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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千)주님! (五)주님!! 주님(萬)을!!!
조회수 | 2,710
작성일 | 06.11.11
하느님의 자녀로서 늘 자신의 신앙의 자세를 성찰하고 고백해야 한다.

신앙인은 하느님 안의 존재들이다. 철저히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 대전제를 벗어난 신앙인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은총을 받았다면 그 받은 은총을 드러내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나 표시,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을 보여줘야 알 것이 아닌가? 은총은 받았지만 그 받은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우리 집에는 진짜로 금송아지가 있다?!”하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받은 것은 두고, 드러낼 것은 감추는 묘한 심보는 하느님과 자신이 부끄럽고 치사한 계약의 처지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하느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성을 드러낼 것인가?

오늘 복음은 재물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톡 까놓고 재물이란 주제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적인 현실은 무척 힘들고 어렵기만 한 실정이기에, 복음의 과부와 다를 바 없는 신자들의 봉헌에 감사하기에 부끄럽기만 하다. 그래도 오늘 말하려 한다. 많은 신부님들이 말 못하고 살기에….

그럼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관련된 금전적인 상황을 보자. 교무금, 주일헌금, 미사예물, 축복예물, 감사헌금, 건축헌금, 각 단체회비(성소후원회, 레지오, 빈첸시오, 연령회 등등) 휴~ 생각해 보니 참으로 많다. 이 다양하고도 많은 항목을 봉헌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의구심을 던지고 싶다. 이 많은 항목의 봉헌을 복음의 메시지대로 하느님께 정성껏 봉헌되고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만약에 교회 안에서 봉헌하는 모든 재물의 쓰임이 내 만족을, 나의 위세를, 나의 교만함과 자존심을 위해서 포장되었다면 여태 다 헛것에 쏟은 것이다. 하느님께 봉헌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치장에 낭비된 것이다.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하는 내 영혼에…. 봉헌이 봉헌다워야 봉헌인 것이다. 자신의 것을 위해서라면 이건 아니잖아! 이다. 가끔 실망할 때가 있다. 재물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어진 은총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나 재운(財運)으로 오판하면서 하느님보다 자신을 위해 쓰고 있을 때이다. 대충 적당한 경제관념으로 봉헌의 경계를 긋고 하느님께 인색하고 무감각한 이들을 본다. 실제로 갖은 생색과 유세는 다 떨면서 자신의 교적에 기록된 마음의 표현은 제로인 경우도 본적이 있다. 한 술 더 떠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금전적인 행사나 공사가 있으면 눈독 들이면서 달려드는 이들도 보았다. 어쩔 수 없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나약하고 잦은 유혹과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들임을 인정한다.

오늘의 가르침을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이 금액의 많고 적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자신이 마음을 담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스스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표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하느님이 아닌 자신의 것만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반성을 말하는 것이다. 반복되는 가식의 봉헌은 집어 던져야 한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은 철저히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 치장된 봉헌이었다면 꾸지람을 듣게 될 것이다.

신앙인~ 너 일 고따위로 할꺼야~?

인천교구 박광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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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모든 수험생들과 그 가족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바쁘게 지내느라 잘 느끼지 못하지만 돌아보면 하느님의 축복 없이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기에 큰일을 마칠 때는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함을 기억합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통해 두 과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먼저 1독서에서 사렙타의 과부는 자신과 아들이 먹을 한 끼니의 양식 밖에 남지 않았는데 엘리야의 요청에 따라 빵을 만들어 내어 놓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것도 많지 않았기에 그녀의 결정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의 말을 들은 그녀의 집에 기근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십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사람들이 봉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봉헌하였고 그 뒤를 이어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렙톤 두닢을 봉헌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지켜보시고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매스컴을 통해 기부나 봉헌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누가 얼마를 내어 놓았는가하고 그 액수의 대단함이 먼저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모습처럼 봉헌한 액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와 심정을 살펴주십니다. 많은 것을 가진 이가 가진 것 가운데 얼마를 내 놓는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마음을 보고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 때면 봉헌의 행렬을 보며‘하느님도 우리 신자들의 마음을 알아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감사하며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얼마를 봉헌했는가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으로 봉헌하는가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독서와 복음에 등장하는 두 과부가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미 많은 은총을 베풀어주고 계시고, 더 큰 은총을 주실거라 믿었고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봉헌하는 우리들의 처지와 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러하신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하십니까? 어떠한 마음을 봉헌하십니까?

