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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조회수 | 3,131
작성일 | 06.11.11
세상의 모든 재화(財貨)는 하느님의 것이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이다. 만사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주님의 일을 위해 더 큰 정성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만 한다?

어떤 신자가 다가와서 말한다. "신부님, 요즘은 성당에 가기가 싫습니다. 성당이 예배당이 된 것 같습니다. 그 전 신부님은 한번도 돈 이야기하지 않으셨는데 우리 신부님은 돈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십니다." 이 말을 좀더 발전시키면 " 전임 신부님은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좋았는데, 지금 신부님은 돈 이야기를 많이 해서 싫다." "우리 신부님은 신부님이라기 보다는 목사님 같다." 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세상 만사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사람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사제 생활하면서 평생 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사는 분들도 있다. 심지어 돈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사제다움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런 신부님 후임으로 가면 고생께나 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본당 신자 중에 교무금을 책정하고 내는 세대가 몇 세대, 몇% 나 되는 지? 주일헌금이 얼마쯤이고, 평균 얼마나 되는지? 알 리가 없다. "신부가 어떻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사느냐?" 고 반문을 하는 분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돈 이야기를 하는 어떤 신부도 자신의 개인생활을 위해 돈 이야기를 하는 분은 없다는 것이다.

2. 왜 한국 신자들만 교무금을 내는가?

10계명 외에 신자들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규범이 있다. 혼인을 할 때 교회의 법을 따라야 하는 것과, 적어도 1년에 한번 고해성사를 보고, 영성체를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교회 유지와 선교를 위해 교무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신자는 이런 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미국이나 구라파 같은 곳에서는 교무금 제도가 없다. 독일이나 구라파에서는 자신이 믿는 신앙에 따라 종교적인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종교세'를 내고, 국가에서는 그 세금을 각 종단에 배분해서 교회 유지 운영을 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같은 데서는 교무금은 없고 헌금만 있다. 그런데도 기부 문화가 발달해 있어 많은 이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보다 교회나 공익 기관에 재산을 헌납하여 그 재원으로 교회운영이나 공익사업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끊임없이 기부를 하기 때문에 부자가 존경을 받는 그런 풍토가 되었다고 하겠다.

한국에서는 헌금 외에 교무금을 매월 내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 수입의 1/10을 철저히 바치는 프로테스탄에 비해, 우리 신자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 성당 신설이나, 선교, 청소년 교육, 사회복지나, 신자교육 등에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본당에서 적어도 한달 30일 중 하루 수입 즉 1/30 은 교무금으로 바치도록 권하고 있지만, 현실은 너무나 거리가 멀다.

3.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헌금 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고 계시다가 렙돈 두 닢을 넣는 가난한 과부를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12,43)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느님 앞에 의미 있는 것은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정성이다.

호텔이나, 분위기나 전망이 좋은 찻집에서 차를 한잔 마시면 5000원이 넘는다. 괜찮다 싶은 식당에서 식사를 한끼 대접해도 3-4만원은 한다. 우리 교구의 주일헌금과 교무금의 평균 수준이 차 한잔, 식사 한끼 정도가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마태6,21)는 성서의 말씀대로라면, 헌금과 교무금의 수준이 신앙의 수준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말일까? "나는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제대로 바치고 있는가?"를 반성해 볼 일이다.

"예배당 신자들은 1/10조를 안 바치면 죽는 줄 알고, 천주교 신자는 1/10조를 바치면 죽는 줄로 안다."는 말이 있다. 예배당 신자들은 자신의 수입의 1/10은 당연히 하느님께 바쳐서 교회와 공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가톨릭은 신부님들이 부양가족이 없어서인지 이런 면에서 신자들의 교육이 잘 되어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신자들은 세상 재물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내 것을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간섭이냐?"는 식의 태도는 신자다운 태도가 아니다. 내 이름으로 등기(登記)가 되어 있다고, 내 통장에 들어있다고, 그것을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내가 가진 것 안에는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에게 세상 만사가 하느님의 것이고, 그분 뜻에 달려 있음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 반성해보자. 주님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백 배로 갚아주시는 분이시다.

