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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
조회수 | 2,775
작성일 | 06.11.17
전례력 마감을 앞두고, 교회는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바빌론 유배 이후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종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표현하면서 반드시 종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치·사회·경제·도덕적 생활 전반에 걸친 혼란과 고통을 겪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실현될 날이 임박했다고 믿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존 사회의 가치와 불의를 고발하고 이를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 개혁하려고 하면서 다윗왕정의 회복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와 악으로 물든 세상에 초연한 자세를 취하면서 다가오는 우주의 새 창조를 통해 세상의 완성을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하느님의 날을 기다리며 올바르게 산 사람들에게 커다란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현실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종말이 언제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종말 사건을 계시하시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메시지를 숙고하고 이를 사는 것입니다.

코헬렛(전도서의 저자)은 “하느님께서는 의인도 악인도 모두 심판하시니, 모든 일과 모든 행동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전도 3,17)라고 하면서 인간이 하느님의 때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평가하는 발문의 저자는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전도 12,14)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마르 13,33) 한다고 경고하십니다. 지금 당장 하느님의 심판이 있지 않다고 악한 일을 계속하면서 죄를 짓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면서 교회에 오면 하느님께 두 손 모아 빌며 죄의 용서를 청하는 제사를 바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는 분명히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도처에서 시련과 가난, 소외와 억압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통이 없는 초월적 세계만을 갈망하며 현실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악의 세력을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분은 예수님뿐임을 믿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희생제물이 되시어 악한 세상을 이기는 지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고통’ 안에서 예수님의 고통의 신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지금 여기에서’ 밝은 하늘처럼 빛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 박영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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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 독서해설

1. 다니엘서는 오늘 독서에서 특별히 '육신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이 부분은 구약 전체를 통해 볼 때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리키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마카 7,9-36; 욥 19,26-27; 이사 26,19 참조). 그런데 '부활'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소위 종말(終末)이라고 부르는 마지막 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사실 다니엘서 전체를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마지막 때에 대한 기대와 그 때에 맞이하게 될 왕국, 곧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입니다(다니 2,44; 3,33; 4,31; 7,14 참조). 종말에 대한 이 희망에 의지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시대(기원전 167-164년경)를 살아가던 당시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항구할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서가 주는 종말론적 희망의 메시지에 비추어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2.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와 레위 가문의 제관들을 비교함으로써 그분의 봉헌이 얼마나 더 가치 있고 완전한 것인가를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새로운 길을 터 주셨다는 사실(히브 10,20)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엄청난 주님의 사랑으로 속죄 받고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우리는(10,17) 굳건한 믿음 안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하는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10,22-24). 그리고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더욱 더 그래야 되겠습니다"(10,25).

▶ 복음해설

1. 복음 이야기(마르 13,24-32)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종말설교이며, 마르코 복음서에 의하면 종말의 날은 두 단계에 걸쳐 옵니다. 종말의 첫 단계는 우선 "황폐의 흉물이 있어서는 안될 곳에 서 있는"(14a절)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 황폐의 흉물은 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그가 성전에 나타나면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버리고 빨리 도망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 때 벌어질 재난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또 없을" 엄청난 재난이라는 것입니다(19절). 그러나 이것은 종말의 첫 단계일 뿐 곧이어 종말의 두 번째 단계가 닥치게 되는데 오늘 복음이 그 내용입니다.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제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에 있는 권세들은 흔들릴 것입니다"(24. 25절). 그리고 드디어 인자가 구름에 싸여 큰 권능과 영광을 갖추고 세상에 내려와 선민들을 불러 모을 것입니다(26. 27절). 이처럼 종말 사건은 예수의 재림으로 완성을 거둔다고 합니다. 이제 복음서 작가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의 징조를 일깨워주면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권합니다(32-37절).

