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34.8%
[수도회]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조회수 | 1,632
작성일 | 06.11.03
언젠가 축구시합을 하러 운동장으로 내려가기 전 인원 점검을 하고 있을 때 일입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아이가 바로 제 앞에 서있었습니다. 곰처럼 덩치가 크고 '삐딱선'을 좀 탈 것처럼 생긴 아이였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저는 '사랑이 가득 담긴 따뜻한 손길'로 아이의 뒤통수를 한 대 살짝 때렸습니다. 어쩌나 보게.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눈에 쌍심지를 켠 아이는 콧김을 풀풀 내면서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왜 때려요? 재수 없게!"

그 순간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 어깨를 두드리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냥, 네가 좋아서! 잘 지내냐?"

그랬더니 아이는 한 순간에 얼굴이 활짝 펴지면서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몸살 났다더니, 이제 괜찮아요? 신부님, 제발 좀 아프지 말아요!"

정말 사랑스런 아이들입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 합니다. 투박하지만 아이들이 툭툭 던지는 말 한마디에서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은 그야말로 생명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우리가 때로 주고받는 따뜻한 격려나 위로의 말 한마디 그 자체가 바로 생명을 주는 사랑이라는 것을 자주 체험하며 삽니다. 사랑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 아주 쉬워 보이는 것, 그러나 정작 실천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랑인 듯합니다. 그래서 오랜 연습과 인내가 필요한 것,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것, 은은한 꽃향기 같은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회의 차 긴 배 여행을 다녀오셨답니다. 기나긴 여행이었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초라한 나루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서니 뜻밖에도 한 할머니가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당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부님 모습이 나타나자 그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쳐대는 할머니 말에 의하면 "신부님이 안 계시는 동안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벌써 사흘 전부터 나루에 나와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장대비를 맞아가면서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를 바라보며 신부님은 이런 진리 하나를 깨달으셨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쁜 일 중 가장 기쁜 일 한 가지는 '한 인간이 적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시없는 귀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바오로 딸 참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늘 복음에서 잘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

우리가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그 열렬한 사랑을 거기서 끝내지 말고 이웃 사랑으로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 드렸던 바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사랑의 특징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항구성입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끝까지 그 누군가를 향한 사랑을 실천합니다. 적당히 노력해보다가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내 힘에 부친다며 어느 순간 물러서지 않습니다. 짜증내지도 않습니다. 생색내지도 않습니다. 누가 알아봐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이 지금 내 눈앞에서 괴로워하기에, 고통 받기에, 죽어가기에,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이 바로 하느님이란 사실을 굳게 믿고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참된 사랑 실천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정도를 측정해볼 수 있는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실천하는 이웃사랑의 크기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이웃을 향한 우리 사랑은 커집니다. 반대로 인간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커져만 갑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451 34.8%
[수도회]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장거리 운전 중에 하도 잠이 와서, 휴게소 들러 그 유명한 7080 가요 시디 한 장을 사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곡 가까운 노래들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은 노래는 단 한곡도 없었습니다. 틈만 나면 사랑이란 단어가 반복되었습니다.

끝 사랑, 바보 같은 사랑, 거지같은 사랑, 중독된 사랑, 금지된 사랑, 그 잘난 사랑,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따지고 보니 우리는 틈만 나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노력은 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그저 유행가 가사 정도의 통속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이란 주제로시노드를 개최하셨는데, 폐막 미사 강론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행여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또 우리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젊은이들 귀만 가득 채우려고 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할수록 우리 양떼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인듯 합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참사랑,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사랑, 유행가적인 사랑을 넘어서서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우선 참사랑은 상대를 향해 마음의 창을 여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합니다.

오늘 참사랑의 전문가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도 빈약한 사랑으로 인해 늘 허전해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우리의 사랑이 좀 더 큰 사랑, 좀 더 사심 없는 공평한 사랑, 좀 더 폭넓은 사랑, 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 참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사랑의 기쁨’)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4
451 34.8%
오늘은 연중 제 31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불리는 ‘셰마 이스라일’을 들려줍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맨 먼저 배우는 것이 “들어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바로 이 “셰마”라는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이 기도를 정해놓고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강구갑을 부적처럼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 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 37-39).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십계명은 6백 조항이 넘게 보태어져 실천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지 토론이 계속되었는데,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도 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 28)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었던 계명으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 29)

이 말씀은 “첫째가는 계명”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밝히신 ‘하느님의 존재’ 와 ‘우리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계시입니다. 곧 행동의 원리로서의 사랑의 계명에 앞서, 먼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근거와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한 분이신 우리 주님 하느님’이신 분과 ‘그분의 것, 그의 소유’인 우리와의 관계에서 사랑의 계명이 흘러나옴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원천이요 근거요 바탕이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며, 바로 이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임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12, 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율법학자에게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모세가 말한 구약의 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사랑의 계명과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구약>에서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 18)는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곧 여기서 말하는 ‘이웃’이란 동포 로 한정하거나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시킬 뿐입니다(레위 19, 3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 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마태 5, 44-48).

또한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완전히 바꾸어 새 계명으로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 34; 15, 12)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듯이,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하느님 사랑’(6, 4-5)과 <레위기>의 ‘이웃 사랑’(19, 18)을 한데 묶으시면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사랑의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며,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좀 더 확장해서 표현해본다면, 형제가 곧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4
451 34.8%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 30)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기쁨도 맛 볼수 없습니다. 사랑의 맛이 인생의 참맛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핵심적으로 전달하여 주십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기본을 벗어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기본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참된 기본입니다. 기본은 지킬 때 아름답습니다. 기본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롭습니다. 기본은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아줍니다. 우리 존재 의미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아름답고 귀한 존재가 됩니다. 사랑이 창조의 힘이며 원천입니다. 사랑은 살아가야 할 우리 삶의 자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 생활의 태도이며 실행의 모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갑시다. 하느님 사랑만이우리의 삶을 더욱 깊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11월 4일
  | 11.04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1]
!   [전주] 종말론적 교회 
!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2]
!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3]
!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7]
!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3]
!   [대구] 빛과 소금의 삶  [1]
!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2]
!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4]
!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2]
707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6
706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3] 1764
705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66
704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46
703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1
702   [부산] 참된 봉헌  [5] 2453
701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5
700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690
699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75
698   [서울] 두 부류의 인간상  [6] 3063
697   [대구] 참된 봉헌  [2] 877
696   [마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3] 3131
695   [인천] (千)주님! (五)주님!! 주님(萬)을!!!  [5] 2710
694   [대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자.  [2] 1094
693   [청주] 계산법을 달리하라  68
692   [전주]천원짜리 봉헌금  [2] 3021
691   [광주] 외상 신자와 맞돈  55
690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과부 헌금] - 평신도주일  [3] 1991
  [수도회]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3] 1632
688   [대전] 쉐마 이스라엘…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1] 1543
687   [수원] 첫째 가는 계명  [3] 1653
686   [의정부] 사람, 사랑, 삶 - 사랑 나무  [2] 1672
685   [서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3] 2511
684   [춘천] 가장 큰 계명  [3] 1812
683   [전주]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픈 사랑  [2] 1607
682   [광주] 삶에 대한 축하, 사랑의 방식  109
681   [원주] 첫째가는 계명  [1] 1586
680   [대구] 하느님의 계명  [2] 1547
679   [인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1] 117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