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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조회수 | 2,511
작성일 | 06.11.04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가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사랑입니다. 제1독서에서 신명기 6장의 4절과 5절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4-5)
  
유다인들은 이 대목을 󰡐쉐마󰡑라고 합니다. 󰡐쉐마󰡑는 󰡐들어라.󰡑라는 뜻입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은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에 꼭 이것을 외웁니다. 그들은 이 󰡐쉐마󰡑를 적어서 손에 매달고 다니기도 하며 이마에 붙이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법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613조목이며 이 중에 무엇을 󰡐하라.󰡑는 명령 248조목, 무엇을 󰡐하지 말라.󰡑는 금령이 365조목입니다. 율법이 이처럼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한지도 잘 몰랐습니다. 오늘 율법 학자가 체면 불구하고 예수님께 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지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둘째는 이것이다.󰡐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12,29-31)
  
율법의 613조목에서 핵심단어를 찾아낸다면 바로 󰡐사랑󰡑이라는 두 글자가 남게 됩니다.

또 마르코 복음에서는 율법 학자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12,28)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9-30)라고 신명기를 말씀하시고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1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4,20)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재력이 있는 사람은 사랑하기 쉬워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에게 못해주는 사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뿐더러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미워하는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귀찮은 부분까지 감싸주고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꾸어야 합니다.
  
사랑과 미움은 마치 화초와 잡초 같습니다. 미움은 잡초와 같습니다. 잡초는 내버려두어도 무성하게 자라면서 화초들을 메마르게 합니다. 반면 사랑은 화단의 꽃과 같습니다. 정성들여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잡초에 쌓여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화단을 가꾸는 사람이 잡초를 뽑아내고 화초를 정성들여 키우듯이 사랑도 두 가지 노력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마음 속의 사랑을 키워가는 노력과 마음 속의 미움을 조금씩 없애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음은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화단인가? 잡초가 무성한 황량한 볼품 없는 화단인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발생했을 때 이해하려 애쓰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산다면 아름다운 화단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상처 주는 말이 튀어나오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더럽다고 생각하고 마음이 불안전하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 다하여 화내려는 마음을 참고, 생각과 힘을 다하여 상처 주는 말은 억제한다면 서서히 아름다운, 사랑스런 사랑의 마음이 싹틀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과 화단을 가꾸어가야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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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즘 성북동 산책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익숙했던 풍경들이 모습을 바꾸면서 그 모습에 어디라 눈 둘 곳이 없습니다. 매번 오가는 가을이지만 또 다시 처음인 듯합니다.

서울 성곽의 돌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며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 옛 이스라엘 정통 신앙 전승을 요약하는 말씀이며유다인들이 아침과 저녁 기도 시간에 반드시 기도로 봉헌하던 첫 문장인 신명기의 이 말씀들을 이렇게 한 자 한 자 떠올려봅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보았던 유다교 회당 모습도 떠오릅니다.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하기 이전에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아시리아 손에 넘어갔지요. 이스라엘 온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 세계 곳곳을 유랑하며 살아갈 때 유배지 디아스포라의 회당에서 유다교 랍비가 예배드리러 모인 사람들 앞에서 두루마리를 펼쳐 이 구절을 읽어주었겠지요. "셔마(너는 들어라) 이스라엘 …"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습이 참으로 처연하고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사두가이들과 논쟁을 벌이고 계십니다. 그 토론을 지켜보던 율법학자 한 사람이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하고 묻자 그때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신명기 말씀의 삼중 표현에 네 번째 요소를 더하여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굳이 율법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말씀은 신명기 말씀의 완성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몸소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히브 7,27 참조)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모범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보이는 이웃은 아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겠지요. 그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인 실체로 드러나며 스스로 입증이 되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말처럼 쉬울까?"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바라보니 저 멀리 남산 서울 타워가 보입니다. 조금씩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하늘 속에 서울 타워의 조명이 아득하게 빛을 발합니다. 무심히 바라본 타워는 낯설고 또 낯설어서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익숙해져 있던 시각에서 벗어날 때 문득 본래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시지요.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지극함과 진실함으로 어느 대상을 간절하게 생각하고 '사랑'의 정의에 맞는 그 무엇으로 상대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는지… 그 상대가 더더욱 하느님이라니! 저분께는 참으로 죄송하지만 아주 오래전 까마득한 일 같습니다.