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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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와 헌금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사람들의 어디를 보고 계셨을까. 얼굴 표정, 아니면 손이었을까. 아마 몸 전체를 보고 계셨을 것이다. 헌금은 정성이다. 정성은 몸가짐에서 드러난다. 물건을 사고 돈을 내듯 그런 태도는 아니었는지, 의무감 때문에 느낌없이 헌금대 앞으로 나갔던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볼 일이다. 헌금은 당당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좋아서 하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정성이 된다. 액수가 많고 적음은 별 문제가 아니다. 정성이 들어있어야 참된 헌금이 된다. 복음의 가르침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정성으로 헌금하는 여인을 보신다. 액수는 적었지만 내용이 그분을 감동시킨다. 여인은 자신의 생활비에 해당되는 돈을 바쳤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행위다. 자신의 생활비를 바치다니, 그럼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그러나 여인은 바쳤던 것이다. 물론 가난한 여인이었기에 생활비는 얼마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바치기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생활비를 바친다는 것은 전부를 바친 것이 된다. 먹지않아도 좋다는 희생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여인은 자신의 정성을 그렇게 희생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여인은 더 이상 가난한 여인이 아니다. 주님께서 돌아보셨기 때문이다. 외적모습은 여전할 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부유함이 그녀를 감쌌을 것이다. 생활비를 바쳤기에 생활을 보장받는 기적을 그녀는 체험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가난한가 부유한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고 만족할 수 없다면 가난한 사람이다. 객관적 판단으로 소유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불만 속에 있다면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만족해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당당하게 헌금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헌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애정이 담긴 봉헌을 할 수 있다.

생활비를 바쳤던 과부도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억지로 바쳤다면 어찌 주님께서 감동하셨겠는가.

여인의 모습 안에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일상사에 쫓겨 돈과 시간이 부족한 채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기도하는 시간도 선행을 베풀 여유도 없이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있다. 돈보다 시간이 가난한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시간은 주일 하루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한주간 살아온 삶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서의 여인이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듯이 그렇게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봉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헌금이 아니라 어떤 헌금을 바치고 있는지 보고 계실 것이다. 돈을 바치는 것만이 헌금은 아니다. 시간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희생을 바치는 것도 헌금이다.

한주간을 살면서 겪었던 아픔과 억울함과 오해와 실망스러움을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도 헌금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치는 헌금 속에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어야 한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생활비를 바쳤다. 그렇게 우리도 일주일의 삶을 함께 바치는 헌금이 되도록 하자.

▶ 신은근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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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된 빈손을 위하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하는 것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부자들이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겨우 ‘동전 두 닢’을 넣었습니다.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것은 부자 개개인의 헌금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그 과부는 가난하면서도 가진 것을 다 털어 넣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외적인 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내적 정성과 마음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때에 외적으로 많은 양이라 하여 거만해한다거나, 양이 적다는 이유 때문에 죄송해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이며,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의 자세 인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이며 그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쓰다가 남는 여분의 것을 봉헌하는 것, 준비 없이 그냥 지갑에서 꺼내어 던져 넣듯이 하는 헌금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마음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금의 액수가 그 사람의 지위 정도나, 신앙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정녕 자신의 마음이 실려 있는가가 바로 참된 신앙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양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진실하고 사심 없는 봉헌의 마음입니다. 참된 봉헌이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데 인색한 것일까요? 우리가 기꺼이 자신이 가진 것을 하느님을 위해 내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착과 축적, 과연 누구를 위한 집착이며, 무엇을 위한 축적입니까? 인생은 부자였든 가난했든 간에 빈손으로 주님께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서의 축적은 결국 남의 것이 되지만 기꺼이 나누고 베품은 하느님께 봉헌되어 자신의 몫이 됨을 우리는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먹을 것”을 내어 놓은 사렙다의 과부와 “구차하면 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생활비로 모두 바친” 복음의 과부의 모습은 여전히 아까워서 놓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의 손을 부끄럽게 하며, ‘참된 봉헌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마산교구 김화석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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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코가 쑥 빠져나올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내 사정이 급해서 남의 사정까지 돌볼 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흥부전의 모체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방이설화’입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러합니다.

가난한 형 방이와 부자 동생이 살고 있었는데 방이가 동생에게 누에와 종자를 얻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것들을 삶아서 형에게 주었습니다. 동생의 심술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방이는 누에와 종자에서 결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새가 와서는 곡식을 물고 날아갔습니다. 방이는 새를 쫓아가서 숲속에서 마음먹은 대로 이룰 수 있는 금방망이를 얻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동생은 자기도 금방망이를 구하러 숲으로 갔다가 방망이를 훔친 도둑으로 몰려 코가 뽑혀 길어질 지경까지 일을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원의 진위를 떠나서 이 설화에서 동생의 코가 길어진 이유는 그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내 코가 석 자’라고 넋두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어렵고 딱한 처지에 놓인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넋두리의 이면에 나만 생각하고, 내 이익만 챙기려는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제 코가 석 자’인 두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먹을 것도 가진 것도 제대로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 코가 석 자’인 자신들의 처지만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 줄 알았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께 정성을 드릴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 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에서도 자신만을 생각지 않고 필요한 이들을 위해 나누고 내어놓으니 채워지고 얻어지는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 사회에 ‘내 코가 석 자’라고 넋두리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를 잘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015년 11월 8일>

▥ 마산교구 강철현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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