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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조회수 | 2,748
작성일 | 06.11.17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제1독서: 다니 12,1-3: 그런 때라도 네 겨레는 난을 면할 것이다

1독서의 내용은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5)가 팔레스티나를 점령한 후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이교도들의 풍습을 강요하여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어려운 때”(1절)가 되게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카베오 시대에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키신다. 1독서는 당시의 많은 순교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악인들은 ‘영원한 모욕’으로 벌하시리라고 한다(2절 참조). 이 말씀은 압박을 받으며 좌절해 있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희망의 메시지였다. 따라서 현실의 고통이 아무리 크고 힘들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내라고 강조하고 있다. 1독서의 이 말씀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들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리하여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존재로써, 즉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 13장 전체에 걸쳐 하신 ‘종말론적’ 담화에서 독특한 부분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사람의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시켜 실현시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구름을 타고 오는 사람의 아들”(26절)이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가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요한 11,52 참조).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보다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제2독서: 히브 10,11-14.18: 예수께서 바치신 희생제물의 효과

2독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결정적이고 불반복적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심으로써 신앙을 통해 그분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완전하게 해 주셨다(14절 참조)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2독서에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번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12-13절).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기 위해서도, 그 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또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에로 이끌어 줄 것이다.

▶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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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위한 준비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기형 시인의 “낙화”의 한 부분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이 시의 구절이 떠오른다. 마지막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시점에서, ‘때’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가 한 번쯤 음미해 봄직한 말이라 여겨진다.

과연 세상의 마지막 때는 언제 오는 것일까? 이 때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성경에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라고 했지만, 아직도 할일 많은 사람들(?)이 이 때를 알아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변화를 통하여 그 비유를 깨닫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시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준비라는 것이 특이할 만한 것은 없다. 그저 나뭇잎이 돋는 사소한 일상을 잘 살피면 그 때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가 않다.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어느 누가 답답하리만치 느려터진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현실. 그냥 시간의 흐름만이 존재하는 그곳에 하느님은 당신의 때를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그 때란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일상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함께 동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지켜만 보는 것에서가 아니라, 뛰어들어 이끌어 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를 위해 작은 나를 보내셨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볼 때 “참 빨리도 자란다.”고 말한다. 낳아 놓으면 어느새 학교엘 들어가고 졸업을 하며 결혼을 한다고 소식을 전한다. 또 군대를 간다고 하던 녀석이 어느새 제대를 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참 빠르다. 그런데 그 빠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내가 빠져있는 동안의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하지만 아이는 그냥 빨리 자라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름 병으로 앓아눕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이별도 경험한다. 그리고 힘겨운 공부도 해야 하고 이성을 향한 가슴앓이도 해야 하며, 실패와 좌절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란 걸 경험한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 시간은 없던 것과 같다. 그래서 어느 날 보니까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지켜보라’고 하신다.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당신을 ‘찾아내라’고 하신다.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계산하려는 사람은 그만큼의 시간을 헛되게 보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이웃의 삶에 동참하고 하느님의 일에도 참여하도록 하자. 그러면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때도 알아가게 될 것이고,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 김형중(그레고리오)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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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백성”

가톨릭교회 안에는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평신도’와 그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는 ‘성직자’,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봉헌 생활자’들입니다. 교회법에서는 이렇게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컬어 ‘하느님의 백성’(DE POPULO DEI)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마치 교회의 계층 구조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의 세 단계로 나뉘어 있는 것 같지만 특별히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을 맡은 거룩한 교역자, 즉 성직자 외에는 모두 평신도입니다. 봉헌 생활자는 성직자와 평신도 양쪽에서 특별한 양식으로 하느님께 봉헌된 이들이기 때문에 교계제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은사’(CARISMA)로 구분됩니다.

