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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천원짜리 봉헌금
조회수 | 3,020
작성일 | 06.11.10
찬미 예수님!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을 통해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렙톤 두 닢, 렙톤은 신약시대에서 가장 작은 화폐단위였습니다. 복음에서 렙톤 두 닢을 콰드란스 한 닢으로 계산했는데, 이 콰드란스에 64배를 곱해야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요즘 기준으로 7만원으로 잡아 계산하면 렙톤 두 닢은 대략 천원 가까운 금액이 됩니다.

과부가 봉헌한 천원,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이 과부의 봉헌금을 극찬해 주십니다.

왜 그러셨을까?

참된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으로,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그분의 섭리하심에 맡기는 동시에 받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자발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언급된 과부는 단순히 자기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봉헌의 의무를 지킨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여인은 하느님께 쓰고 남은 여분을 바치지 않고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먼저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봉헌을 통해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렙톤 두 닢, 생활비 전체인 천원짜리 한 장을 그녀가 자신을 위해 남겨 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이 여인은 자기 소유의 일부가 아닌 자신의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마태 22,37 참조).

이 여인은 자신이 하느님께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과부의 봉헌이 있은지도 벌써 이천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거쳐 오면서 진정한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라는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천원짜리만 좋아신다’는 괴상한 논리로 바뀌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매 주일마다 천원짜리가 수북한 봉헌바구니는 그러한 논리가 이미 확신의 차원에 도달한 것을 반증하는 것은 또 아닌지…

우리는 봉헌 때마다 하느님께 받은 은혜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금도 2천년 전에 한번 칭찬받았던 렙톤 두 닢(천원)의 형식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전주교구 염태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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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봉헌과 같은 거룩한 행위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무리에 접어 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위령성월을 보내며 우리 보다 앞서 간 이들을 기억하고, 인간 모두의 공통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권고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어떤 일인가? 이유도 모르고 하는 고생(苦生), 왜 그 고생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행하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던가? 고생 없는 삶이 있던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고생이 빠진 삶도, 고생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고생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고생하며 자신의 삶을 다 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고생의 대가가 무엇인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죽음! 죽음이 고생의 결과요 대가라면 우리는 너무도 허망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히브 9, 26)라는 서간의 말씀을 통해 보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입니다”(히브 9, 27). 죽음은 우리 평생을 통 틀어 딱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한 번이라고 하는 것은 곧 되돌릴 수 없다, 후회 해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되돌리고, 무엇을 후회한다는 말인가?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3-44). 과부로서 힘든 삶을 산 그녀가 고생하며 모은 재산 모두를 봉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봉헌’과 같은 거룩한 행위입니다. 비록 내가 정한 때에 봉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 때에 내 자신의 삶 전체를 봉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봉헌한 고통의 십자가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봉헌 예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고생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주어질 봉헌의 그때에 하느님 앞에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을 봉헌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죽음은 곧 봉헌이요, 인간의 고생스러운 삶은 하느님께 드릴 맞갖은 봉헌 예물이 됨을 묵상하는 거룩한 위령성월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주교구 김관우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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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무엇이 진정한 봉헌이겠습니까?”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마르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 양식, 오늘의 이 기적은 곧 성체성사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썩어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사렙타의 여인은 이 기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시대에 이방신인 바알을 따르던 아합왕과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은 몇 해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어떠한 먹을 것도 구하기 어렵던 순간에 오늘 사렙타의 이 과부는 마지막 양식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어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엘리야는 그 마지막 양식을 자신에게 나누어 주라고 요청합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누가 굶어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마지막 남은 양식을 나누어주겠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예언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것은“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처럼, 과부는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봉헌하였기에 오늘의 이 기적을 목격하였습니다. 바로 이 메시지가, 곧 말씀에 대한 믿음과 봉헌의 행위가 오늘 복음과 제2독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데 사실 액수로 따지자면 과부의 봉헌은 부자들의 봉헌에 비할 것이 못되는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9)라는 것과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9,7)라는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봉헌이겠습니까?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결국 다 죽을 때 놓고 가는 것들로서 우리는 잠시 그것들을 관리하고 있을 뿐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 곧 우리의 몸, 영혼, 마음입니다. 봉헌을 하는 행위는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으며 자신의 전부, 곧 자신의 미래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신뢰를 보여주었기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을 굶겨 죽이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라는 제2독서의 말씀 또한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께서 기쁜 마음, 곧 성부에 대한, 그리고 피조물에 대한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셨음을 알려줍니다. 이 거룩한 행위로 우리는 ‘썩어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양식인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기쁜 마음, 곧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라는 요청입니다. 아멘. <2015년 11월 8일>

▥ 전주교구 하성훈 요셉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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