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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조회수 | 2,646
작성일 | 06.11.10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참으로 소중한 것들을 너무 쉽게 얻고 있다. 그것들은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독점할 수 없고 독점해서도 안 되는 것들이기에, 하느님께서는 누구든지 찾으면 얻을 수 있는 곳에 그것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래서 정작 그 소중함에 대하여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다. 너무 흔해서 언제든지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을 어느 순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동안 고마워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게 된다. 그 소중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은 ‘생명’이다. 물의 화학기호는 ‘H2O’로,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가 만날 때 물이 생겨난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이와 같이 자신을 내놓아야 하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양을 내어놓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H2O라 해서 모두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물은 생명을 살리기보다는 죽음을 부르기도 한다.

물 중에서 제일 좋은 상태의 물을 ‘육각수’라고 부른다. 육각수는 정상적인 사람의 세포가 가장 좋아하는 물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먹으면 성인병을 예방할 수 있고, 정상세포를 도와 몸속에 침입한 바이러스를 저지하거나 없애주기도 한다.

또한 물은 머무르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자리를 옮긴다. 샘에서 도랑을 이루고 시내가 되어 강으로 흘러가며, (자신을 남기지 않고 내어줌으로써) 마지막에는 바다라는 종착역에 이른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 ‘생명’을 완성한다. 만약 ‘죽음’이 바다에 이르면 바다는 몸살을 앓아가며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바다는 ‘소금’이라는 치유약으로 생명을 살리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존재이다. 어느 날엔가는 하느님께 가야만 한다. 하느님께 가는 우리는 모두가 죽어야 하지만,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당신만의 방법으로 ‘생명’으로 바꾸신다.

오늘 우리는 생활비 전체를 봉헌한 한 과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과부의 행위야말로 세상에 필요한 육각수이며, 소금을 담고 있는 바다의 모습이다.  H2O - 둘과 하나의 만남 - 이 관계는 불공평한 계약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데는 저마다 내어놓아야 할 몫이 있으며,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하는 행위야말로 어떤 것보다 값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자들이 넣은 큰 돈과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만나 물(H2O)을 이루고 그 물은 바다가 되어 세상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려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치고도 얼굴조차 들지 못한 과부의 겸손함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본다.

수원교구 김형중(그레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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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이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 된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작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부(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그러기에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5,3)라고 노래하고 있다.

제1독서: 1열왕 17,10-16: 사렙다의 과부의 믿음

엘리야는 과부에게 처음에는 물만 달라고 하였었지만 그 다음에는 떡도 달라고 하면서 더 많은 요구를 하고 있다. 마치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 숨을 빌려달라는 것과 같다. 그 여인은 오랫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이제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들로 식사를 하고는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 계속 주시리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안심시킨다. 그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믿고 그에게 베풀었을 때에 더 많은 것을 보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엘리야가 전한 주님의 말씀 그대로 뒤주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도 동이 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사렙다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중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을 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되는 곡식들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기까지 한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없는 봉헌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제2독서: 히브 9,24-28: 단 한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

오늘 제2독서에서 역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25절),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26절).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에는 죄와 직접 관계를 맺으셨으나(로마 8,3; 2고린 5,21 참조), 이제 다시 오심으로써 오늘 독서의 두 여인과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여인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이루어진 희생을 바치신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독서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 조욱현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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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작업 방식

사렙타의 가난한 과부는 엘리야를 만나기 직전,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참지 못해 세상을 떠날 작정을 합니다. 그녀는 생의 마지막 의식으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는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입니다. 그즈음 아 합의 눈을 피해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며 굶주림에 지친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1열왕 17, 8).

하느님께서는 왜 엘리야를 사렙타의 부유한 사람들을 놔두고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을 결심한 가난한 과부에게 보내신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고백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쉽게 배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진정 ‘모호한’ 하느님이십니다. 사랑 때문에 인간이 되어 무한을 버리고유한을 택하신 바보 같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 위의 무기력을 택하신 안타까운 하느님이십니다.

사렙타의 과부가 구웠던 마지막 빵은 세상의 어떤 빵보다 가치 있는 빵입니다. 생을 향한 의지와 죽음을 향한 동경이 녹아 있는 이 빵은 세상의 수많은 식탁 위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소비되는 빵과는 다릅니다. 또한, 자신의 생활비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놓는 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은 형식적으로, 혹은 아까운 마음으로 봉헌되는 세상의 수많은 봉헌금보다 더욱 가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빵’을 선택하십니다. 그분께서 선택하신 빵은 사렙타의 과부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구워낸 빵이자,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헌금을 준비하기 위해 먹지 않고 포기한 빵이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과 세상을 위한 봉헌제물로 내어놓은 아들 예수의 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무엇을 내어놓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모호한 ‘작업방식’을 믿는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생의 어려운 순간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봉헌하는 우리의 정성을 당신의 구원사업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한 봉헌을 하는 우리 삶의 ‘밀가루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 병은 마르지 않을 것’(1열왕 17, 15)입니다.

