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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두 부류의 인간상
조회수 | 3,062
작성일 | 06.11.11
1. 복음 이야기

오늘 복음의 내용은 율사들을 조심하라는 훈시(38-40절)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41-44절)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이 두가지 이야기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사들과 참 신앙인의 귀감인 과부의 두 인간상을 보여 줍니다.

ㄱ.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사들(38-40절)

예수께서는 율사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율사들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회당에서는 높은 좌석을,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빼앗으며 겉꾸며 길게 기도합니다. 율사들은 율법에 정통하여 하느님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저 율사들의 말 다르고 행동 다른 비리를 단죄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재물을 늘리고, 신심을 과시하면서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는 저 율사들의 비행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비리를 나무라면서 저들을 일컬어 ‘위선자들’, ‘눈먼 자들’, ‘눈먼 인도자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ㄴ. 참 신앙인의 귀감인 과부(41-44절)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구역’이 따로 있었는데 거기에 헌금함 열세 개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예수께서는 헌금함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동전을 던져 넣는 모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여러 부자가 많은 돈을 넣고 있었는데 가난한 한 과부가 와서는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 두 닢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적은 액수였습니다.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 가난한 과부야말로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넣었습니다. 모두들 넉넉한 가운데서 얼마씩을 넣었지만, 그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진 것을 모두, 곧 생활비를 몽땅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헌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그 과부의 거짓없는 신앙심을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율사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먼저 소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과부의 참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오늘 복음은 두 부류의 인간상을 보여 줍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실상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신의 부와 명예를 쫓는 율사와 같은 인간상과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하여 자기자신의 모든 가치를 상대적으로 여기는 과부와 같은 인간상입니다. 오늘 교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과부와 같은 인간상일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말은 그럴 듯하게 하면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인들이 저 과부를 본받아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고 하느님만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 비로소 종교인의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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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열전(列傳)’?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한 폭의 프레스코(fresco) 그림이 떠오릅니다. 프레스코 화법은 벽이나 천정에 칠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수채(水彩)로 그림을 그린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려져서 색도 흐려지고 그림 윤곽도 잘 보이지 않고 남은 것은 시간에 마모된 흔적들. 그럼에도 그 그림 속 풍경이 마음에 남는 것은 기억과 추억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렙타 마을의 과부와 마르코 복음의 가난한 과부가 그렇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활동하던 시절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임금(기원전 871-852년경)이 다스리던 때이니 정말 까마득한 옛날입니다. 앞에서 가뭄을 장엄하게 선포한 엘리야는 시돈의 사렙타로 가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지요. 사렙타(현재 레바논)에서 어떤 과부가 밀가루 한 줌과 기름 조금으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려 합니다. 과부와 그 과부의 아들, 그리고 그들에게는 이방인이었던 엘리야 예언자. 한 끼 식사로는 너무나 빈약한 밀가루 한 줌으로 구워낸 빵. 이런 광경들이 인물 표정도 잘 나타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프레스코 화(畵)를 보는 듯합니다. 화려한 유화도, 사실적인 그림도, 추상화도 아닌 지금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 흙반죽이 마르기 전 붓이나 끌로 거칠게 그려 넣은 그림들이라 할까요.

고개 숙인 채 사렙타 과부가 서있고 먼저 구워진 작은 빵 하나를 들고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겠지요. 그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실 때까지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는 단지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병.

어찌 보면 엄청난 기적이 성경에서는 화려한 수식과 장식을 다 떼어낸 한 폭의 프레스코 그림처럼 보입니다.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엘리야의 가장 모진 원수와 같았던 이제벨 왕비의 고향인 이방인 마을의 과부 하나에까지 하느님의 돌보심과 자비가 미친다는 의미를 더 부연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마르코 복음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가난한, 아주 가난한 어떤 과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헌금함에 동전을 넣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렙톤 두 닢 - 지금 우리 돈으로 200원이나 될까. 그런 돈을 넣으면서 자랑스럽고 당당할리는 없겠지요. 본인에게는 그것이 가진 돈 전부이지만 남이 볼까 조심스러워 과부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동전을 넣고 있습니다. 렙톤 두 닢은 하루 생활비라기보다는 그야말로 한 끼,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이겠지요. 그렇다면 사렙타 과부의 밀가루 한 줌과 같습니다. 그 돈을 말없이 넣고 있는 과부와 그 과부를 바라보시는 예수님.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다 바쳤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과부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해석만을 강조한다면 복음의 참된 핵심을 비켜간 것이겠지요.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서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응답하는 사렙다 과부처럼(1열왕 17,5)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예루살렘 과부의 마음과 그 마음을 말없이 받아주시는 예수님.

