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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조회수 | 2,976
작성일 | 06.11.17
구별해 내는 일

작가 공지영(마리아) 선생은 ‘착한 여자’에서 ‘구별해 내는 일’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구별해 내는 일이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 사랑하지 않았으면 한낱 군중일 뿐인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그 사람을 구별해 낼 줄 알아지는 것이다. 마치 쌍둥이 어머니가 쌍둥이형과 동생을 구별해 내는 것처럼…. 그러니 인간을 창조한 신은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분은 모두를 구별해서 다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인간을 하나 하나 사랑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각 사람의 몫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 때, 과연 자신의 행실이 어떠하였느냐에 따라 판가름 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마르 13, 27)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가 놀라고 있듯이 평신도들의 힘이 대단한 나라입니다. 특별히 신심적인 면에서는 아주 놀랍습니다.

여러 강의 등으로 매주 서울에 올라가게 되는데 지하철을 타다 보면 묵주기도를 바치는 교우들을 근래에는 더욱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제인 제가 오히려 더 부끄럽습니다. 철야기도 모임에 초대되어 갈 때에도 그러합니다. 그 긴 기도 시간동안 그렇게 열심히, 간절히 기도 드리는 열심한 교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들 가정사의 일이든, 세상을 위한 보편적 일이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는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받기 위한 착한 교우들의 열심과 열성이 있기에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몫과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탈렌트를 값지게 키워나가는 평신도들의 열심은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활성화되지 않는 여러 신심운동들도, 이를테면 레지오, ME, 꾸르실료 등도 이 땅에서만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음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성장의 뒤에는 진정 천국을 향한 열정으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에는 모든 성당의 신부님들께서 아낌없는 갈채의 칭찬을 평신도들에게 쏟아 부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운 님 만나는 날

신학교 4학년 때 군대에 입대하는 동창들을 위하여 가을 음악회에 함께 불렀던 노래가 문득 생각이 납니다.

군대에 가서도 우리가 간직했던 그 소중한 사제의 꿈이 변치 말자고 숙연한 약속으로 불렀던 노래는 정태춘 박은옥 작사 작곡의 ‘봉숭아’였습니다.

“초저녁 별빛은 초롱해도 이 밤이 다하면 질 터인데, 그리운 내 님은 어딜 가고 저 별이 지기를 기다리나.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 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별 사이로 맑은 달 구름 거쳐 나타나듯 고운 내 님 웃는 얼굴 어둠 뚫고 나타나소. 초롱한 저 별빛이 지기 전에, 구름 속 달님도 나오시고 손톱 끝에 봉숭아 지기 전에 그리운 내 님도 돌아오소.”

그때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착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불렀습니다. 세상을 위한 구원의 별빛이 될 꿈을 안고 말입니다. 그 같은 느낌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살았으면 싶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될 그리운 님, 주님의 모습을 그리며 말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나 그이를 붙잡고 놓지 않았네.” (아가 3, 4)

올해도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을 두고 세월이 흐릅니다. 쏜살같은 세월, 유수와 같은 세월이라 말들 합니다.

우리의 옛 신앙의 선조들은 가버리고 말 세상에 대하여 그리 큰 미련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하나, 꿈에서도 그리고 또 그렸던 것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주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그리운 만남의 날을 위하여 세상 온갖 시련을 이겨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굳게 믿고 또 믿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들에게 하신 약속이라 굳게 믿으신 것입니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다니 12, 3)

그리고 기적같이 만난 주님을 붙잡고 끝내 놓지 않으셨습니다.

세월이 흐릅니다. 우리가 또 다시 붙잡아야 할 가장 소중함을 흐르는 세월은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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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준비하며 사랑 실천하라

