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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
조회수 | 1,902
작성일 | 06.11.0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유대교 율사와 대화하신 이야기입니다. 율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구약성서 율법의 두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6,4-5)의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위서(19,18)의 계명입니다. 상대가 율사이기에 예수님은 그가 잘 아는 구약성서의 율법 구절들을 인용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어떤 문헌에는 오늘의 율사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이 있고 교권 당국의 답이 있습니다. 그 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피를 흘리지 말 것,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 안식일을 범하지 말 것이다.” 유대교는 사랑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가 사랑을 말할 때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마태 5,43)는 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미움에 반대되는 우호적인 자세를 의미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그 근본에서 흔들어 놓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인간은 두려운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섬기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군주와 같이 군림하고 인간은 무서운 군주 앞의 노예와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제한 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듯, 이웃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10,29-37)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서 한 일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서,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습니다. 요한사도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확인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 주고, 맹인을 눈뜨게 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신 것은 모두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불쌍히 여기시는 몸짓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초기 교회는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불쌍히 여기심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4-35).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웃을 보는 우리 시선의 중심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유대인이 이웃을 볼 때 중심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시선의 중심을 자기 앞에 있는 이웃 안에 두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웃의 상황에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시선의 중심을 아기 안에 두고 그 아기의 상황에 참여합니다. 아기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있는 이웃의 필요가 결정합니다. 앞에서 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주인공은 강도 맞은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실상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4,8)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같은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고 또 우리에게서 이웃에게로 흐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사랑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고, 그 사랑 안에 머물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가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오늘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사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율사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두려운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물러섰습니다. 그는 신앙이 하느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서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 등에 대한 애착으로 선입견을 갖습니다. 그 선입견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에 대한 애착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불쌍히 여김에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아 실천하며 삽니다. 개체유지와 종족유지의 본능을 지닌 우리에게는 하나의 도약을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그 본능으로 말미암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을 동기로 한 도약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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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응답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계명과 가르침은 신앙생활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은 이러한 중심을 이루는 하느님의 계명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은 명확한 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목숨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일이며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가르침 역시 바로 이것이었으며,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희생하시면서도 강조하신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이 함께 생각해 볼 대목은 주님께 질문을 한 율법학자입니다. 주님께 질문을 한 율법학자는 주님의 탁월한 대답을 듣고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이란 표현으로 주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 역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씀으로 그를 칭찬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끊임없는 질문과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주님은 오늘의 질문과 대답으로 율법 학자들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입을 닫아버리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의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오늘 율법 학자의 반응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기는 하였지만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전적인 동의는 물론이며 이를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은총과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에 동참하면서 주님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계명에 우리의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한 율법 학자의 질문에 우리들이 진정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요구에 우리들도 합당한 응답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바른 응답이 주님 사랑의 지름길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 묵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산교구 조동성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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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한결같이 사랑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정확하게 말을 하면 613가지나 되는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이렇게 많다 보니, 사람들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그리고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 한 사람이, 체면 불고하고 예수님께 다가와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정말 명쾌하게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하면서 그 모든 계명을 소쿠리에 담아서 걸러내고 걸러내면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 두 글자만 남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모든 덕의 절정이며 모든 문제의 종결자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랑이 결코 감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와 신앙이 우리 삶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종교가 가르치는 그 사랑이 이론적인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가 종교의 벽을 넘어서 조계종의 스님들에게까지 감동을 주었던 그 이유는 바로 실천하는 사랑의 위대함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이 더럽고 죄가 크기에 세상을 버리고 자기에게 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 인간을 섬기고 더러운 세상을 깨끗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랑에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는 이는, 천 리 길을 가고 만 리 길을 가도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 12)

부산교구 최득수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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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랑의 D. N. A 우리 안에 있습니다.

문득 그날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던 율법학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의 질문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생활방식의 핵심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을지…… 평생, 율법의 세부조항에 얽매여 긴장하고 염려하며 노심초사했던 지난날들의 올무가 벗겨져 나가는 해방감을 맛보았을 테니까요. 주님의 답변에 온 마음이 환해져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현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라 헤아리니, 저 역시 행복해집니다. 솔직히 그의 속내에는 주님을 시험하려는 꼼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칭찬까지 들으니 신바람이 났을 겁니다. “훌륭하십니다.”라는 진심의 고백이 터져 나왔을 터입니다.

때문에 한결같이 주님을 향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에서도 희망을 건집니다. 이런저런 흠집으로 그득한 우리의 일상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칭찬’해주고 싶어서 살피고 살피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께서 당부하신 것이 오직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이외의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니, 주님의 멍에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내야 되는 버거운 것이 아니라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그날 그 자리에는 주님의 말씀에 불만하며 ‘뭔 소리냐’라거나 ‘말이 되냐’며 주님을 비웃는 인물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냈던 수많은 계율이 마음 아픕니다. 그들도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돕겠다는 선의에서 시작된 일일 테니까요. 사랑이 아닌 ‘판단’을 앞세운 결과의 엄중한 무게가 여실히 다가옵니다.

그들은 수많은 율법조항이 아둔한 백성을 일깨우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바르게’ 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다시는 선조들의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꼭 필수적 처방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 단단한’ 법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율법에 사랑은 빠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의 사랑을 엄중한 형벌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613개의 조항으로 백성을 옥죄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상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수두룩하고 ‘저렇게 하면 그르다’는 지적에 시달려야 했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사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하느님 계명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웃 사랑”에 관한 설명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 24,14-25 참조) 그들은 이미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8)라는 명령까지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선포하신 사실을 환히 꿰고 지냈을 것입니다.(시편 68,6 참조) 지금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일마다 그분께로부터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듣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확신하는 우리의 모습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에서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숱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나서서 이웃을 돕는다는 미명아래 오히려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에페 1,4-5) 사실을 압니다. 사랑을 철저히 실천할 것을 명하신 그분의 의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진실로 그분의 뜻을 행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늘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길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늘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룹니다.

마치 사랑 실천은 생의 마지막에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말의 가책은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정말 안 되더라’는 변명에 익숙해져서 하물며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치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는 위로의 말씀인양 여기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깊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천국 백성이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백번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자랑할 것”이 아닌 의무일 뿐입니다.(로마 3,27 참조)

물론 우리의 이 모자람이 안타까워 주님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초지일관 사랑만 할 수 있는 능력인은 아무도 없기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스스로 사랑을 살아낼 재간이 없는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티토 2,14)으로 빚고 계십니다. 이렇듯 ‘영구한 사제직’에 충실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로마 10,21)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종일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첫째 사랑과 둘째 사랑으로 구분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놀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 하신 것이라 느낍니다. 사랑의 조건은 결코 계량될 수 없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다하여”라는 표현으로 일깨워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최고의 원리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은 실천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제대로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바로 그 장소 그 순간에 천국을 누린다는 비결을 만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사랑의 계명만 제대로 지키면 다른 계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부수적인 다른 것들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소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 사랑은 정말로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일상생활과 일치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그 공손한 모습이 이웃을 대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온 것을 쏟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한껏 사랑하십니다. 그런 마음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하냐고 묻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1코린 10,13) 무언가를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그 능력이 주어졌다는 엄숙한 진리의 선포입니다.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D. N. A가 충분히 주어졌다는 절실한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는 사랑하되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D. N. A가 있습니다. 대단치 않은 내 안에는 오직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흔적이 존재합니다.

우리도 사랑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가짜입니다.(1요한 4,20 참조)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가톨릭신문 2018년 11월 4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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