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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조회수 | 2,624
작성일 | 06.11.17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생수업」(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ㆍ데이비드 케슬러 공저, 도서출판 이레)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와 그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남긴 유언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라,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엮어가라'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한 순례자들이며, 잠시 지나가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끽하기 위해 여기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반영할 수 있겠냐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을까요.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놀거예요."

2004년 8월, 78살 나이로 별세한 저자 엘리자베스의 장례식 때 일입니다. 두 자녀가 그의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 안에서는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습니다. 동시에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종이봉투에서도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위령성월에 걸맞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시는 한편, 그 날과 그 시간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우리의 죽음이 어쩌면 한 개인의 종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잘 준비한 우리에게 있어 임종의 순간은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라 축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 영혼은 갓 허물을 벗은 한마리 어여쁜 나비가 되어 자비로운 하느님 품으로 훨훨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은 다름 아닌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건너가는 생명의 다리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의 인간적 나약함과 그로 인해 빚어졌던 그 숱한 과오들, 그 많은 죄악들이 주님 사랑 안에 말끔히 씻어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방황도, 더 이상 고통도, 더 이상 눈물도 없게 되는 그 순간, 갖은 속박에서 훌훌 털고 일어선 우리는 꿈에 그리던 대 자유를 얻어 영원한 아버지 나라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요즘 며느님들이 시어머님들께 주로 많이 한다는 거짓말 '베스트 5'가 있더군요. 5위: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가 될래요." 4위: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3위: "어머님이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위: "용돈 적게 드려 항상 죄송해요." 1위: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한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반면에 시어머님들은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신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들 하시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과제가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녕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또한 가장 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공평한 것이 또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부자건 거지건, 최고 권력자건 서민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손님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매일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잘 있어라'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가지만,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죽음이 내가 매일 출입하는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전혀 생각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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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 세계는 커다란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사회 전통도 기존의 규범도, 사람들의 기존 가치관도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서 듣는 말 가운데 ‘파괴’란 유행어가 생겨났습니다.

형식을 파괴한다, 가격을 파괴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파괴 현상이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나서 때로는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아노미 현상, 곧 ‘무질서 현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많이 듣고 많이 사용하는 말이 ‘구조조정’입니다.

어차피 파괴해야 할 것들은 적극적으로 빨리빨리 파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하나는 기회이고 다른 하나는 시련입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미리미리 대비한 사람들에게 미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의 미래는 시련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들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무화과나무를 보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살기 좋은 나라이지만 이집트나 팔레스티나는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큰 도로에 하수구나 배수구가 없다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 산천이 발갛고 비가 오는 우기가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우기에 비가 오면 무성하게 산천초목이 금방 자라나지만 건기가 되면 쉽게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무화과나무가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 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르 13,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 것처럼 미래가 있음을 깨닫고 더 나아가 종말이 있음을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어떻습니까? 미래를 잊어버리고 이 세상 끝 날이 있음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사람들이 미래를 잊어버리고 사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하나는 현재에 쫓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바빠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미래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어두워서 오늘은 간신히 견디지만 내일은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에 내일이 두렵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망과 좌절과 실패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갈 때 좋은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미래가 나를 향해 지금도 힘차게 달려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현재를 피할 수 없듯이 미래를 또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소중한 현재이고 내일의 미래입니다. 우리는 오늘 현재와 미래를 기왕이면 적극적으로 맞아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13, 32)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주관하시며 인도하시기에 그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하느님께 달려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볼 때 미래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기에 몇 분 후, 한 시간 후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파바로티는 성공하려면 50퍼센트의 선천적 재능과 50퍼센트의 인간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에디슨은 99퍼센트의 노력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결정된다고 했지만, 하느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인간이 99퍼센트 노력을 해도 궁극적으로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지켜주고 주관하시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렸기에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래전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광고였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순간의 선택,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반드시 결정의 순간이 우리 앞에 닥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 어느 것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될지를 고민하며 선택하게 됩니다. 특히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면 더더욱 손해보다는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피해버립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이렇게 부분적이며 편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떠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 16–18) 이렇게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 ‘그날과 그 시간’은 모른다 하더라도 두려움 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결정하든 가족이 결정하든 순간순간의 결정이 중요한 만큼 우리는 모든 일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을 앞두고 갈등을 느낄 때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시다.

▶ 정애경 수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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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연중 제33주일, 교회력의 끝부분에서 우리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쏜살갈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대림에 성탄시기가 어제인 듯 했는데 벌써 전례력으로 한 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참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도대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악순환의 반복되는 야만의 역사입니다.

