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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을 보는 눈
조회수 | 2,369
작성일 | 06.10.28
예수님께서 소경이며 거지인 바르티매오에게 물으셨다.

“네 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씀은 오늘 복음 바로 앞, 다른 제자들 몰래 예수님께 와서 청했던 야고보와 요한에게물으셨던 질문이기도 하다.(마르코 10장 36절)

“선생님, 소원이 있습니 다. 꼭 들어주십시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아니던가?!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 기도, 우리들 신앙이다. 한 가지를 청하라시면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내가 키가 5㎝ 더 크게 되는 것? 얼짱과 몸짱 中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우리 큰 애 일류대학에 합격하는 것? 우리 남편 사업 잘 되는 것? 내가 키가 5㎝ 더 커지거나 아니면 얼짱, 몸짱이 되어서 지금 어쩌겠다는 말인가? 우리 큰 애 일류 대학에 합격하면 우리 둘째 애 시험 칠 때는 어떡하지? 우리 큰 애라 하지 말고 우리 애들 공부 잘하게 해 달라 할까? 우리 애들이 일류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정말 내 전 생애가 행복할까?
우리 남편 사업 잘되면 정말 나는 바랄 것 없이 행복할까?

바르티매오는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빌었었지. 이해가 된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가 소경이라도 그렇게 청하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본다고 하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눈을 뜨게 된 바르티매오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자기 앞의 예수님이셨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으리라. 그리고는 예수님을 따라갔었다. 나는 늘 내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를 못하니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 즉 욕심을 내는 것이다. 내가 진정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내 키가 작다한들 그것이 불행이겠는가? 내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내 사업이 잘 된들 그것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이겠는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내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만하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인가?

나도 신학생 때 하느님께 한 가지를 빌었는데 바로 신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신부가 된 지금 나는 하느님께 빌 것이 없는가? 물론 수두룩하다. 이것들을 들어주시면 정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까? 진정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내가 키가 작은 신부인들, 얼짱도 몸짱도 아닌 신부인들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자신의 無知를 아는 것이 참 지식일 것이요, 그것을 모르면 바로 罪가 되리라. 자신을 보기 위해서 바라는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을 보는 눈이어야 하리라.

예수님을 따라가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몰랐던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아는 바르티매오가 될 것인가!

바르티매오는 ‘티매오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티매오는 ‘존경한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님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자, 그러기에 주님을 보고자 눈뜨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티매오의 아들인 것이다. 맹인이고 거지였던 것이 옛 삶이었다면 마르티매오는 겉옷을 던져버린 우리가 가야 할 새로운 삶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자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9,39)

▶ 노광수 그레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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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고통, 힘겨움, 아픔, 어려움 등 이런 말들은 나에겐 없으면 합니다. 하지만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러한 것을 가지고 삽니다. 삶은 고해(苦海)다 라는 말처럼 누구나 그렇게 삽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눈먼 거지도 모든 고통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거지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청(請)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거지의 바람을 아시고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믿음을 두고 있습니다. 또 청을 드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청이 꼭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왜 내 청을 들어 주지 않는 걸까? 또 주님을 잘 못 믿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며 주님께 향한 믿음에 의심을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救援)하였다.’(마르10,52)라고 하시며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십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13)

이 말씀처럼 우리에겐 겨자씨만한 믿음마저도 부족 한가 봅니다. 또한 주님을 잘못된 방향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달리한 채 나만을 위한 모습은 아닌지...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뜻하신 대로 맡겨 드리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 9-11)

바로 이 모습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 뜻을 어려움 때문에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사랑으로 꼭 감싸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화이팅!

▶ 한재상 요한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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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믿음의 눈으로

여러분, 계절 빛이 완연한 이 가을, 단풍 구경은 좀 하셨는지요? 얼마 전 신자 몇 분과 동해방면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가는 길에 예쁘게 물든 단풍 산들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날은 공휴일이라 나들이 가는 차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던 중에 한 분이 “여러분, 보니까어때요?” 하고 일행들에게 물었습니다. 동시에 두 분이 대답했습니다. 한 분은 “단풍이 참 곱네요!” 다른 한 분은 “차가 굉장히 많네요!”우리나라 속담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평소에 자기가 마음을 두고 있는 것과 관련된 것만 본다는 뜻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동일한 사물이지만 평소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똑같은 풍광을 보고도 어떤 이는 ‘아름다운 단풍’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복잡한 도로교통’을 생각하기에 말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비록 소경이지만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는 자신이 앞을 못 보는 처지에서 어떻게든 ‛볼 수만 있다면!’하는 바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었을 겁니다. 그런데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 주신다는 “예수”라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무조건 자비를 빌었습니다. 그분만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눈을 뜨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요즘 많은 세상 사람들이 돈이 있어야 인간답게 세상을 산다고 믿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그 돈이 없어서 남의 돈을 훔치고, 강도질을 하고, 뇌물을 받고, 남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돈이 인간다운 삶의 척도라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돈만 보입니다. 명예가 인간다운 삶의 척도라 생각하는 사람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합니다. 하지만 인간다운 삶의 기준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기준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노력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진정 무엇을 바라고 살아갑니까?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믿음으로 소경이었지만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육신의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께서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시는 분이라 믿는다면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올바로 보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분을 보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김종기 바오로 신부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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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다시보기

요즘 ‘TV 다시보기’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 기능의 목적은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기능의 목적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정보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다시보기’ 기능을 우리의 삶에서도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뿐만 아니라 신앙에서도 따분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따분함을 느끼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일상에서나 신앙에서 새로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늘 봐왔던 것이나 나의 생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요즘, ‘다시보기’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보기’를 오늘 복음의 바르티메오의 상황을 통해 배우면 좋겠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어떤 이유에서 눈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왔고 다시 보기 위해예수님께 간절히 외치며 자신의 모든 것과도 같았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처럼 “나를 따라라.” 하지 않으셨음에도 그는 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 이유는 눈이 멀었을 때 자신이 생각만 했던 화려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어 도저히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다윗의 자손”이 아닌, 소박하고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군중과 함께 어울리며 인자한 모습을 보이시는 새로운 “다윗의 자손”을 “다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거라.”라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바르티메오 처럼 우리의 삶과 신앙을 다시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시보기위해서는 우선 바르티메오 처럼 모든 것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기준, 선입견과 판단들을 겉옷 벗어 던지 듯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삶과 신앙에 대해 눈먼 상태가 되었을 때 간절히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된 우리의 눈은 새로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문제아에게서 놀라운 재능이, 꼰대에게서 지혜로움이, 미운사람에게서 사랑스러움이, 죄 많은 사람에게서 용서가,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고통의 십자가에서 부활의 영광이, 보잘 것 없는 나에게도 구원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롭게 보게 된 눈으로 더욱 선명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이렇게 “다시보기”를 사용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김민수 레오 신부 : 2018년 10월 28일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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