이 생각에 묶여 걸음이 더는 옮겨지질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진지하고 다정하게 또 조용히 나를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서 늘 그러셨던 것처럼.

아마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한 그런 완전한 사랑은 불완전한 우리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채워주시면서 그분께서 친히 완성시켜 주실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사랑의 의무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파에 시달려 저만치 밀쳐놓았던 어쩌면 밀쳐놓았는지도 몰랐던 예전의 순수한 사랑을 다시 기억하라고 주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조용히 그러나 힘 있게 우리를 근원으로 부르시는 말씀.

17세기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는 충고합니다: "사랑은 모든 규칙에 우선하며 만사는 무엇보다 사랑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20세기 성녀 소화 데레사는 고백합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되겠습니다. 제 성소는 '사랑'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19-20세기 문호 톨스토이는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저녁 이런 상념에 잠긴 채 600년 도성 성북동 성벽 길을 내려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락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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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사랑하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율법을 완성하는 계명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0)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순서상 첫째와 둘째일 뿐 사실 ‘하나’의 계명이라 할수 있습니다. 특히 이웃 사랑은 모든 계명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하느님 사랑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면 눈에 보이고 쉽게 만질 수 있기에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는 나의 사랑에 항상 응답해 주시는 그런 분도 아니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어떻게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그리고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라는 둘째 계명을 제시해 주십니다. 이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의 기준은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그렇다면 이웃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할 때는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은 곧 또 다른 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말이나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은 온전히 몸과 마음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 마음과 의지, 자신의 생명까지도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또 다른 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오직 하나만이 남아 있습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고준석 신부
  | 11.03
451 34.8%
[서울]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어느덧 찬바람 부는 11월, ‘위령성월’의 첫 주일입니다. 멋들어진 가을 단풍잎들이 떨어져 버린 빈 가지에 바람 한조각 스쳐 지나가면, 우리도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며 어느새 한 해의 마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달입니다. 교회 달력으로는 올해의 마지막달입니다. 한 해의 전례력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흘러간 올한 해를 반성해 보게 되는 계절이며 우리보다 앞서가신 연령들을 위해 기도를 더 하게 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연중 제31주일의 복음 말씀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태오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는 달리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질문을 던진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나쁜 의도가 언급되지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칭찬까지 하십니다.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에 대한질문은 당대 유대교의 저명한 랍비들에게 곧잘 질문되어졌던 주요 이슈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랍비들도 248가지나 되는 계명들과 365가지나 되는 파생 법 규정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예수님 당시로서는 ‘성경’ 전체에 해당하는)에서 두 구절을 인용해서 단순, 명쾌한 답변으로 여러 율법의 중심을 잡아주십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큰 계명’ 하나만 질문 받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묻지 않은 ‘둘째가는 계명’까지 함께 언급해 주십니다. 마치 이 두 가지가 하나의 계명을 이루는 양면인 듯이 말입니다. 이 두 계명은 동전의 양면 같지만, 그러면서도 같지는 않은 서로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에서, 사랑의 척도는 ‘온 존재를 다 드리는 전적인 온전함’(‘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인 반면에, 둘째 계명에서 사랑의 척도는 ‘너 자신처럼’이 기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의탁과 그분 뜻에 따름이 하느님을 사랑함에 있어 필수이고, 이웃 사랑은 우리가 받고 있는 하느님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쉽지 않고, 용서하기 쉽지 않은 까닭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계시는, 그래서 당신 외아드님을 내어주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그 하느님을 아직 충만히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해의 마무리가 멀지 않은 시점에, 오늘 복음은 성경 가르침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늘 사랑에 굶주린 우리에게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아낌없이, 조건 없이 사랑하고 계시니 이 사랑에 응답하라고 요청하시는 듯합니다. 사랑에 굶주리면서도 사랑하기에 인색한 우리에게, 이웃 사랑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온 존재로 응답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 그 사랑하는 대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 : 2018년 11월 4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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