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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의 또 다른 얼굴, 고통
조회수 | 1,916
작성일 | 06.10.27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힘겨운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세상살이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어찌 이리 참혹한지요?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다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 거추장스런 육신을 훌훌 벗어버리고 영혼만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하소연입니다.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려고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과,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다,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때로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묵묵히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가 안고 있는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바르티매오란 눈먼 거지가 그러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심연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은 바닥났고,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게 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 잊혀져갔습니다. 완전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한심스러웠습니다. 너무도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죽고만 싶었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온 이상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본능적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게 된 가장 직접적 동기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겪어왔던 답답함, 미칠 것만 같은 마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생각, 바로 그것들이었습니다.

극심한 삶의 고통, 비참함, 자존심 상함, 모욕 같은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바르티매오의 인생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보란 듯이 한번 살고 싶다'는 생각에로 그를 이끌었고, 결국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 누군가가 바르티매오처럼 답답함, 비참함, 모욕, 자존심 상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너무 슬퍼할 일이 아니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쓴 간절한 외침,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열렬한 갈망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하루하루라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는 우리 삶을 대대적으로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은총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굳게 믿으며 하루하루 용기를 내고 그분께 매달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에 기뻐하는 바르티매오를 바라보며 제 지난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정녕 생각하기도 싫은 불행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짓누르던 끔찍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값진 은총의 순간이었군요. 그 순간은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 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은 제 자신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정화와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던 순간,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응답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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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길고 막막했던 절망을 견딘 후

우리를 가장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절망 그 자체가 아니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주변의 복병들과 결국 그것에 무너지는 자괴적 몰락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본문들에서는, 오랫동안 길고 막막했던 어둠 속에 있어왔고, 주변의 방해로 더욱 냉혹한 조건에 놓이게 되지만 겸손과 용기로 항구히 구원을 기다린 이들이 소개됩니다. 예리코의 소경 바르티매오(복음)와 유배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제1독서)입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고 역경과 고난이 일상처럼 된 불행의 길에 서 있었지만, 그 고통을 온전히 껴안고 어떤 상황에도 존엄을 지키며 의연히 구원을 기다린 사람들, 이제 그들은 하느님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마르코 복음은 갈릴래아에서의 여정(전반부)과 예루살렘에서의 여정(후반부)으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발생합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장소로서 걸인이나 노숙인들이 많던 곳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두 개의 소경 이야기(벳사이다의 소경과 예리코의 소경)가 소개되는데 이들 사이에는 분명한 연계점이 발견됩니다. 이야기가 묘사된 이후 누군가의 신앙고백이 이어진다는 점이 그러한데, 벳사이다의 소경 이야기 이후에는 베드로의 고백이 이어지고(마르 8,22-30)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 후에는 예루살렘 입성 때 함성처럼 쏟아졌던 군중들의 고백이 이어집니다.(10,46-11,11) 유다인들의 통념에 의하면 눈먼 이의 치유는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표징이었고, 마르코 복음은 이 치유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신원을 온전히 드러낼 수난과 죽음의 장소 예루살렘에 점차 접근하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 기다림과 만남, 그리고 고백

이스라엘은 고온 건조한 사막 기후 때문에 뜨거운 태양과 흙먼지가 심한 곳이었고, 그로 인해 선천적으로뿐 아니라 후천적으로도 눈이 멀게 된 이가 많았습니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그가 ‘길에 앉아 있던 장님’이라는 묘사로 시작됩니다.(10,46)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이며, 그가 움직이지 못한 형태로 오래 그렇게 있어왔음을, 그것도 매일 규칙적으로 그렇게 앉아있었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는 나자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즉시 그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47절) 이때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지칭하는데,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을 명백히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 경우는 유독 이곳 뿐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눈먼 이의 입을 통해 고백된 것이 특징입니다. 이 표현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메시아적 호칭으로 정착된 것으로서, 베들레헴 출신 다윗이 이룩했던 강력한 통일왕국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다윗은 언제나 민족적 자부심이었고, 지중해의 맹주로까지 급부상했던 그의 통치 시대는 그들이 다시 회복해야 할 황금기였습니다. 유다인들은 다윗의 위대한 정치적 업적과 위상이 “다윗의 자손”을 통해 재현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을 해방시킬 진정한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 구원이 지연되는 이유

큰소리를 지르는 그를 주변의 사람들이 비난하고 저지하지만 그럴수록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강렬한 원의를 모아 계속하여 외칩니다.(48절) 사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긴장을 통해, 인내와 항구함이라는 신앙의 중요한 가치를 제시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간절한 도움을 원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시는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데에 왜 그토록 더디신지, 급기야 사람들의 방해와 비난에 좌절하게 하시는지, 바르티매오의 경우를 통해 정확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답은, 단 한 번의 기도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이 마술처럼 해결되는 방식은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 난관과 고통 속에 인간을 방치하시는 듯하지만 그 시간은 역으로 하느님이 인간을 기다리시는 시간이라는 것, 우리의 갈망과 염원이 더욱 견고하고 깊은 것이 되도록 하는 밀도 높은 집중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 초대와 질문