인천교구 박성경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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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주까지 정신없는 시간을 조금 보내야만 했습니다. 강의도 많았고, 또 교구 행사도 많아서 여유 있는 시간을 갖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여유가 없을 때에는 책을 읽을 때에도 그렇게 큰 감응을 받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책을 한 권 구입했지요. 이 책은 전에 읽었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좋아서 다시 구입한 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이 책을 읽기가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바로 저의 마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눈은 늘 관심 있는 것을 향하기 마련이지요. 지금 제 눈은 책을 보는 것보다는 저의 일만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 눈에 잘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갖는가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잘못된 것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말로 봐야 할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어디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할까요? 바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내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이 첫째 자리가 아니라 다른 것들이 그 첫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분명히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으며 생활 안에서 주님을 느낄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청년들이 성형수술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 없는 외모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고 그래서 성형수술을 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급속도로 하향 평준화됩니다.

저는 마흔이 넘으면서 일반 사람들로부터 주로 이러한 호칭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저씨’

그런데 제 후배 신부 중에서 동안인 신부가 있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리게 보여서 주위 신부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했지요. 하지만 이 신부 역시 마흔이 넘으면서 저와 똑같이 ‘아저씨’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마흔이 넘으면 누구나 아저씨, 아줌마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때가 되어서도 외모에 자신 없다고 불행하다고 말할 것 같습니까?

변하는 것들이 아닌 변하지 않는 주님께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변하는 것들에 내 마음을 뺏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한 과부가 나옵니다. 그녀는 다른 돈 많은 부자와 달리 아주 작은 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렙톤 두 닢만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풍족한 데에서 얼마를 넣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을 정도로 하느님께 온 마음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주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우리가 매달려야 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의 문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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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얼마나 VS 무엇을

얼마 전 본당 주일학교 6학년 남학생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6학년 이00, 000입니다.” 저는 반갑게 인사하였지요. 그 학생이 저에게 전화한 이유는 할머니께서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주시기로 하셨는데, 금요일이라서 망설이다가 신부님에게 여쭙고자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별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지요. 할머니께서 해 주시는 고기를 맛있게 먹으라고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그 친구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습니다. 할머니께서 해 주신다는 고기를 마다할 수도 없고, 금요일 금육재를 알면서도 어길 수도 없었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워졌습니다.

지금 내 상황에서 하느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을 고민한다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제일 기뻐하실 일입니다. ‘얼마나 좋은 것을 얼마만큼 드릴 것인가?’ 라는 생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금 내 상황에서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자신의 렙톤 (*렙톤은 그리스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당시 하루 품삯을 1 데나리온으로 계산했는데, 렙톤은 1 데나리온의 128분의 1의 돈입니다. 만일 하루 품삯을 10만 원이라고 할 때, 1 렙톤은 780원 정도이니 두 렙톤은 1560원 정도이지요.) 두 닢을 헌금함에 넣은 과부의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르 12, 38-44) 예수님께서 헌금하는 이들을 지켜보시며 (마르 12, 41) 무엇을 생각하셨을까? 오늘 복음 말씀의 마지막 구절에 따르면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셨던 것은 헌금의 액수보다 ‘지금 내 상황에서 하느님께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를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습이었다고 묵상해봅니다. 할머니의 정성을 마다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금육재를 쉽게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저에게 전화했던 그 초등학생의 그 마음처럼, 매일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겠지요. 나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결국 자신을 믿으며 살아왔던 삶에서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이 되어 하느님을 믿는다고 시작한 이 믿음을 보고 나는 과연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가 아니라 ‘무엇을’ 이라고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바로 그 해답일 것입니다. 아멘. 덧붙임: 전화 통화한 다음날 어린이 미사에 나온 그 친구는 해맑은 얼굴로 “신부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라고 배꼽 인사를 하더군요. 정말 많이 기뻤습니다. <2015년 11월 8일>