생각해보면 지극히 높으신 분께 인간 세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분께 드리고 싶은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겠지요. 또 그 마음이 담긴 어떤 것들이겠지요. 가톨릭성가 221장에 소개된 성 이냐시오의 기도처럼 “내게 주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또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겠지요. 그야말로 당신께는 지극히 하찮은 것들을 주님께서는 기꺼이 또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사렙타 마을과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하는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장면들을 마치 한 폭의 프레스코 화(畵)처럼 저는 서서 오래도록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의 율법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과는 확연하게 다른 단순한 이 그림을 보다 보니 마치 제가 그림 속에 있는 듯합니다. 저는 이 그림들 한 쪽에 조그맣게 그려져 있을까요. 아니면 그림 속의 여백으로라도 남아있을까요. 어떤 모습이든 주님의 눈길이 머무시는 작은 흔적이라도 되었으면 합니다.

“……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최민순, 『두메꽃』에서)

▶ 이기락 신부
  |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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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예수님께서는 극도로 화가 나셨고, 적당히 욕을 섞어가며 화를 폭발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중요한 대상 가운데 한 부류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파렴치한 두 얼굴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향해 “독사의 족속,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자,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그리고 뱀”(마태 23,1-36 참조) 등의 단어를 사용하시며 욕을 퍼부으십니다. 노기를 띠시며 ‘위선자’라는 말을 일곱 번이나 사용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수차례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현대에서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분통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감정 표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지 않으셨으며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어떤 일을 보시면 가차 없이 꾸짖으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며 마음에 있는 것들을 쏟아 내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극도로 화를 내시는 장면과 그 외에도 여러 다른 곳에서 화내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마태 11,20-24; 12,9-14; 21,12-14 참조) 그리고 화가 나셨을 때는 절대로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지 않으셨으며 엄하게 꾸짖으시고 가혹할 정도로 책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욕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시기도 했으나 화를 내실 때는, 적당히 욕을 섞어가며 가차 없이 열불을 토하셨습니다. 이러한 전형적인 예는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유혹할 때 화를 내시면서 “사탄아!”라고 꾸짖으시는 장면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보셨을 때 그 불의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화를 내실 때 결코 엉뚱한 사람을 지목하며 화를 내지 않으셨고 어떠한 폭력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일만을 생각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지목하셨지 엉뚱한 다른 제자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이 화나게 했을 때도 제자들에게 화풀이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파들을 꾸짖으셨습니다. 화가 몹시 나셨을 때 예수님은 성전으로 가서 책상과 의자를 뒤엎으셨지 어떠한 사람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시지 않았습니다.

거룩함을 실추시키지 않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셨고 그것을 통해 당신께서 온전한 인간임을 드러내셨으며,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감정의 폭을 온전히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역시 거룩하시며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올바로 느끼고 적절하게 표현할 때 화내는 것이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문종원 신부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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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

성경을 읽다 보면 가끔 가슴을 뜨끔하게 만드는 구절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꾸지람이 오늘날 성직자들을 질타하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인사와 대접받기 좋아하고 신자들에게 부담 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보호를 받습니다. 인간처럼 하느님도 편애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이 성직자들을 ‘특별대우’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백성을 돌보는 일꾼답게 교회 공동체를 전심전력으로 섬기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망각한 채 하느님을 내세워서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고 부당한 이익을 탐한다면, 일꾼이 아니라 주인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꾼은 호된 꾸지람 과 문책을 면치 못합니다.

하느님의 일꾼인 성직자는 자신이 받는 ‘특별대우’에 우쭐하여 교만과 탐욕에 빠져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느님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참조)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써, 섬김과 봉 사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칩니다. 또한 제1독서에 등장하는 사렙타의 과부처럼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지막 것까지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압니다. 이런 삶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당신 자신을 바치신’(제2독서) 예수님과 일치하여 그분의 능력에 의탁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성직자만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세례성사를 받은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하느님이 세례받은 이들을 ‘특별대우’ 하시는 이유는 가정이나 직장 등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데에,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 그분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자세로 섬기고 희생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와 사회에는 겸손과 섬김, 희생을 많이 얘기하지만 정작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서로 비난과 비방을 하기 일쑤입니다. 누구를 탓하지 말고 묵묵히 겸손과 섬김, 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과연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은총을 받았는가를 헤아려 보면서, 그 은총의 힘으로 얼마나 겸손한 사람, 섬기며 희생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2015년 11월 8일>

▥ 서울대교구 손희송 보좌주교
  |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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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의 끝이 오고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겨울의 문턱이 다가왔습니다. 갈수록 험악해지는 세상에 살면서, 점점 각박해져 가는 인심을 보면서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녹이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듯이 지치고 힘든 우리의 마음 얼어붙은 우리네 삶의 현장을 녹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 주변의 작지만 소박한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손을 한 번 보세요. 남자 분이나 여자 분의 손가락에 대게는 아름다운 반지가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주기도 했고, 결혼을 약속한 반지일수도 있고 , 길거리에서 예쁜 모습을 보고 산 경우도 있습니다.