기억하세요

지난번 강원도에 내린 첫눈으로 겨우 몇잎 나무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나뭇잎도 그나마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이 겨울바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또다시 우리에게 ‘버림’과 ‘떠남’의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은 여름내 시원한 그늘을 만들었던 자신들의 노고를 잊지 말라는 듯 애처롭게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실로 우리는 수많은 인연의 세월속에서 고마움으로 기억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부모님과 스승님들과 은인들, 그리고 이웃과 친구들, 대자연의 고마움 등 온 천지가 은인 아닌 것이 없고 빚을 아니진 것이 없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있었음으로 인해 나란 존재가 있을 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시시로 다가오는 종말을 생각하며 이제는 진정 버리고 나누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하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기기증 운동가인‘R.N.테스트’는 이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날 기억하려거든… 나의 눈을, 떠오르는 아침 해와 아기의 얼굴과 그리고 여인의 눈 속의 사랑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심장을, 자신의 심장으로는 날마다 끊임없이 고통만 당해온 사람에게 주십시오. 나의 피를 교통사고로 일그러진 차 속에서 구출된 십대에게 주시어 그로 하여금 그의 손자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내게 남은 것은 태워서 바람에 재를 뿌려 주시고 꽃들이 자라는 걸 돕게 하여 주십시오.” 계절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종말이 다가옴을 가르쳐 줍니다. 결국 빈손으로 세상에 온 우리는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계절의 변화를 통하여 종말과 심판의 날이 다가온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며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마르 13,29)

다가올 징벌의 날, 그 징벌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내가 이 세상에서 비우고 나누었던 사실을 주님께서 기억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의 삶을 살았다는 기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0-21)

그날과 그 시간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신체에 꼭 필요한 여섯 가지 기관을 주셨으니, 눈, 코, 귀와 입, 팔, 다리이다. 전자 셋은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 없으나 후자 셋은 인간의 의지대로 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입니다. 실제로 눈, 코, 귀는 자신의 의지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과 팔과 다리는 장애가 없는 한 선을 위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종말인 죽음이 오는 그날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육신을 잘 움직여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남이 듣기에 아름다운 말을 하는 데 입을 써야 하고, 남을 돕는데 내 팔을 사용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곳으로 내 다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것이 그토록 소중한 육신을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가올 종말의 날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종말을 잘 준비하여 복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된 성인들은 단 하루도 자신의 영욕을 위하여 육신을 쓰시지 않았던 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온몸을 투신하여 세상에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애쓰신 분들이셨습니다. 그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종말을 잘 준비해 오신 분들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30-31)

‘정약종’의 <주교요지>교리서 끝에는 이 같은 가르침이 실려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늙어서도 죽고 어려서도 죽으며, 악한 이도 죽고 착한 이도 죽어,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날마다 내 귀에 들리는데, 너만은 죽지 아니할 줄로 아느냐? 어찌 남 죽는 소문은 내 귀에 들리고, 나 죽은 소문은 남의 귀에 들리지 아니하랴. 죽는 날을 미리 정할 길이 없으니, 사람이 한 번 죽으면, 즉시 천주께서 무궁무진한 화복을 판단하시는지라, 천하에 이러한 일이 다시없거늘, 꼭 살는지도 모르는 내년을 어찌 기다리랴.”

진정 그날과 그 시간은 우리에게 분명히 다가옵니다. 그때문에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 배광하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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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퇴장료

요즈음 ‘인생의 퇴장료’ 라는 말이 자꾸 생각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입장할 때 하느님의 자비로 아무런 입장료 없이 이 세상에 사는 축복을 받았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생명을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다. 이 생명으로부터 우리는 또다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로 불림을 받는 최대의 은총을 입었다. 없는 가운데에서 불리움을 받았고, 생명을 누리는 기쁨 속에서 또다시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에로 불리웠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요, 배려이다. 그런 은총을 베푸신 하느님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마치고 나아가려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겠는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어떤 채무관계나 마지못한 의무감이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조건 없이 내려주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 측의 사랑의 응답인 것이다.

언젠가 인천을 다녀오면서 하도 피곤하여 졸음운전을 하고 온 적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깜박 졸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남의 차선 한복판을 가고 있었다. 그때 만약 상대편 차선에서 차가 오고 있었다면 그대로 정면으로 부딪쳤을 것이고, 아마도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생각해보니, 나는 그 때 나름대로 이것저것 할 일이 많이 있었다. 당장 내려가서 저녁 미사도 드려야 했고, 부탁받은 강의 준비도 있었고, 어머니 생신에는 집에도 다녀와야 했고, 주일 오후에는 누가 면담을 하자고 했었는데…. 하마터면 그런저런 것 하나 못하고 비명횡사하여 돌연히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언제 들이 닥치는지 모르는 그 시간 그 순간에 죽게 되어 하느님의 신판 대전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나온 내 삶을 어떻게 하느님 앞에 내놓으려했을까 싶었다. “하느님 죄송하오나 한번만 기회를 더 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요번에는 정말 훌륭한 성인사제가 되어 신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다하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사정한다고 될까?

