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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된 봉헌
조회수 | 2,452
작성일 | 06.11.11
오늘 복음은 우리가 참된 봉헌에 대해 묵상하게 합니다.“주여, 나의 몸과 맘 모두 드리오니…” 우리가 봉헌 성가(211번)로 자주 부르는 노랫말 입니다. 주님의 칭찬을 들은 과부처럼(복음), 엘리야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른 사렙타 마을의 과부처럼(1독서) 우리들의 봉헌도 이 노랫말대로 행해지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봉헌하고 돌아서면,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예물이어서 한편 죄송하고, 그래도 내 형편에 큰맘 먹고 아낌없이 봉헌하길 잘 했다고 마음 뿌듯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봉헌하고 돌아서면, 아는 분이 볼까봐 얼른 빠져나가기 바쁜 사람들도 있고, “뭔가 더 봉헌해야 할 것 같은데…”이런 생각에 뒤 꼭지가 당겨지는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저 습관적으로 봉헌합니다. “너무 적어 미약하온 이 제물, 그러나 가진 전부여서 정성어린 이 제물…”(성가 217번)

두 과부의 봉헌이 우리의 귀감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두 과부의 봉헌 모습은 “단 한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물리치신 대사제”(2독서) 예수님의 십자가 봉헌을 꼭 닮았습니다. 주님께 거저 받아 잘 사용했으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도로 돌려드린다는 정신으로 봉헌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국, 참된 봉헌은 봉헌물의 많고 적음 혹은 고급, 저급 등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참된 봉헌은 그 봉헌하는 사람의 정성에 달린 문제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달라짐을 봅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은혜 갚음도 제대로 합니다. 반면에 감사 지수가 낮을수록 욕심지수가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제가 있는 본당에서는 지금 새 성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솔직히 힘들고 머리 아픈 일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 은총이 풍부하다 했습니다. 그 덕분에 감사지수가 높은 참된 봉헌자들을 참 많이도 만났습니다. 투박하지만 오랜 사랑의 흔적이 묻어나는 노부부의 금반지와 팔찌, 20년 이상 보관한 아이들의 돌 반지, 2차 ? 3차 봉헌 약속 면담 때 느닷없이 풀어주던 어느 자매(과부)의 낡은 금줄 시계… 다 열거 못할 정도로 저를 순간순간 당황하게 했던, 그리고 가슴 찡하게 했던 일들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된 봉헌을 하신 그분들 모두가 십자가 위에서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가장 부요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닮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보화를 쌓을 줄 아는 슬기롭고 참된 부자들인 그분들이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열왕 : 17, 16)

부산교구 경훈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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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율사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고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으로 꾸며졌습니다. 율사는 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 곧 약자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며,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곧 그 시대 통용되던 화폐의 최소 단위 동전 두 닢을 헌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 가난한 과부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을 지닌 남편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런 과부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시기에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자기가 많이 가져야 합니다. 율사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처신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과부에게는 받을 존경도,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자기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려 합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정산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알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존의 원리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은 오늘 과부의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바치라는 뜻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며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관대한 마음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데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데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기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다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1,27)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小人)이 됩니다. 대의(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누리는 것에만 골몰합니다.

돈과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고 돕는 마음에 진리가 있고, 그런 마음이 참다운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따라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예수님도 관대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치부(致富)하며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친다면서 인간이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이 꿈꾸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사람은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로운 마음 안에 그 자유의 원천으로 살아 계십니다.

부산교구 서겅석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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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만큼 내어 놓기


오 헨리의 유명한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 가난한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유난히도 서로 아끼고 사랑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그들에게 고민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서로를 위한 선물을 살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시계에 시곗줄이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자신의 금발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곗줄을 선물로 삽니다.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가꿀 수 있도록 머리빗을 사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끼던 시계를 팔아 버립니다. 둘은 선물을 주기 위해 만나는 순간, 자신들이 마련한 선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머리빗과 시곗줄로는 견줄 수 없는, 값으로 환산되지 않는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큰돈을 헌납한 부자들이 아니라 동전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를 칭송하십니다. 과부가 낸 동전은 하찮은 것이지만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일부를 바친 부자들과 달리 자신이 가진 전부를 하느님께 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동전 두 닢이 화폐 가치 이상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흔히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성당에서도 교무금이나 헌금을 많이 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여유가 되어야 성당에서 봉사 활동이나 기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유 시간이 기도나 봉사 시간과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직 시간이 날 때만, 그리고 여유의 돈이 생길 때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들은 없을 것입니다. 시간과 돈과 능력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자녀들에게 더 주기 위해 부모들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유 시간이나 여분의 돈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우리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한 중에 모든 것을 내어 놓은 과부를 통해 부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모든 것, 당신의 생명마저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시면서, 자신의 시간, 재능 그리고 몇 푼의 헌금도 하느님께 내어 놓기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시간과 돈과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내어 놓으면 놓을수록 더 넉넉해질 것입니다.

부산교구 박태식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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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과 독서를 통해서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유독 하느님의 마음을 당기고 예수님의 시선을 끌었던 두 여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의 지독히 지난했을 삶의 자락을 엿보게 됩니다.

믿음이 좋으면 복을 받아서 잘 먹고 잘살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 시험당하기 딱 좋은 구절입니다.

