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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픈 사랑
조회수 | 1,606
작성일 | 06.11.03
얼마 전에 오랜 친구가 찾아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전엔 사랑이 쉬운 줄 알았습니다.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유일한 주님이시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네 하느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렇게 사랑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던 것들이 마음속으론 당연하지만 생활 안에선 당연한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세상일에 대해서 알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가던 그래서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던 때는 그랬는데 복잡한 세상 삶 속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마음과 정신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떠나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 가족과 내 삶을 윤택하게 살 수 있을까로 바뀌었고, 생각과 힘은 직장에서의 승진과 줄을 잘 서야 된다는 데로 쓰게 되고, 그로 인해 가끔 죄송하지만 하느님 만나러 가는데 소홀히 했습니다.

이웃사랑도 그렇습니다. 당장에 내 삶이 여유가 없고, 벅찬데 어떻게 주변을 둘러봅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도와 주다보면 내 삶과 가족들의 삶은 돌볼 처지가 되지 않고, 이웃사랑에 발을 들여놓기가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사랑은 참으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친구와 이야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이미 그 친구는 삶에 너무 지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일들이 대부분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생각되어졌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해야하는 대상의 부재로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하는 대상은 있지만 그 대상이 마음속에 갇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과 계명 속에 갇혀 있는 사랑의 대상을 세상 밖으로 꺼내시려고 노력하십니다. 율사의 신앙고백문속에 갇혀 있는 하느님,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라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또 그렇게 실천하십니다. 우리는 오늘도 마음속에 사랑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이제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을 밖으로 꺼내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전주교구 이태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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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율법의 두 글자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계명에 정통했다 인정받았을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계명에 관해 여쭈었다는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병행구를 이루는 마태오 복음서는 이 질문의 의도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마태 22,35참조)데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외에도 모세오경에 근간을 둔 숱한 규정들, 그리고 그 규정들을 풀어 만든 자질구레한 생활법률에 이르기까지, 계명의 범주에 들 수 있었을 터라, 그 가운데 설령 첫째가는 것을 고른다 하더라도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 있을 노릇이었고, 더욱이 율법 학자 모두를 만족시킬 답은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율법 학자는 아마도 그러한 상황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불손한 의도를 아시고 먼저 그들의 그릇된 생각부터 바로잡으십니다.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율법들이 쏟아져 나와야 했는가?’부터가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모세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계약관계로 이해해 왔습니다. 따라서 계약에 명시된 조건들만 충족한다면 계약을 지키는 입장의 내적 상태는 문제 될 게 없다는 논리입니다. 형식의 문제일 뿐 진심 여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지키기만 하면 그만인 철저한 계약관계에서는 권리와의무만 있을 뿐 사랑은 자리 잡을 곳이 없게 됨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율법 학자들이 우선순위를 매겨왔던 어떤 조목에도 동의하지 않으시며,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먼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궁전인내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부터 세상 모든 이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외적인 행위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루는 진실한 만남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수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외우고 가르쳤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신명 6장, 레위 19장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계명을 되풀이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계명으로 그동안 붙들고 늘어졌던 잡다한율법들을 모두 폐기하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지키지도 못할 계명들에 얽매여 노예상태에 있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마땅히 준비되어야 할 두 가지의 계명만이 그 법적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그동안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애써왔던 그들의 모든 노력까지 외면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열성과 노력으로 구원에 도움 되지도 못할 계약 내용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라는 초대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당신의 백성이 노예가 아닌 자녀다운 모습으로 자유롭게 당신을 섬기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다못해 비록 헛다리를 짚긴 했지만 그래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보겠다는 열성을 가졌던 율법 학자들 못지않은 열성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그마저도 없습니까?

▦ 전주교구 염태성 사도 요한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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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마르 12,28ㄱㄷ-34)

‘믿음’은 신앙생활의 바탕이고, ‘희망’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고, ‘사랑’은 신앙생활의 방법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예 신앙생활을 안 할 것이고, 믿음이 있어도 희망이 없으면 힘을 잃어서 금방 지쳐 떨어질 것이고, 믿음과 희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만 있고 생활은 없는, 즉 ‘실천 없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야고 2,26), 죽은 믿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께서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은, 하느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주겠다고 사탄이 유혹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또 재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여기서 ‘섬기다.’ 라는 말을 ‘사랑하다.’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부귀영화를, 또는 세속의 재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쪽을 더 사랑하고, 저쪽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쪽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쪽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양쪽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참 사랑은 오직 하나의 대상만을 향한 것입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혹시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텐데, 이 말씀이 답이 될 수 있습니다.사랑이란,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 ‘나의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나를 모두 상대에게 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더 이상 ‘나’는 없고, 내 안에 ‘너’만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은 자기 안에 하느님만 있고, 자기는 없습니다.

(한 번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평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말씀하신 다음에“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서도

금방 또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모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두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웃이 바로 예수님이고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 뒤에 바로‘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원래 이 비유는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하신 비유인데,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0,36-37).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이웃이냐고 묻지 말고 네가 먼저 이웃이 되어 주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이웃이 되어 주기’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이 되어 주는 일은, 사실은 이웃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너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기쁨과 슬픔이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우리가 함께 있어서 아무도 외롭지 않고...)

천국은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사랑은 없고 미움만 있는’ 곳입니다. (연옥은 부족했던 사랑을 보속으로 채우는 곳입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에서 실천하는 사랑은 그곳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사랑은 하지 않고 미워하기만 하면 금방 지옥으로 변할 것이고.)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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