌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실제로는 의견의 수준밖에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돈 앞에서 약해지고 애정 때문에도 약해집니다. 청년회를 열심히 하다가 개신교 신자를 만나서 개신교 신자가 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성체를 무엇이라 여기고 영했던 것일까요?

개신교에 가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지금까지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오리인지 백조인지 모르면 고통 속에서 오리도 되지 못하고 백조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학 나가서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문 지도 교수와는 물론이요,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과 싸워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경공부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도 모두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당시의 성경공부와 차이가 없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의해 해석되지 공부를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자를 연구하고 시대상황 등을 연구함으로써 성경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성사(聖事)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진리가 눈에 보이는 문자 안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세상 것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성사인 것입니다.

성경도 성사이고, 성체도 성사이고,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님도 성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문자이고, 밀떡이고, 시골 처녀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문자 안에 진리가 있다는 믿음, 밀떡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 마리아 안에 하느님이 잉태되어 계시다는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물이 성령이요, 그 바위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으로 성경을 새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해석만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이런 해석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밀떡의 성분을 조사해보고 연구해봐야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공부해봐야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개신교도 그들 나름으로, 천주교도 그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연구를 많이 한다고 자신들의 믿음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아기는 포크를 보면 그것을 먹는 것인 줄 알고 입에 집어넣습니다. 아직 그것이 무엇에 사용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믿음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더 충만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 자세한 역사적 배경이나 쓰이게 된 동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성서학자들이 반대하더라도 저는 이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목숨까지 걸 수 없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맞설 수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혼자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의견은 자신도 이웃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믿음은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소경 바르티매오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하도 그러니 많은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거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먹을 것도 얻지 못할 수 있지만 이번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의견과 맞섰습니다.

마치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도 그러면 안 되어서 가라앉는 배에서 혼자 뛰쳐나오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세상과도 맞설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이 그렇게 순교하였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세상 사람들이 짓누를수록 더 크게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생각할 때까지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돈을 제일로 여길 때, 우리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길을 갈 때 ‘이 길이 맞나, 틀리나?’를 생각하면서 간다면 비록 그 길이 맞아도 그 길을 가는 동안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 확신을 줄 수 있고 흔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10월 28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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