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나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1 34.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조회수 | 2,524
작성일 | 06.11.10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잘 지내셨지요?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지요. 지난 11월 7일이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이었습니다. 개구리가 동면을 준비하고 온갖 나무들의 낙엽이 떨어지고 여름 내 자랐던 풀들이 말라가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새싹이 돋아나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납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날씨가 점점 추워지면 언제나 의지할 곳 없는 이웃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사랑의 나눔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복음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모습과 가난한 과부의 전적인 봉헌이 대조를 이룹니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모습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성서에서 고아와 과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회적인 약자들을 대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사회적 의무이고 신앙인들의 덕행이었습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도 사렙타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에 갔을 때 땔감을 줍고 있는 과부에게 마실 물과 빵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과부에게는 먹을 것이라고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이 조금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렙타 과부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을 빵을 엘리야 예언자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과부의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가난한 과부와 제1독서에 나오는 사렙타 과부 이야기는 너무도 비슷합니다. 가난한 과부들은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자신의 삶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봉헌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일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서 필요에 따라 남겨두는 만큼 우리들의 마음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봉헌할 때 주님께서 내 삶을 보호해주실 것이고, 참된 평화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삶을 봉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맏물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곡식이든 모든 첫 수확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니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요셉성인과 성모님께서도 첫아들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 어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리고 가서 비둘기를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우리도 매주일 우리 삶의 결실을 모아 봉헌을 합니다. 우리의 봉헌금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제물입니다. 우리 마음을 담아서 자기 형편에 맞게 정성이 들어 있는 제물을 봉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 가난한 이웃,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는 나눔의 실천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하느님 제단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얼마나 사랑하면서 살았는가?’, ‘얼마나 나누면서 살았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로 받은 오늘 하루, 우리 인생 멋지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마음에 쏙 드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알아서 채워주실 것입니다.

안동교구 최숭근 비오 신부
451 34.8%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 이것은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의 아름다운 우화의 제목입니다. 이 우화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집 저집 문전걸식을 하면서 어떤 마을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당신의 황금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왕 중 왕이신 당신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 나는 이미 당신의 자선을 기대하며 먼저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돈을 주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습니다. 당신의 시선이 내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드디어 왔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즉시 내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줄 것이 무엇이냐?' 거지에게 동냥을 하기 위해 손을 내미는 것이 왕이 할 만한 일입니까? 나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얼떨결에 나는 내 식량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들 가운데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줄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

형제자매 여러분,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우화입니다. 제목이 그러하듯이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습니다.’ 사렙타의 과부가 그러했습니다. 먹고 죽을 양식이었지만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었고 예언자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자기가 베푼 것을 몇 배로 보상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열왕 17, 16)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날 헌금함 앞에서 헌금하는 장면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돈 많은 부자들은 하느님께 화해의 제물을 봉헌하기 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또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 생각하고서는 거들먹거리며 봉헌했습니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과부는 거의 아무것도 봉헌하지 못하고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에 해당하는 렙톤 두 개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1-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부자들처럼 남는 것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 44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생계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까지도 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다만 자기들이 가진 재산 - 아마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 의 부스러기 정도를 바쳤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탁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더 나아가 순수하면서도 말없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러한 희생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먹고 죽을 양식까지도 내어주는 사렙타의 과부와 성전의 헌금함에 모든 것을 다 털어 봉헌하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과부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 믿는 이들이 취해야 할 참된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믿는 하느님을 위해서 이들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을 기꺼이 감수인내 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오늘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두 여인은 모든 것을 주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는 우화에서 거지 주인공이 “왜 나는 모든 것을 줄 용기를 갖지 못했을까?”라고 후회했듯이 결코 그런 후회하는 삶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안동교구 정상업 신부
  | 11.10
451 34.8%
[안동] 하느님은 진실한 봉헌을 아신다.

찬미 예수님! 한 해의 끝자락에 그리고 하루하루를 마무리하며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아버지 나라에 들기에 합당했는지 반성합니다. 오늘 말씀도 하늘나라를 위해 또 자신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내어놓고 사는지 돌아보게 해줍니다.

제1독서는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열왕기를 보면 역사가 진행될수록 암울하고 쇠퇴해가다 외세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비극적 종말은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왕들의 사상과 통치에 있다고 열왕기는 고발합니다.