수원교구 백정현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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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不誠이면 無物”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가난한 과부는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하고…. 참 기묘하죠?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속에서 열불이 났을 것 같습니다.그러다 참다못해 한마디 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율법학자들이 등쳐먹은 돈도 과부 돈이요, 렙톤 두 닢도 과부 돈이니 결국은 과부가 다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자들은 그저 생색이나 냈을 뿐이지 수고한 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셈하시는 법은 우리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가 얼마를 냈느냐’를 가지고 계산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냐’에 따라서 계산을 하십니다. 그리고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얻어진 것인지 아니면 기막힌 술수를 써서 얻은 것인지도 명확하게 구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정당하게 노력하고 그 대가로 얻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칠 때 기뻐하신다는 말이지요. 헌금 액수의 많고 적음은 본당 신부나 기뻐하는 일이지 하느님은 개의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흔히 “우리 천주교는 천 원짜리를 헌금한다고 해서 ‘천주교’라고 합니다.”라며 농담을 하곤 합니다. 말에 가시가 있지요. 헌금을 할 때도 행여 들킬까 잘 감추었다가 얼른 헌금함에 집어넣고 사라집니다. 만 원 이상의 거액을 헌금할 때는 좀 여유가 있습니다. 남이 볼 수 있도록 잘 펴서 손에 들고 공손하게 넣고서는 서서히 돌아섭니다. 거의 드문 경우지만 ‘신사임당’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고 표정관리까지 잘해야 합니다. 자칫 비난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자랑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느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것이 정당한 노력으로 얻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내는 것인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구겨진 천 원짜리를 다리미로 잘 다려서 미사 책에 고이 넣어 두었다가 바치는 정성어린 헌금과 불룩한 지갑에서 지저분한 만 원짜리 한 장을 추려내듯 골라내서 바치는 성의 없는 헌금을 정확히 가려서 계산해 두십니다.

《중용》에서 말하기를 “不誠이면 無物”이라고 했습니다. 정성이 담기지 않았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미 하느님 앞에서 불성실한 것으로 판명이 났는데 아무리 많은 돈을 바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늘나라 통장계좌에는 입금되지를 않으니 말입니다. 작은 헌금 하나로도 이렇듯 명확한데 하물며 온 인생을 봉헌하는 것은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2015년 11월 8일>

▥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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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면서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 이외의 모든 신자입니다. 그들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교회와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 성령의 열매를 맺고(사제직),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예언직), 그리스도께 봉사하는(왕직) 사명을 수행합니다.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현세의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 뜻대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복음화와 교회의 구원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세웁니다.(교회헌장 31)

한국교회는 지난해(2017.11.19.~2018.11.11.)를 ‘한국평신도희년’으로 기리며 ‘그리스도인답게 살겠습니다’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신앙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창조질서의 회복과 생명수호에 앞장서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다가가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등 희년정신의 실천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하고 한 해를 지냈습니다. 희년 정신에 얼마나 충실한 삶을 살아왔는지 한번 성찰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당신께 의탁하는 가난한 이들을 돌봐주시는 사랑이심을 압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가난한 과부가 생계비를 하느님께 바치는 참된 봉헌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제1독서와 복음에는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별에 차이가 있는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문화에 비추어보면 과부의 삶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남성은 외부에서 공적역할을 하지만 여성은 집안생활을 하기에 과부의 경우는 남편을 잃은 사실도 마음속에만 간직합니다. 장남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면 처지는 더욱 어렵고, 아들이 없다면 친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레위 22,13; 룻기 1,8) 상속법에서도 제외된 과부는 하루벌이로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1열왕 17,10-16)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땔감을 줍고 있는 한 과부에게 마실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그녀는 수년간 가뭄 끝에 단지에 남은 밀가루 한 줌과 기름으로 어린 아들과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죽으려고 땔감을 마련하던 참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빵을 만들어 내오면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굳게 믿고 실천한 과부는 기적을 체험한 뒤 굶주림 없이 살아갑니다.

제2독서(히브 9,24-28)는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십자가상에 당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치셨음을 전합니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따릅니다. 영원한 생명을 고대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 굶주린 이,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화답송, 시편 146)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계시어 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는 모습을 보신 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연민의 정을 보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마르 13,1-2)도 성전의 파괴에 대한 예고입니다. 외적인 품위 유지를 중시하는 지중해 문화를 감안할 때 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를 몽땅 봉헌하고서도 부끄럽게 여겼으리라 짐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 12,38)고 이르십니다. 모세의 율법전문가인 그들은 처음에는 구약에 기록된 하느님의 뜻을 해석했으니, 비빌론 유배 이후는 대부분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평신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나무라시며 ‘코르반’ 이야기(마르 7,11)를 하신 적도 있습니다. 코르반이란 유다인들이 자신의 재산이나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신성시하여 부모를 공양하거나 과부처럼 가난한 사람에게 사용하지도 못했답니다. 그런데도 과부가 성전에 봉헌의무를 다하자니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교적 가면을 쓰고 나눔 없이 자신의 체면이나 세우려고 긴 겉옷과 성물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지출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군중들보다 높은 단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잔치 때엔 귀빈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는 자들은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은 것입니다.(마르 12,40)

현대판 코르반이 없는 건 아닙니다. 화려한 성전을 지어 ‘주님께 봉헌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위화감을 주고 그들을 돌보지 않거나, ‘저의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애덕에 인색하다면 코르반을 외치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빈방이 없어 구유에서 나신 예수님의 가난한 삶을 묵상해봅니다. 주님께서 머무실 방 한 칸이 없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고, 빈 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으며, 묘지 한 평이 없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비움의 은총이고, 정성 어린 희생이 참된 봉헌입니다. 평신도희년을 보내며 기도와 성사와 봉사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보물임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로 교회입니다, 자유로이 주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된 교회가 살아있도록 자기 몫의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김창선(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 가톨릭신문 2018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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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대구] 하느님의 계명  [2] 1547
679   [인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1]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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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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