어제는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 다발 테러로 127명이 사망했고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서울 광화문 한 복판에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이후 10만의 최대인파가 운집하여 ‘민중총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들은 집회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노동개혁에 반대하고, 청년실업 문제, 쌀값 폭락, 빈민 문제 등의 해결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모두가 절박한 요구들입니다. 둘 다 종말의 표징들처럼 불길한 느낌이 드는 사건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됩니다. 세상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모두 오늘 복음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처럼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우리의 문 가까이에서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사람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역사를 잊었기에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진실한 회개를 통해서만 반복되는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늘 새롭게 역사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회개한 이들의 공통적 물음이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셋으로 귀결됩니다.

첫째,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을 때 참된 삶, 진실한 삶입니다. 하느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날로 깊이 뿌리내려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로 바치시고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변호하고 계십니다. 하여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진 우리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기에 비로소 참되게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을 때, 주님의 말씀과 하나되어 살 때 참된 삶에 튼튼한 영혼이요, 두려움도 불안도 사라집니다. 깊은 안정과 내적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희망이 있을 때 착한 삶, 선한 삶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미래요 희망이 될 때 항구하고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평화와 기쁨이 뒤따릅니다. 희망을 잃어 절망할 때 저절로 거칠어지고 악해지는 심성입니다. 새삼 희망과 선善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을 붇돋아 줍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을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끝은 시작입니다. 죽음은 새생명의 시작입니다. 현세의 삶이 끝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새롭게 시작됨을 보여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역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신화적 표현안에 담긴 주님의 진실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런 궁극의 희망,하느님이 계시기에 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랑을 하며는 예뻐진다는 대중가요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윤을수 신부님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하느님’과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진정 항구히 사랑할 때 행복한 삶이요 아름다운 삶입니다. 하여 며칠간 수녀님들께 고백성사 때 드린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피정기간 동안, 늘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이것이 보속입니다.”

자화자찬 같지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보속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낼 때 저절로 깨끗한 마음에 아름다운 삶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 말씀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궁극의 종말의 날은 하느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 지금 여기서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내일 세상이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어느 현자의 말처럼,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않고 평상심으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살며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과 진선미眞善美의 삶이 일치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믿음으로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2.희망으로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3.사랑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신망애信望愛의 하느님, 진선미眞善美의 하느님입니다. 이런 삶 자체가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이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신망애의 삶을, 진선미의 참되고 좋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시편73,28).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5년 11월 15일
  |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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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종말”에 대한 ‘징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징표’는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종말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구약에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 대한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곧 재앙의 시기와 더불어 박해받는 자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말은 재앙의 때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는 위로가 약속됩니다. 이처럼, 종말사상은 부활과 직결됩니다. 그래서 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와 용기가 됩니다.

<제2독서>는 구약의 사제직을 초월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제직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의 사제들이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한데”(히브 10, 11) 반해, 신약의 사제 예수님은 “단 한 번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 쪽에 앉으셨음”(히브 10, 12)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사제의 제물이 반복해서 봉헌되어도 결코 그 죄를 사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희생 제물은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미 죄가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히브 10, 18)

오늘 <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표상을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린다.”(마르 13, 24-25)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파괴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뎅이 지적한 대로,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일치된 사고를 통해 시간과 공간 밖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종말은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사실상, 그것은 물질과 역사의 모든 조건을 초월하는 자유, 곧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일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우주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듣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느님나라는 시작되었고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종말, 곧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언제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습니다. 사실 지금,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헨리 나웬).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성과 영광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무화과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수 있듯이, 세상의 사건들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을 깨달아야”(마르 13, 29) 할 일입니다. 곧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할 일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깨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비가 올지 안 올지, 날씨가 추울지 더울지를 감지해내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렇게 마련해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비로소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대의 징표를 깨달을 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건과 만물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 16).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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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르 13,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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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판을 바라봅니다. 빈 들판처럼 비워내야 할은총의 때입니다.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고마운 마무리의 시간입니다. 마무리가 있기에 모두가 고마운 것입니다.

생명의 세계에는 마무리 또한 새로운 시작임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십자가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죽음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유한한 시간을 사는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와같이 자비가 필요한 가난한 영혼들의 시간입니다.

가난한 이를 위해 기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 또한 가난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나누고 떠나듯 끝이 아름다운 영혼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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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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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3   [군종] 왕입니다요.  155
712   [광주] 이 세상 왕이 아니다  [1] 2085
711   [인천] 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2] 2085
710   (백)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성서 주간)]독서와 복음  [4] 892
  [수도회] 하루 하루를 꽃밭으로  [4] 2624
708   [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2] 1123
707   [부산] 이 순간 최선을 다하자  [5] 2333
706   [수원]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  [5] 2747
705   [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2] 2718
704   [대구] 빛과 소금의 삶  [2] 2159
703   [청주] 낼까 말까? 얼마 넣을까?  195
702   [광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198
701   [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8] 2785
700   [인천] “미쳤어. 저렇게 왜 살까?”  [4] 2500
699   [전주] 종말론적 교회  [1] 2574
698   [의정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  [3] 2246
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984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252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220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250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988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760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750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92
689   [부산] 참된 봉헌  [5] 2559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613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863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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