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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조회수 | 2,690
작성일 | 06.11.10
감사의 뜻인 제물 하느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아무런 아쉬움이 없으시지만, 우리 인간이 당신께 받은 것 중 일부를 바치도록 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임을 알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다. 플루타르코스가 언제 어디를 가나 제단이나 신전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든, 제물을 바치는 제단은 유사시대 이전에도 있었고, 신전은 극장이나 체육관보다 먼저 있었다. 이렇듯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지냄은 인간됨을 뿌듯이 느끼는 행위였다. 신명기와 레위기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시면서 제물을 가지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높은 분에게, 친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것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내가 아끼는 분이 우리 집에서 식사라도 하신다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른다.

봉헌은 행복의 요소 행복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마음은 행복을 만드는 공장이라고 마르쿠제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누구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말했다.(20,35 참조). 인간이 무엇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강요된 행위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된 보람을 느끼게 되는 자발적인 행위이다. 받기만 하는 신자가 수동적이요 비판적이라면, 봉헌을 하는 신자는 능동적이고 교회할동에 참여하며 발전시킬 뿐 아니라 자기들도 행복을 느낀다. 소록도에 갔을 때 직원들이 일러준 말이 내 뇌리에 새롭다. "여기 오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은 육지에서 무엇을 얻어다 신자들에게 주려고 하고 목자들은 오면 신자들에게 십일조 외에 헌금을 물리게 하는데도 삶의 보람은 천주교신자보다 개신교신자들이 더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바꿔보면 천주교 신부는 개신교 목사보다 더 보람을 느낀다는 말도 된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며(갈라 6,7;코린 9,11 참조),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두어 들인다.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인간의 판단은 겉모습에 있지만 하느님은 속마음을 보신다(1사무16,7 참조). 봉헌에 대한 인간의 잣대로는 양을 재지만, 하느님은 그 정성을 보신다. 그래서 오늘 성경 말씀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준다. 어느 본당에 항상 일등만 하고 싶어하는 교우가 있었다. 그 가정은 당시 장사가 잘 되어 남들보다 3~4배의 수입을 올렸기에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본당이 가난하여 행사 때 각 가정에서 추렴을 하였는데, "우리 집에는 끝으로 오세요. 남보다 많이 내야죠" 하길래 기대를 가지고 갔다. 수고한다는 말과 함께 듬뿍 주기를 기대하면서…. 그런데 그는 누가 가장 많이 냈나 훑어보고는 만원 낸 사람이 최고라면 거기에 5,000원도 1,000원도 아닌 백원을 얹어 10,100원을 내서 일등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장난일까? 너무 심하다!

십일조로 하느님을 시험해보라!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께서 축복하시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라는 말이다. 내 수입의 1/10을 내며, 내 시간의 1/10조로 하루 두 시간 정도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다면 죽어서 영생을 얻기 전에 벌써 이 세상에서 큰 축복을 체험할 것이다.

" 주님, 받으소서! 정성어린 이 제물."

춘천교구 허동선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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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에 맞게, 정성을 다해

저마다의 능력대로

사제들이 강론 시간에 가장 하기 싫은 말은 헌금에 관계된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가난한 과부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보여 주듯이 교우들의 영적 신심의 발전을 위해서도, 교회의 재정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위해서도 필요한 경우에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나눔에 무척 인색했습니다. 특히 하느님께 바치는 데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집과 자가용은 그렇듯 화려하고 멋진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교회에 봉헌하는 데에는 너무 인색한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수 십년 전이나 오늘이나 천 원짜리 헌금을 바치고 있습니다. 2천 원도 없는 사람의 편에서는 큰 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하루 운행 하거나 식구들과 직장 동료들과의 하루 외식 비용보다 엄청난 액수의 차이를 헌금 한다면 이는 하느님께 받은 은총에 반대되는 배은망덕이며 재화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 성바오로께서는 분명히 꼬집어 말씀하셨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 6~8)

오죽하면 “천주교 신자들은 천 원만을 헌금하기에 천주교이다. 만주교(?)라고 바꾸면 만 원을 헌금할 것이다”라는 비아냥과 “성당 들어가는 입구에 성수대가 있어서, 그 축성된 소금물을 찍고 들어가기 때문에 자린고비가 되어 헌금을 짜게 내는 것이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생겨 났겠습니까?.

내가 하느님께 형편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지, 억지로 마지못해 내는 것은 반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겉치레 뿐, 정성이 깃들이지 않던 예물을 바치던 것을 단호히 배척하셨던 그 진노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정성없는 마음을 보시면 또다시 호통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아모 5, 21~22)

사랑했던 교우들

예전 첫 주임신부로 부임했던 본당에서는 주교님의 명으로 새 성전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우들 약 600명이 구제금융때 성전을 짓기 위해 정말 많이 고생 하셨습니다. 워낙 공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저인지라 교우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성전을 짓지 않으리라 다짐 하였습니다. 그냥 저냥 머물다 떠나려는 생각까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도회지 큰 본당으로 모금운동을 절대 가지 않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다짐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착하디 착한 교우들의 정성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할머니 한 분이 오시어 당신께서 그동안 남의 밭에 나가 품을 팔아 모은 돈을 자신은 늙었으므로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성전을 남겨주어야겠다는 각오로 몇백만 원은 족히 되는 돈을 봉헌하셨습니다.

