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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첫째 가는 계명
조회수 | 1,653
작성일 | 06.11.03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은 항상 절대적 척도이며, 인간은 그 하느님의 위대함에 대한 미소한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사상은 아무리 선의로 받아들인다 해도 반인문주의 사상의 하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이 오늘 복음에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시키신다. 즉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현대의 일부 사조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

제1독서: 신명 6,2-6: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1독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주 하느님은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4-5절). 이 두 구절은 구약의 신학과 영성의 정점이며 절대적 유일신론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보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으로 나타난다. 즉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명령은 밖에서 부과된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 백성의 본성이며,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복음: 마르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가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 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고 하시고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시켜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행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이 일은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시게 될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름을 말해준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p. 267-268).

제2독서: 히브 7,23-28: 그분의 사제직은 영구한 것입니다

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구약의 사제직은 죽음으로 중단되기 때문에 일시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영원하다. “예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자의 일을 하심으로써”(25절) 현재도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분의 사제직은 절대적인 성성을 통하여 실행되기 때문에 구원의 능력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진정으로 오늘 여기서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도록 하자.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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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하지 마~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따라 하면 곧잘 “따라 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어른들의 세상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지적재산권’, ‘ 저작권’,‘표절 시비’ 운운하며 누군가를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범죄가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대 답하십니다. 율법학자 역시 그분의 말씀을 되풀이하며 긍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이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이 율법학자가 진정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당신의 온 삶으로 사신 분입니다. 과연 그 분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스스로 함께 하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대답을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율법학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드러냈는지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만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입으로 옳다고 되풀이 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대한 믿음을 온전히 삶으로 드러내기 전까지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11).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의 대답인 동시에 질문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됨은 사실 그분을 따라가고 따라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질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입에만 되풀이해서 올리고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던지는 ‘표절시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대답보다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수원교구 백정현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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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서 더 높은 빌딩과 더 넓은 도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성질은 더 급해지고 시야는 더 좁아졌다. 집은 과거에 비해서 넓어지고 커졌지만 식구는 줄어들었다. 컴퓨터가 일을 빨리 처리해도 시간은 늘 빠듯하며, 우리의 지식은 더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흐려졌다. 말은 많이 하지만 사랑은 적게 하고, 미움은 너무 많다. 우리 인간은 달에도 갔다 오고 화성도 탐사하고 있지만 이웃집에 가서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 호사스러운 결혼식이 많아졌지만 더 비싼 대가를 치르는 이혼은 늘어났다. 집은 훌륭해졌지만 더 많은 가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글인데, 오늘날 세태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방향 설정’을 제시하고 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는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다. 모세의 율법에는 아주 많은 계명과 금령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유다교 라삐들은 계명을 총 613개 조항으로 두었다. 이렇게 많은 계명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을 어떻게 선택하겠는가? 예수회의 알베를 반호이 추기경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쉬운 해결책은 십계명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을 십계명에서 찾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십계명의 계명들은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등의 부정적인 계명이므로, 삶을 위한 긍정적인 방향을 설정할 수도, 인간적 삶의 이상으로 여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방향 설정의 근거를 찾으신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매일같이 소리 내어 읽는 신명기의 구절에서 발견하신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 6, 4-5)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첫째 계명에 대해 질문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둘째 계명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레위기 19,18 참조)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당신의 대답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결합시킨다. 또한 예수님은 이웃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고, 하느님사랑은 이웃사랑이라며 두 계명에 같은 중요성을 부여하셨다.

끝으로, 동방교회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본다. “이웃 사랑은 최고의 덕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근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마태오 239 ; 마르코 12,31).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지체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것이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라고 말씀하신 분을 기억하며 큰 자비를 보여줍니다.”

▦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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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참된 예배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나의 뜻을 봉헌하는 것

‘사랑받는 남편 10계명’이란 것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1. 같이 자라-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같은 시간에 부부관계는 밤에 달려있다.

2. 밥을 다 먹어라-맛있게, 맛있어 하면서,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

3.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자-가로막지 말고 맞장구 쳐주자.

4. 아침을 활기차게 시작하라-남편의 활기는 금방 아내에게 전달된다. 아내가 깨워야 일어나지 말고 미리 일어나 창문을 열어라!

5. 처가에 가서는 싱글벙글 하라-갈 때는 선물을 잊지 말 것! 처가에 가서는 가장 늦게 나올 것.

6. 동반모임을 즐겨라-부부모임은 가능한 한 참가하여 즐겨라. 밝고 예절 바르게

7. 잘못했으면 곧 사과하라-곧 사과하라! 지금 곧.

8. 아내 편을 들라-어쨌든 일단은 아내의 편을 들고 나서 잘잘못을 따져라.

9. 생일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간 큰 남자!!

10. 결혼반지를 빼지 말라.

[출처: ‘사랑 받는 남편 10계명’, 블로그 코이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저런 노력을 해야 하다니.’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과 함께 사제가 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저걸 다 한다고 해서 아내가 만족할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바라는 모든 것을 해 주어야합니다. 남편의 십계명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열 가지’로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거 다 빼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을까요? 그리고 남편으로서 해야 하는 것, 성실히 일하여 돈을 잘 벌어오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 나머지 계명들은 어쩌면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다가와“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계명 가운데 무엇이 핵심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자신만을 사랑하며 돈을 성실히 벌어오는 것이라면, 하느님도 당신만을 사랑하며 이웃에게 잘해 주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인 것입니다.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나의 마음에 들려면 이것은 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계명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게 만드는 지령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 마음에 들어 하느님 품 안에서 같은 공동체를 만듭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이고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데모집회에 한 번 나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집결해야 했던 곳은 서울시청 앞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내렸을 때 한 여학생이 저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뭐라 쓰는지 몰라서 빤히 쳐다봤더니 또 다시 뭐라고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집중을 해도 뭐라 쓰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라 쓴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학생이 주위를 살피며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아~ 이거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데 ... 집회 장소가 명동성당으로 바뀌었다고요. 빨리 그리로 이동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근처까지 갔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뉴스를 보니 명동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경찰병력에 둘러싸여 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성당에 들어간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 하늘나라 공동체에 섞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령을 따르지 않고 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 여학생은 하느님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손바닥에 써 준 것은 계명입니다. 계명만이 하늘나라에 도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당신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지령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 지령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모세는 이 지령을 가슴에 품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민족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민족들은 그 지령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대로만 살고 싶어서 하느님까지도 ‘황금송아지’로 만든 상태였습니다.

하느님을 소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는 주인이 되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을 조정하고 싶은데 하느님의 지령에 관심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게 돼버린 계명 판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명이 깨졌다는 말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내 뜻과 반대됩니다. 내 뜻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의 계명은 내 안에서 성취될 수 없습니다.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주인이 되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계명에 집중해야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품에 안고 내려오던 모세는 그 계명을 어떤 마음으로 안고 왔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처럼 안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계명을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랑을 하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하라고 하십니다. 이 ‘다하는 마음’이 참된 예배입니다. 나의 온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위해 내가 봉헌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나의 봉헌은 이렇게 계명의 성취로 이어져야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예배를 봉헌하러 갑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처지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극진히 도와줍니다. 하느님의 지령은 예배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예배로 봉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령은 외면한 채 미사만 보러 온다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계명이 우리를 그분 나라에 들여보내 주는 것이지 외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도 이제 그분의 계명을 알았다면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세가 이 계명을 가슴에 품고 시나이 산에서 내려왔듯이 우리도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잊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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