그날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줌으로 빵을 구워 아들과 먹고 ‘죽을 작정’을 하고 있는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먹고살도록’ 조처해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낌없는 봉헌을 통해서 주님을 감동시켰던 구차한 과부에게도 예수님의 살뜰한 보살핌이 따랐을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결코 ‘말로만’ 칭찬하고 데먼데먼 모른 척하셨을 리는 없을 것이라 싶은 것입니다.

나아가 그날 주님께서 보여주신 따뜻한 베풂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또렷한 귀감이 되어 마침내 야고보 사도는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는 것이 곧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임을 명확히 밝힐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야고 1,27 참조).

문명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세상에서는 가난한 이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단단할지라도 그것으로 세상의 풍요를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세상이 말하는 ‘복’과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축복’의 의미를 살피고 싶습니다.

세상은 착하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왜곡했습니다. 나아가 천박한 가치관을 덧칠해대는 중입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나 이익을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져주고 나 때문에 손해당하더라도 묵묵하게 입 다무는 사람은 무던하다고 여깁니다. 순전히 본인의 이익과 편의에 따라 자기중심 논리로 인간성마저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진리의 기준을 잃고 주님의 뜻에 상반되게 살아가는 유감 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손해 보되 손해를 끼치지 말라고, 차라리 내가 앓을지라도 이웃을 아프게 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남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용당할 것을 권하십니다. 이래서 세상은 주님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눈에도 폼나면 따라서 믿겠다고 비아냥댑니다. 이 때문에 약간 허탈합니다. 혹간 면구스럽습니다. 믿음이 좋으면 축복을 얻는다는 약속이 무슨 소용이냐고 되물으며 신앙의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하느님 믿어도 별수 없네”라는 세상의 비웃음에 승복 당합니다.

그날 ‘죽을 작정’을 할 만큼 곤고한 삶 안에서도 낯선 엘리야 예언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빵을 챙겨 건네던 사렙타 과부의 모습이 믿음의 저력입니다. 가진 것이라곤 ‘렙톤 두 닢’뿐이면서도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고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다’ 그분께 봉헌할 것을 작정하고 실천했던 가난한 과부의 결단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의 축복이란 우리의 삶에 놓인 재난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명의 자세로만 가늠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복음적인 삶은 재난이나 고난을 비켜가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라 살펴집니다.

그날 주님을 믿어 선하게 생각하고 착하게 지낸 두 과부의 고통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것으로 끝장나지 않았습니다. 결코 손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난은 오히려 놀라운 하느님의 은혜를 끌어 들이는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앞이 캄캄한 고난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 삶을 가로막는 재난에 숨이 막힐 때, 먼저 이웃을 생각했던 사렙타 과부의 온유한 사랑과 두 렙톤마저 아끼지 않았던 과부의 용기 있는 믿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넘어, 끝내 승리하도록 도우시는 그분의 손길을 느끼며 힘을 내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있는 믿음과 희망이 그분의 시선을 당기고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된 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는 좋은 것 하나도 모자라지 않으리라”(시편 34,11)는 주님의 약속을 믿어 채움 받는 참 행복의 주인공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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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된 봉헌

오늘 복음 말씀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입니다.“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 43ㄴ∼44)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전부 헌금한 어느 과부의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탁과 신뢰의 자세를 부각시키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전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께 뭘 바친다는 것은, 그분께서 주신 것을 그분께 되돌려 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마치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을 내놓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못해 봉헌하기도 하고, 대충 건성으로 봉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성이 빠진, 건성으로 하는 봉헌은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 중에 헌금을 하려고 제대 앞으로 나아갈 때, 몸가짐을 단정히 하는 가운데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남들이 하니까 적당히 눈치 보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진정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한 손으로 대충할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정성껏 함으로써, 그 모든 과정이 마치 기도가 되게끔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손이 모아지면 마음이 모아진다.’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곧, 밖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마음 자세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별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늘 살아가는 데만 급급했지 주님께 정성을 다해 봉헌하기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지. 먹고 마시는 데는 스스럼없이 돈을 쓰면서도, 주님 대전에 봉헌할 때는 머뭇거리고 망설이며 인색하게 굴지는 않았는지. 일주일에 겨우 한 번 하는 헌금을 성의 없이 하면서도, 입으로는 성가를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 사랑하고 의지하여 주만 따라 가겠네’하고 부르지는 않았는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떠올리며, 우리의 봉헌이 진정 주님께서 기뻐하실 정성어린‘참된 봉헌’이 되길 빕니다. <2015년 11월 8일>

▥ 부산교구 석판홍 마리오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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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율사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고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으로 꾸며졌습니다. 율사는 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 곧 약자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으며, 자기의 재물을 늘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곧 그 시대 통용되던 화폐의 최소 단위 동전 두 닢을 헌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저 가난한 과부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을 지닌 남편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입니다. 그런 과부가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시기에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율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대우를 받아야 하고, 자기가 많이 가져야 합니다. 율사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처신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오늘의 과부에게는 받을 존경도,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자기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려 합니다.

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그분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정산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알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 우리 생존의 원리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은 오늘 과부의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바치라는 뜻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전혀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며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관대한 마음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데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데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기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다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1,27)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小人)이 됩니다. 대의(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누리는 것에만 골몰합니다.

돈과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고 돕는 마음에 진리가 있고, 그런 마음이 참다운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롭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판단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따라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예수님도 관대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치부(致富)하며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친다면서 인간이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이 꿈꾸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사람은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로운 마음 안에 그 자유의 원천으로 살아 계십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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