반지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서 여러분에게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동료 사제가 본당에서 저녁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두 젊은이가 면담을 요청해 왔답니다. 낯선 얼굴들인지라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이들을 맞았답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불쑥 금반지 두 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금반지 2개, 그것을 축성 해 달라는 얘기인가 하고 의아해 하는 사제에게 이것을 가지라고 했대요. 무슨 영문인가 하여 물었더니 이들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그들 둘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로서 한해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남자 친구는 대학에 합격하여 입학을 했고, 여자 친구는 합격을 하지 못하였노라 하면서 이들은 여자 친구가 내년엔 꼭 합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정의 뜻을 깊이 간직하고 격려하기 위해 서로 금반지를 선물하면서 여자 친구가 합격하는 날, 이 반지를 필요로 하는 이에게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여자 친구도 합격을 했고 그래서 오늘 저녁 기쁨과 감사의 미사를 드렸고, 작은 것이긴 하지만 이 반지를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의 고통과 기쁨을 승화시켜 주었던 아름다운 이 추억의 반지를 선뜻 내어놓은 이들의 마음이 퍽 고왔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청년희망 펀드에 기부하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백억 이상을 기부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도 기부하고 있습니다. 기업들과 국회의원들이 기부하는 청년희망 펀드는 곳간이 넉넉해 질 것입니다. 대통령께서도 연봉의 일부를 기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훈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교회에도 많은 단체들이 있습니다. 꽃동네, 해외 선교회, 성소국, 교회사 연구소, 복음화 학교가 있습니다. 이들 단체들은 모두 후원회원들의 정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많은 액수를 기부하지는 않으시지만 작은 정성들이 모여서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나눔과 관심이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재능을 나누는 분들도 있습니다.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의 말벗이 되어 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외로움에 지친 어르신들에게는 빵을 나누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렇게 변한 벽지를 벗겨내고 화사한 벽지로 바꾸어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여름 물난리로 못쓰게 된 물건들을 고쳐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성모병원의 의료진들은 약품을 가지고 매년 가난한 나라로 의료 봉사를 가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작은 병에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교구의 사회 사목국에서도 청년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떠나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라오스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샘을 파주기도 합니다. 이 또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찬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쌀쌀한 날에, 순수함을 잃어 가는 세상에 그저 단순한 우정이 아닌, 이웃으로 마음이 열린 아름다운 우정의 모습을 보여준 그들 젊은 친구들이 반지를 주기 위해 내밀었던 아름다운 손을 그려봅니다. 틀림없이 그 젊은이들은 사회를 아름답게 비추는 촛불로 살아가리라 믿으며, 그리고 관대함에로 열린 우정이 아름답게 지속되길 바랍니다.

저는 1995년부터 97년까지 세검정 본당에 있었습니다. 봉성체를 가면서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건강하던 친구는 원인모를 병으로 6학년 때부터 근육이 마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고통 중에서도, 아픔 중에서도 그 친구는 온 힘을 기울여 글을 적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의 아름다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별들은 밤하늘이 있기에”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 2015년 11월 8일 / 서울대교구 조재형(가브리엘)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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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수님은 무얼 보시나?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헌금함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사람으로 분주했고 여러 지방에서 온 그들은 각자가 마련해 온 봉헌금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오늘의 복음은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역, 혹은 멀리는 지중해 근방의 해외 유대교 공동체에서 성전으로 순례를 온 사람들은 적지 않은 돈을 성전에 봉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 허름한 차림의 한 여인이 나타나 헌금함 앞으로 걸어갑니다.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고 보기에도 귀티가 나는 부자들 사이로 가난한 과부가 한 명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의 옷 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다루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동전 두 닢을 꺼내 수줍게 봉헌함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서둘러 돌아섭니다.