그 중에서도 엘리야 시대의 아합 왕은 그 이전의 어떤 임금보다 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는 초대 왕을 뛰어넘어 우상을 숭배하는 왕비를 맞아들이고 바알을 섬기기까지 한 것입니다. 남유다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종교적인 전통과 질서가 무너진 북이스라엘은 심각한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그 때에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가뭄을 예언합니다. 가뭄 예언은 야훼 하느님과 바알의 대결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종교의 대표적인 신 바알은 폭풍우의 신이자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모든 것이 야훼의 주권임을 선포합니다. 그러자 야훼를 거슬러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은 엘리야를 박해합니다.

그에 비해 궁핍한 이방의 과부는 단순하고도 신뢰에 찬 모습을 보입니다. 특이한 점은 하느님이 엘리야를 이제벨의 고향이자 바알의 고향인 시돈 지방의 사렙타로 보낸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심장에서 엘리야는 야훼의 전능하심을 증거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가뭄과 기근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이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뒤에 이어지는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은 여기서 이미 승부가 난 것입니다.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후 벌어지는 성전에 관한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주님은 율법학자들의 명예욕과 소유욕을 질타하십니다. 유다교에서 과부와 고아는 특별한 법률적 보호를 받는 약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법률가로서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이들이 신분을 이용해 과부들을 갈취해온 것입니다. 과부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큰 사례금을 챙기거나, 재산을 강탈했을 수 있습니다. 또 법적 후견인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꾸며 부당한 이익을 챙겼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재산이 많았다 하더라도 결국엔 다 빼앗기고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런 과부 한 사람이 성전에서 가진 것을 전부 봉헌합니다. 여기서는 헌금의 가치를 말한다기보다 성전 규정이 잘못 되어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를 빙자한 율법학자들의 그릇된 행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반면 과부의 희생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예시합니다. 여인의 행동이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타락한 성전제도와 기득권자들의 희생물일 수 있는 것처럼 주님 역시 성전 기득권자들의 희생물이었습니다.

끝으로 여인의 모습은 제자직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사실 불의한 세상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제도적 희생물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는 자는 복음을 위해 희생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두 가난한 과부의 희생과 봉헌은 히브리서에서 들은 것처럼 당신 죽음과 피의 제사를 통해 온전히 당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제사와 닮았습니다.

독서와 복음의 등장인물들의 극명한 대조는 하느님 앞에서 참된 가치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무엇을 봉헌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내어놓지 못하는지 잘 살펴야겠습니다. <2015년 11월 8일>

▥ 안동교구 손성문 사도 요한 신부
  | 11.06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1]
!   [전주] 종말론적 교회 
!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2]
!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3]
!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7]
!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3]
!   [대구] 빛과 소금의 삶  [1]
!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2]
!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4]
!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2]
707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6
706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3] 1764
705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666
704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646
703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11
702   [부산] 참된 봉헌  [5] 2453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24
700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690
699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375
698   [서울] 두 부류의 인간상  [6] 3063
697   [대구] 참된 봉헌  [2] 877
696   [마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3] 3131
695   [인천] (千)주님! (五)주님!! 주님(萬)을!!!  [5] 2710
694   [대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자.  [2] 1094
693   [청주] 계산법을 달리하라  68
692   [전주]천원짜리 봉헌금  [2] 3021
691   [광주] 외상 신자와 맞돈  54
690   (녹) 연중 제32주일 독서와 복음 [과부 헌금] - 평신도주일  [3] 1991
689   [수도회]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3] 1632
688   [대전] 쉐마 이스라엘…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1] 1543
687   [수원] 첫째 가는 계명  [3] 1653
686   [의정부] 사람, 사랑, 삶 - 사랑 나무  [2] 1672
685   [서울]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3] 2511
684   [춘천] 가장 큰 계명  [3] 1812
683   [전주]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픈 사랑  [2] 1607
682   [광주] 삶에 대한 축하, 사랑의 방식  109
681   [원주] 첫째가는 계명  [1] 1586
680   [대구] 하느님의 계명  [2] 1547
679   [인천]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1] 117
1 [2][3][4][5][6][7][8][9][10]..[18]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8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