그렇다면 이 세 부류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교회법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교회법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무와 권리에 관하여 이야기한 다음 곧바로 평신도의 의무와 권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봉헌 생활자는 그 다음부터 언급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평신도의 중요성과 존재 가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평신도 주일’을 정하여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평신도입니다. 교회의 봉사역할을 맡는 성직자들도 결국 평신도 가운데서 선발됩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근본적으로 평신도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는 어떤 특정한 신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셔서 죄를 용서해주신 이들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 바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구원 대상이고 주역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보다 사회에 더 가까이 살고 세속에 더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분명 평신도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노력이 더 빛을 발합니다. 세상이 세속적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 김지훈(니콜라오)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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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평신도 주일이 되면 본당 신부님들은 신이 납니다. 왜냐고요? 그야 강론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지요. 사제가 아닌 평신도가 강론을 하는 유일한 주일이 바로 평신도 주일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입장을 바꾸어보면 본당의 사목위원들에게는 가장 부담스러운 주일입니다. 신자들 앞에서 강론해야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래서 대부분은 그냥 써준 원고를 읽고 내려옵니다. 그 원고라는 것도 이미 신부님의 검열을 거친 것이어서 ‘허튼 소리’ 한 마디도 새어나올 수 없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강론이 시작되면 교우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서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거나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합니다. 평신도들을 위한 주일인데 이상하게도 신부들이 더 좋아합니다. 참 기묘하죠?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된, 전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아주 드문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입니다. 그냥 그런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 지금은 아닙니다. 초창기에 성직자가 너무 귀해서 신자들이성직자를 애지중지했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상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아예 주도권까지 내어주었습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다시 격상하려 해도 내어준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직자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주도권을 내놓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교회 안에서 성직자들의 역할은 고유합니다. 성사를 집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역할까지 성직자가 다 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 속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그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습니다.사실 요즘의 성직자들은 과도한 업무에 지칠 대로 지쳐있습니다. 목자로서 양 떼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벅찰 지경인데 그 밖의 일들로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관리, 인사관리, 재정관리, 건물관리까지……. 목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우리성직자들을 관리자로 만들었습니까?

우리 교회는 끊임없이 쇄신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권위적인 성직자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평신도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고 성직자들이 고유한 목자의 직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봉사 직분에 나서기를 꺼리고 수동적인 자세로 자기만족의 신앙생활만을 추구한다면 쇄신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를 알아보는 평신도들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 수원교구 이근덕 헨리코 신부 / 2015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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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재림은 희망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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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전쟁 위기를 경고하기 위해 1947년 미국 시카고대학 핵물리학자들이 주도해 ‘세계종말시계’를 고안했다. 그 시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계가 아니다. 지구의 미래를 측정하는 시계로, 2017년 우리가 경험한 종말시계는 23시57분을 가리켰다. 인류멸망을 상징하는 ‘한밤중’까지는 3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는 북한의 핵실험과 함께,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 온난화 진행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세계종말시계’를 만든 지 70년이 지난 지금도 강대국들이 핵무기 위협과 환경문제가 지구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례력으로 거의 막바지인 오늘 교회는 미사 전례 중에 세상종말과 주님의 심판에 관한 성경을 읽는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는 종말에 관한 환시 부분으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세상종말에 관한 담화부분이다. 주님은 세상종말 때 재림하셔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을 받게 될 우리는 성경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깨어 있어야한다.

교회는 성경을 통해,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나아가 심판을 받는다는 믿음을 가르친다. “사람은 단 한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 진다”(히브 9,27). 곧, 모든 인간이 죽음 다음에는 세상에서의 모든 삶의 행적이 하느님 앞에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고, 그에 대한 상 또는 벌을 받게 된다(마태오 13,41-43 참조).

그러나 교회는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두려움과 공포의 메시지가 아니라, 정의로우신 하느님의 자비로운 호소와 희망에로의 초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토 6,2-3 참조)회개하라는, 그분의 뜻대로 살아온 이들에게 있어 최후의 심판은 크나큰 희망의 날이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기준은 ‘이웃 사랑’이다. 특히 곤경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다. 주님은 최후의 심판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25,40)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신앙을 선택한 연유는 신앙 이론에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성경내용이나 하느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교회 구성원들의 불친절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불친절하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춰진 내 삶의 모습이 형제자매들의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비신자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게 한다.

하느님의 심판은 이 지상에서의 모든 잘못을 드러내고 불의를 벌하시는 하느님의 정의인 동시에, 죄 많은 인간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 약점과 한계를 수용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한 심판은 죄 많은 우리 인간에게 두려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희망인 되기도 한다.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정의가 올바로 서게 되는 것이 바로 심판이며, 동시에 인간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용서와 구원의 체험을 얻게 되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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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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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넘어서면 환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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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종말을 매우 두려운 무엇으로 여기고, 또 먼 미래에 올 자신과는 상관없는 무엇처럼 생각합니다.

개인적 죽음이 미래에 온다고 하여 개인 자신과 무관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이 오듯 종말도 누구에게나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꼭 미래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바로 나에게 닥칠 수 있듯 종말도 그렇습니다.

종말이 지금 당장 나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면 그것은 참다운 종말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의 의미는 두려워하거나 걱정해야 할 무엇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은 다 ‘복음’입니다.‘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 종말도 기쁜 소식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종말이 나의 종말인양 미혹하는 사람들입니다.