▥ 인천교구 서인덕 베드로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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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방송을 보다가 어느 목사님이 십일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되돌려드리기 위해 십일조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십일조를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모세율법을 굳이 지킬 필요가 없어졌지요. 예를 들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고, 율법에서 금지한 돼지고기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해서 이자도 받을 수 있지요. 또한 원래 안식일이었던 토요일 대신 주일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십일조를 꼭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율법을 반드시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면, 미망인이 된 형수를 아내로 받아들여야 하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려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도 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십일조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은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이 십일조를 지금의 시대에 적용하면 너무나 불공평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다들 비슷비슷해서 빈부의 격차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빈부의 차가 너무나 크지요. 따라서 한 달에 1,000만원 버는 사람이 100만원을 봉헌하는 것과 한 달에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만원 봉헌하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1,000만원 버는 사람에게는 100만원이 생활하는데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100만원 버는 사람에게 10만원은 너무나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십일조는 형평에 맞지 않는 과거의 율법인 것입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내어 놓아야 한다고 하지요. 단순히 십일조를 봉헌했다고 해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받은 만큼 주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봉헌을 해도 주님의 사랑에 비교할 때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어느 본당에서 주임신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교무금과 주일헌금 내지 않기 운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내는 교무금과 주일헌금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한다는 착각입니다. 교회가 유지되고 성장하는 것은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입니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의지로 재어진다는 것입니다. 하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양은 하늘 나라의 심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녀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십니다.

십일조라는 어떤 형식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십일조를 봉헌했다고 하늘 나라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봉헌을 통해 자기를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대단한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처럼 얼마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되돌려 드릴 수 있는 아낌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2015년 11월 8일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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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어떤 ‘열심’을 하고 계신가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서 아주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 중 생뚱맞게 로또 복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신이 요즘 로또 복권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이제까지 당첨된 숫자를 보면 어떤 패턴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패턴에 맞춰서 로또 복권을 사다 보면 당첨 확률을 높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 하던 일까지 그만둬서 많이 힘들었지만, 앞으로 거둬들이는 일만 남았다며 제게 안수를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이는 쓸데없는 ‘열심’이 아닐까요?

술을 열심히 마시는 분을 만난 기억도 납니다. 술을 열심히 마셔서 일주일 중 7일을 술을 마신다고 자랑까지 하셨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고, 자신의 고민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어떨까요? 숙취로 몸이 아프고, 전날을 기억하며 힘들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필요 없는 ‘열심’입니다.

우리는 ‘열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 ‘열심’을 어떤 일에 사용하는지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는 부분에서 ‘열심’이라는 정성을 쏟아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쓸데없고 필요 없는 ‘열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얼마 전, 교구 성직자 묘역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에는 전임 교구장 주교님을 비롯해 선후배 신부님들과 동기 신부님들이 묻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삶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지만, 결국은 모두 주님 곁으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삶보다,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열심’이 더욱 필요합니다.

쓸데없는 것에 ‘열심’인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루카 12,38-40)

남에게 보이는 데 ‘열심’인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위선으로 가득 찬 ‘열심’은 결국 단죄를 받는 쓸데없는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녀는 보이기 위한 봉헌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 안 되는 봉헌이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는 생활비 모두를 봉헌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열심’에서 나온 봉헌이었지요.

제1독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 예언자에게 자신들이 마지막으로 먹을 양식까지 바친 사렙타의 과부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1열왕 17,16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 최선을 다한 봉헌은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움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히브 9,2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당시 사람들은 비웃었지요.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끄는 가장 큰 풍요로움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며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주님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가치만 좇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세상의 가치만 좇는 것은 주님 마음에 드는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떠올려보십시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과연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받아주실까요? 우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삶과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11일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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