또다른 날은 한 분 할머니께서 당신 평생 소원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시는 것이었는데, 이제 성전을 짓는다면 그일보다 더 시급한 일이 어디 있겠냐며 성지순례를 위해 모아 두셨던 돈을 봉헌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겨울방학 동안 신문 배달하여 모은 돈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시골 성당 교우들을 위하여 더는 부담을 드리지 말자고 결심하여 도회지 성당으로 새 성전 짓기 모금운동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끔은 그때의 어려웠던 기억을 되새기며 사랑했던 교우들의 마음과 정성이 없었다면 새 성전이 완성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교우들의 정성이 미천한 사제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온 정성을 다한 봉헌은 얼마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며 받아주실까 생각합니다.

그 착한 교우들은 모두 독서와 복음의 과부들이었습니다. 죽을 처지임에도 엘리야를 위하여 밀가루 한 줌과 기름을 썼던 사렙타 과부였고, 가진 생활비 전부를 봉헌한 복음의 과부였습니다. 그분들 모두에게, 아니 우리 모두의 정성에 주님께 그 옛날 엘리야 예언자 시대의 기적이 재현되기를 청하여 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1열왕 17, 16)

▶ 배광하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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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과부의 헌금이나 독서에 나오는 말씀은 참된 봉헌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봉헌의 정신은 미사통상문 ‘연중평일 감사송 4양식’ 에 잘 표현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봉헌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느님에 대한 흠숭입니다. 하느님의 최상의 주권을 인정하는 흠숭지례(欽崇之禮)입니다. 봉헌은 자녀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인간의 도리(道理)” 입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치 않으십니다. 봉헌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드리는 행위 이전에 감사하는 행위입니다. 봉헌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 행하는 봉헌은 그 자체로 영광이고 은혜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우리는 죄에 대한 속죄의 행위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 예물을 봉헌합니다. 부자들은 율법에 따른 봉헌을 했지만 과부는 믿음의 법에 따른 봉헌을 했습니다. 율법에 따른 헌금은 기부금일 뿐이지만 믿음의 법에 따른 봉헌은 구원을 가져다주는 봉헌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로마 3,22-28).

주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이룰 수 없사오니, 주님의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고 이끄시어, 저희가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지금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우리는 끊임없는 탐욕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봉헌합니다. 헌금은 주님을 따르는 수 계생활과 봉헌생활의 한 방편일 뿐입니다.“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1티모 6,9) 그래서 자발적으로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2코린 9,7).

춘천교구 김재복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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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내어 놓는 만큼 행복하다.

깊은 숲속에 거미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거미는 오랫동안 친구가 없어서 외롭게 홀로 지냈습니다. 어느 날 거미가 잠에서 깨어나 거미줄을 보니 이슬 한 방울이 아름답게 맺혀 있었습니다. 거미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넌 누구니?” 이슬이 대답했습니다. “난 이슬이야.” 거미가 대답했습니다. “응, 난 오랫동안 친구가 없었어. 우리 친 구하자.” 이슬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알았어. 약속은 지킬게.” 그 후 거미와 이슬은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외로우면 서로를 생각하고 즐거움을 나누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이제 거미는 이슬 없 는 생활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미는 점점 이슬을 만지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미가 두 손으로 이슬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슬은 깨어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움켜쥐려고 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삶의 법칙인 듯합니다. 소유하지 않고 끊임없이 놓아주고 내어주어야 하는 삶, 그것이 바로 봉헌이요 사랑이라고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의 헌금은 자신이 가진 모 든 것을 바친 행위입니다. 많은 재물 중 일부를 봉헌하는 부자들과는 대비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치는 완전한 신뢰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유심히 보시며 과부가 전 재산을 바친 것을 칭찬해 주신 이유는 ‘더 많이 바치는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아브라함처럼 신뢰하는 만큼 두려움 없이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장 먹고 살아야 할 것까지 다 봉헌한 과부가 매우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을 온전히 신뢰하여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를 하느님께서 반드시 보호해 주시지 않으셨을까? 그 해 답으로 제1독서에서 나오는 사렙다에 사는 다른 과부에게 하느님께서 어떻게 갚아주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 과부는 가난했지만 매일 매일을 감사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많이 내어놓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은 아니지만 매일 주님께서 채워주시는 기적을 체험하는 행복한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얼마만큼 줄 수 있느냐가 얼마만큼 사랑하느냐 를 의미하고, 얼마만큼 사랑하느냐가 얼마만큼 행복한지를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만큼 행복합니다. <2015년 11월 8일>

▥ 춘천교구 이유수 요아킴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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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가난한 이들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마태 25,37)

“없는 사람이 더 낸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부자들에게는 부정적이셨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긍정적이며 우호적이셨다. 우리 교회는 부자들에게는 긍정적이며 우호적이나 가난한 이들에게는 부정적이지 않은지 오늘 복음은 묻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셨다. 우리도 칭찬받을 일을 해야 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루카 6,20)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는 마음이 하느님께 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있었다. 부자들은 마음이 딴 데 가 있어, 일부를, 그것도 아깝지 않은 것을 내어놓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칭찬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부자이며,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하며 살기에,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내어 드릴 수 없다. 문제는 마음이다. 가난한마음, 과부의 마음이 필요하다. 이 과부는 궁핍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쳤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게 태어나셨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루카 2,7) 그분께서는 루카복음에서 당신 열두 제자들과 일흔두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하시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청년이 당신을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루카 19,8) 요한복음 6장에서도 가난한 집 아이를 통해 장정만 오천 명을 먹이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신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요한 6,9)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적과 말씀은 이 시대에도 그렇게 살았던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소박한 삶과 법정스님의 말씀은 우리의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시킨다. 마하트마 간디는 공항에서 세관원의 질문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나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란 책을 좋아한다.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입니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집착은 괴로움입니다. 얽매임에서 벗어나면,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섭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습니다.”

▦ 춘천교구 박우성 사무엘 신부 : 2018년 11월 11일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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