종말은 세상의 어둠 속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진정한 해방의 날입니다.나는 살고 세상은 죽는 것이 종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을 말씀하실 때 “그 무렵 큰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즉, 종말은 환난이 끝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하던 해와 달과 별들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돈과 명예와 쾌락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사실 우리들이 환난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입니다. 종말의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나를 사로잡고 있는 어둔 세상인 것입니다.

‘어느 날 400억 원의 빚을 진 남자’라는 책을 쓴 유자와 쓰요시 씨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맥주 회사에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400억 원의 빚이 있는 회사를 억지로 떠맡게 되었습니다.

직원들은 자기 마음대로 횡령을 하고 있었음에도 회사를 경험해 본 젹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켜보아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자기가 바보처럼 느껴졌고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졌습니다.

어느 날 전철이 올 때 몸을 전철 쪽으로 던지려는 자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가까스로 참아내기는 하였지만 빨리 끝내고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기는 울고 있고 아내는 빚 독촉 하는 사람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쩔쩔매며 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깨닫습니다. ‘안 좋아봐야 파산하는 것뿐이지 않은가?’그리고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광우병 사태가 터졌고 한 지점에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믿었던 주방장도 병으로 잃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바닥을 치고 난 후였기 때문에 죽는 것보단 나은 상황이라 여기고 억척같이 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년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종말입니다. 밤의 종말이 종말입니다. 나의 종말이 아닙니다. 밤이 끝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끝나는 것이 종말입니다.

세상이 끝나도 나는 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있던 당사자입니다. 그리고 그 세상이 끝나버리니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나를 세상과 하나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인 것은 나의 자아이지 내가 아닙니다. 세상과 내가 하나로 여기니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고그것 때문에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종말은 주님께서 나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는 사건입니다. 세상에서 죽어도 좋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복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종말이 곧 복음입니다.

노아에게 종말은 복음이었고 롯에게도 그랬습니다. 노아는 세상의 모욕을 견뎌내며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상이 주어지는 것이 종말입니다.

롯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 땅에서 혼자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소돔의 멸망이 곧 롯의 구원입니다.

세상은 밤과 같습니다. 낮이 오려면 밤은 사라져야합니다. 그렇게 빛에 비해 어둠은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이 내가 맞이해야 할 종말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을 말씀하시며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은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종말이 마지막 때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우리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복음일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은 바로 지금 나와 관련된 이야기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나라와 성전이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태양이요, 달이요,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사가 와서 성전을 짓밟고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이 사건이 그들에겐 더 없는 완전한 종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이 이스라엘의 종말이 전 세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나라를 떠나 전 세계로 퍼진 주님의 제자들은 세계 곳곳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망해도 됩니다. 그리고 망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세상을 태양이요, 달이요, 별로 숭상하고 있지 않다면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나에겐 환난이 끝나는 때입니다.

밤이 끝나고 아침이 오는데 밤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은 빛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말을 기뻐해야합니다.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아는 것이 복음이자 종말입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종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종말의 복음은 나에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멸망해야 할 운명을 지닌 사람처럼 두려운 것이 되어버립니다.

제이 골드버그는 실패를 모르고 성공가도만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이 그동안 해 오던 일을 접고 자신이 좋아하던 야구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고 회사에 사표를 냅니다. 그리고 미국 내의 26개 프로야구 구단에 이력서를 보냅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을 쓰면 어떤 구단이든 이익을 보리라고 믿었고 좋은 응답이 많이 올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군데서는 아예 답장도 오지 않았고 나머지 25개 구단에서거절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처음 실패를 맛 본 골드버그는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술에 빠져 절망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받은 거절 편지들을 액자에 넣어 벽에 붙였습니다. 하나하나 읽기도 싫은 내용의 편지였지만 벽에 걸어놓고 보니 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저 벽을 장식하는 하나의 종잇장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재기하였습니다.

실패를 하면 그 실패를 액자에 넣어 또 수많은 실패 액자들 옆에 추가하였습니다. 그러니 실패는 별거 아니었습니다. 내가 실패에 대해 두려워하는 그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난을 주는 마음으로부터 이별을 고합니다.

다시 재기하여 그는 야구 장비를 파는 소매점인 베르지노 클럽하우스를 열었고, 그것은 현재 미국 야구팬들에게 사랑 받는 매우 큰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지금 내가 세상을 별거 아니게 보게 될 때, 실패나 타인들의 판단에 무심하게 될 때, 주님의 오심을 의미하는 종말은 나에게 복음이 됩니다. 그것만이 가치 있고 세상 것은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만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영원하기를 기대한다면 사라져버릴 세상엔 이별을 고해야합니다. 진정한 종말의 의미를 알고 그 종말을 살아나가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멀어졌다면 예수님은 오늘 내 안에 재림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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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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