그렇게 간곡한 열망과 신뢰를 담아 구원자를 부르면 비로소 초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이를 전하자 바르티매오는 신속히 나가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 버립니다.(49-50절)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장면인데, 전 재산이라고도 할 수 있던 겉옷을 벗어 버림으로써, 구원에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과 포장을 기꺼이 포기함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바르티매오를 마주하게 된 예수님은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기를 바라느냐?”(51절) 이 질문 역시 상대의 의도를 알지 못하여 던지는 일반적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에게 자신의 진정한 갈망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초대는 “그를 불러오라”는 말씀으로 이미 이루어졌지만, 본질적 의미에서의 초대는 바로 이 질문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진정한 구원에 들어가는 응시의 공간이며 이를 분명히 인식하는 해법의 시간이 됩니다. 바르티매오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보게 해주십시오.”(51절)라는 대답의 그리스어 문장을 보면 ‘아나플레포’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는 ‘다시 시력을 회복함’도 의미하지만 ‘위를 향하여(아나) 보다(블레포)’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머리를 들어 그분의 얼굴을 보는, 즉 구원을 향한 시선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의 본질은 단순히 물리적 해결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 초월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비인간적 대우와 비참한 좌절을 경험하면서, 인간이 비로소 하느님께 의지하기 시작할 때 진정한 ‘구원’은 시작되며 이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시력의 회복을 요청한 소경에게 예수님은 시력에 대한 것보다 구원을 언급하신 것인데,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 바르티매오는 이제 온전히 구원되었고 이러한 관계성의 심화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다. 그는 ‘길 위에’ 있었지만 이제 그분을 따르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신체적 장애로 치명적 난관에 놓이게 되지만 이를 의연히 극복한 예로 쉽게 연상되는 인물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입니다. 그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듣고, 보고, 그에 대한 혐오와 적나라한 모순에 휘둘리고, 훼손되고, 지치면서부터였습니다. 과연 내가 진정 봐야 하고 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판단하고, 그 시선을 방해하는 무질서한 선동과 위선들을 지혜롭게 차단해야 함을 조금씩 깨달으면서, ‘위인’은 ‘의인’이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고통과 비극에도 무너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운명을 껴안으며 해야 할 과제를 묵묵히 수행한 베토벤에게는 ‘음악가’라는 단어보다 인간 투쟁의 최고 역사를 써낸 ‘의인’이라는 타이틀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자기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구원을 기다려온 사람은, 구원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주저 없이 알아봅니다. 부질없고 비본질적인 것에 삶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로운 안목과 민감한 감수성이, 견고한 은총으로 그의 길을 환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 가톨릭신문 201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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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의 또 다른 얼굴, 고통

매일 와 닿던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어떤 분은 자신의 힘겨운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염세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세상살이 고달픈 실상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어찌 이리 참혹한지요? 언젠가 이 세상이 지나간다는 것이, '다음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 거추장스런 육신을 훌훌 벗어버리고 영혼만으로 살아가리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하소연입니다. 때로 하루를 산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루를 견뎌내려고 얼마나 많은 상처와 굴욕과, 좌절과 눈물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하늘이다, 인간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소중한 존재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가장 존귀하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습니다.

때로 끝도 없는 지루한 일상과 맞서야 하고,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너'란 존재를 묵묵히 견뎌내야 합니다. 나란 존재가 안고 있는 비참함도 참아내야 합니다. 가식과 위선, 모순과 폭력으로 둘러싸인 구조 안에서 그저 바보처럼 웃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바르티매오란 눈먼 거지가 그러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심연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은 바닥났고, 아무런 생계수단도 없게 된 그는 점차 세상에서 잊혀져갔습니다. 완전히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한심스러웠습니다. 너무도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죽고만 싶었지만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온 이상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뭔가 세상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본능적 욕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별 의미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때,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시각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그런대로 습관이 되어 견딜 만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늘 남들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게 된 가장 직접적 동기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겪어왔던 답답함, 미칠 것만 같은 마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생각, 바로 그것들이었습니다.

극심한 삶의 고통, 비참함, 자존심 상함, 모욕 같은 요소들이 역설적으로 바르티매오의 인생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보란 듯이 한번 살고 싶다'는 생각에로 그를 이끌었고, 결국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그 누군가가 바르티매오처럼 답답함, 비참함, 모욕, 자존심 상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너무 슬퍼할 일이 아니겠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쓴 간절한 외침, 제대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열렬한 갈망이 있다면 하느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답답하기 그지없는 하루하루라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는 우리 삶을 대대적으로 바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은총의 순간이 반드시 다가올 것을 굳게 믿으며 하루하루 용기를 내고 그분께 매달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에 기뻐하는 바르티매오를 바라보며 제 지난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정녕 생각하기도 싫은 불행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짓누르던 끔찍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가장 값진 은총의 순간이었군요. 그 순간은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 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은제 자신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정화와 은총의 순간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병고에 시달리며 허우적거리던 순간, 그래서 하느님께 간절히 매달리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응답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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