우리는 세상의 일을 걱정해서 보험도 들고 계획도 세우며 이것저것 준비를 해서 잘 살아갈 궁리를 한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서서 자기 삶을 결산해야 하는 그런 순간을 대비해서는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잘 준비하고 사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날 마지막 날에 우리를 살리는 것은 그동안 애써 모아두었던 재물이나, 지위나 명예, 세상 사람들의 일시적인 칭찬이나 평판이 아닐 것이다. 갑자기 들이닥칠 그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살리는 것은, 평생에 걸쳐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고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서로 화목하고 나누는 가운데 도우며 살아왔던 그런 자세와 모습일 것이다.

마음을 다해 항상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자기 삶을 성실하게 사는 자세를 갖추도록 하자. 매일 매일의 선택이 영원한 삶을 좌우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현재 생활에 신앙인으로서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다.

▶ 오상현 요한보스코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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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완성 될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 (백성)에게는 하느님의 말씀(뜻)을 전해주는 특별한 사람, ‘예언자’들이 있었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잘못)을 고발하고, 하느님의 심판(징벌)을 예고하였다. 하지만 예언자들의 간절한 마음은 백성들이 심판으로 ‘멸망의 길’ 을 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받는 심판의 벌은 벌이 아니라 벌을 주어서라도 잘못을 고쳐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전례 중에 봉독된 성경말씀의 주제는 ‘세상의 종말’ 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의 의미는 세상의 끝남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세상 종말(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모습을 제1독서에서는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12,2)” 하였고, 복음에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2)”고 말하고,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히브10,14)”라고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교회는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이미’ 역사 안에 와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승리는 ‘아직’ 이 역사 안에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처럼 아직 죄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완성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오든 간에 항상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해 나가는 이들입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의미는 우리의 종말(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우리 에게 회개의 기회가 남아있어 “성자께서 오시어, 뽑힌 이들을 모두 하느님 나라에 모아 드리실 그 날을 기다릴 수 있음” (본기도 참조)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으로 우리들은 최선을 다 하여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도 록 노력하여야겠습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내는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기복적이며 자기중심적이었던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기도(사제직)와 봉사(왕직) 와 복음 선포(예언자직)에 충실하여 좀 더 올바른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히브10,39)

▥ 춘천교구 강성구 사도 요한 신부 / 2015년 11월 15일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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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지옥의 문은 안쪽에 잠겨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전례력에 맞추어 오늘 복음에는 세상의 종말,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의 주제가 나옵니다. 종말은 신앙인들에게는 기다림이 성취되는 때이고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이런 까닭에 신앙인들은 종말을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종말인 듯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대한 말씀들은 먼 훗날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권고이자 가르침입니다.

오늘 하느님의 뜻을 찾고, 오늘사랑을 실천하며,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라는 것이 종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로댕은 오르세 미술관에 세워질 장식 박물관을 장식하는 일을 위촉받습니다. 단테를 좋아했던 로댕은 “신곡” 에서 영감을 받아 인간의 고통을 다룬 지옥을 작품의 소재로 장식 박물관 입구를 “지옥의 문” 으로 결정합니다. “지옥의 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 입니다. “지옥의 문” 의 상단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조각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사람” 은 지옥 문 앞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구원을 보겠지만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죽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용서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그 초대를 거절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일지라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옥의 고통은 하느님 자비의 결여가 아니라 하느님을 떠난 인간 선택의 결과입니다.

지옥에서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는 참회가 없다.” (다마쿠스의성 요한)

오늘은 두 번째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앙인이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당신의 뜻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fiat voluntas tua)라고 기도하는 사람들과 “내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fiat voluntas mea)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시고 선택을 하실 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Non mea voluntas sed tua fiat)라고 기도하셨습니다.(루카 22,42)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가난한 이를 선택하지 않고 자신만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이미 이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만을 사는 이는 지상에서 지옥을 사는 셈입니다.

한 인간이 가난한 이웃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공동체를 배척한다면 그의 삶 안엔 이미 지옥이 깃들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바라볼 줄 모르고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방식 자체가 이미지옥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 (C. S. 루이스)라고 합니다. 안에서 자신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가난한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래 판결을 들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마태 25,31-46 참조)

▦ 춘천교구 김재복 모세 신부 :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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