부유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의 허름한 옷차림은 그 자체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헌금함으로 떨어지는 동전 두 닢의 요란한 소리에 그녀는 더욱 위축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봉헌한 동전은 금화도 아니요 은화도 아닌 렢톤 두 닢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돈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 한 닢의 1/64에 해당하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오늘날 화폐로 어림잡아 계산해도 백 원짜리 동전 몇 개에 지나지 않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비웃음과 과부의 움츠러듦이라는 상황에 예수님께서 말씀을 꺼내시면서 상황은 급반전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는 것을 계속 지켜보시면서 미동조차 하지 않으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말문을 여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많은 봉헌금을 냄으로써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했을지 모를 부자들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또 수치심에 움츠러든 그 여인 자신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누가 얼마나 많이 봉헌금을 넣었는가”라는 세속적 기준으로 상황을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넣었는가”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시며 여인의 행동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부자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어리석은 시선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도 흔히 빠지게 되는 오류입니다. 물질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화려한 것, 값비싼 것, 유명한 것, 그리고 크고 많은 것 등이 당연히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눈에 드러나는 현상만을 따라 살 뿐 진실함이나, 순수함, 그리고 선함 등은 초라한 것, 싸구려인 것, 그리고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등으로 인식합니다. 옷은 유명한 명품이어야 멋진 것이고, 자동차는 크고 새것이어야 좋은 차이고, 집은 평수가 넓고 비싼 것이어야 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눈에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 그 이면의 본질적 마음과 자세를 살피는 시선을 가졌기에 과부의 헌금이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가진 것을 전부 내어 놓는 행동이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하나의 위로와 하나의 가르침를 얻게 됩니다. 먼저 위로는 예수님은 절대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나를 판단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내는지, 얼마나 자주 성당에 나와 봉사하는지, 혹은 얼마나 오랜 시간 기도하는지 등으로 나를 평가하고 바라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세속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예수님이 나를 평가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합격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듯 예수님께서 세속적 눈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바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얼마나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지, 봉헌 때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닌 기꺼운 마음으로 내어 놓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기도하고 봉사할 때는 얼마나 진솔한 마음으로부터 임하는지를 돌아보기 바라시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처럼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더라도 무어라 탓하지 않으시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진실한 마음을 결코 놓치지 않는 예수님께는 우리의 모든 언행이 진실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길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이러한 예수님의 시선을 배우고 과부의 진솔한 마음을 닮아갈 때 우리도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나의 마음이 어떠한지 되돌아보며 우리의 마음도 아까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탁한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닮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아멘

▥ 2015년 11월 8일 / 서울대교구 정수용 신부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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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 앞으로 떼어낸 그것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은총의 샘이 됩니다

한강성당은 지역 전체가 아파트촌입니다. 16년 전 본당신부로 부임을 받은 저는 5년 동안 사목을 하면서, 거의 한 달에 한 번, 새벽 미사를 끝내고 몇몇 사목 위원 형제들과 식사를 하던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아파트 한가운데 고립된 섬처럼 남아있는 자그마한 재래시장에 위치한 소박한 식당입니다. 성당에서 걸어서 약 10분 걸립니다. 식당 주인은 개신교 신자로 60세가 넘어 보이는 부부였습니다. 어느덧 저와 주인 아주머니와 친숙한 사이가 되었는데, 한 번은 한 형제로부터 음식 값을 건네받은 돈을 저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은 오늘 첫 번째로 번 돈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으로 떼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순간 저의 마음은 부러움과 아쉬움이 교차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옆 커다란 성당의 본당신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여하튼 그때 아주머니의 모습과 말씀은 때때로 내 안에서 울림으로 다가오곤 했습니다.

첫 번째로 번 돈이기 때문에 하느님 앞으로 떼어 놓은 돈, 사실 이 돈은 일상적인 돈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속한 성스러운 돈입니다. 이 성스러운 돈은 아주머니께서 일하시는 그날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희망도 그만큼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떼어 놓은 그만큼 자신이 하느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떼어낸 성스러운 돈은 자신을 인도하시는 주님을 또다시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희망합니다. 이때 하느님 앞으로 떼어낸 성스러운 그것(돈)은 주님의 인도와 사랑을 느끼게 하는 은총의 샘이 되어줍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샘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녹록지 않은 우리의 삶이지만 어떠한 처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뿌리는 내 삶 어디엔가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안에 은총의 샘이 있는 줄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속한 자신임을 느끼기에, 선한 마음으로 떼어낸 나의 재물, 시간, 재능, 나 자신의 어떤 것들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은총의 샘이 됩니다. 이 은총의 샘은 언젠가 또다시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것을 희망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눈길을 사로잡은 과부인 그녀는 궁핍한 가운데 생활비 전체를 봉헌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의 삶 전체를 떼어놓은 성스러운 삶 자체입니다. 지상에서의 하늘나라 삶입니다. 사실 구체적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지금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은총의 샘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만큼 말입니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 하느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는 만큼 하느님을 향한 희망은 내 안에서 커집니다.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 : 2018년 11월 11일
  |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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