2. 우리의 이해

서기 전 200년경부터 서기 100년경 사이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성행한 종교문학은 묵시문학입니다. 이 묵시문학은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면서 역사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리는 방편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의 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의인이 박해를 받지만 앞으로 올 시대는 하느님께서 통치하는 빛의 시대로서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되며, 그 시기는 이미 임박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이 오기 전에는 여러 가지 전조가 생긴다는 내용이 묵시문학에 담겨 있습니다. 수난의 시대를 살아간 신앙인들의 신앙체험으로서 하느님의 침묵이 계속되는 듯한 '중간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한 유형을 제시한 점에서는 묵시문학의 순기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로부터 역사의 퇴화과정, 종말전조, 인자가 오시는 시기와 장소, 부활과 심판의 양상, 구원받을 사람의 수효 등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묵시문학도는 될 지언정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묵시문학에 담겨 있는 표현들이 지닌 그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께 어떤 사람이 "주님,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여러분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시오. 여러분에게 말하거니와, 사실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루가 13,22-24). 이는 묵시문학적 상상에 사로잡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종말이 올 지 따지지 말고 언제라도 하느님의 미래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라는 말인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홍보국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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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우리를 구원하시러 어서 오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난이 다 지나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잃고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며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다."(마르 13,24-25)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가끔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고 또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욕심도 부리게 되고 과도한 욕망 즉 탐욕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망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실패를 하거나 파산을 하게 되면 그제야 '아, 내가 욕심을 부렸구나!' 하고 자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보이는 권좌와 부, 명예 등이 정말 허망한 것이고,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고 또 가지고 싶고 도달하고 싶어하던 그 모든 것이 빛을 잃고 자기 생각이 흔들리게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실패가 우리를 눈뜨게 하고 제정신이 들어 주님을 쳐다보고 믿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26)

한편 주님은 영광에 싸여 오십니다. 그분은 정복자와도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우리를 괴롭히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다."(27) 이 얼마나 고맙고 감격할 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곧 오실 터이니, 가진 것을 다 팔아 나에게 바쳐라." 하기도 하고, "하늘에 오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두 집과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가지고 와 바친 다음에 여기서 하늘에 오를 것을 기다려라."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고! 여기 저기 흩어져, 돈과 세상의 모든 굴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모으실 것이라고. 우리의 잘남과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를 뽑아서 불러모으실 것이라니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일까! 정말 그런 주님께서 어서 오셔서 나를 구해주셨으면 좋겠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러 어서 오십시오.

▶ 심흥보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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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북악산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을의 절정은 오히려 지금인 것 같습니다. 색색의 옷으로 물들어 있던 나뭇잎도 다 떨어졌는데,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잎들을 떨궈내느라 나무가 시들고 생기를 잃어갑니다. 이미 떨어진 낙엽, 아직 남아 있는 나뭇잎. 봄날과 여름을 잊어버린 듯 깊은 침묵 속에 잠겨드는 나무. 늦가을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영원과 순간을 사색하기에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할 때 충격적인 느낌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다니엘 예언서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종말론적인 세말(世末)에 관한 색채와 묵시문학적 이미지 때문이겠지요. 가장 큰 재앙을 말씀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제1독서의 다니엘서를 다시 읽는 것 같습니다. 기근, 전쟁, 재난, 종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 표징과 이적들, 정해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 우리가 상상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9·11테러와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 여름의 집중호우,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곳곳에서 재난의 조짐들이 보이고 또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말(世末)과 묵시(apocalypsis)’라는 어휘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든 불확실함과 공포를 딛고서 정말 무엇인가를 다시 희망하게 하는 것은 제2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율법을 넘어서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당신 친히 제물이 되시어 단 한 번의 제사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시고 그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하시는 분. 종말의 때를 묵상하면 할수록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이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옵니다. 하느님은 두렵고도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마지막 날이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는 즐거운 상봉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일상에 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무화과 잎이 연해지는 것을 보고도 여름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종말의 때는 올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요. 그 때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사랑이 당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뭘 믿는지 모르고,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고 죄 많은 불쌍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악의 세력이 막강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세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충실히 믿는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므로 항상 ‘깨어 있어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구약성경의 묵시문학과 오늘 복음이 겨냥하는 목표입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자니 날이 어두워져 아까 보았던 나무와 낙엽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옵니다. 사람의 구별과 분별이 사라지는 시간. 그 시간은 또 다른 질서가 시작되는 시간이겠지요. 사람들의 온갖 분별과 인식을 넘어선 하느님의 가치와 질서로 채워지는 또 다른 세상. 생각하니 편안해집니다.

▶ 이기락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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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 황일광은 왜 천당이 두개라고 했나?"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 노력으로 태동한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을 위해 쓰인 「천주실의」, 「칠극」 등의 예비신자 교리서가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 땅에 들어오게 되고, 이에 관심을 가졌던 실학자들에 의해 천주학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수십 종의 교리서와 성상, 성화, 묵주 등을 가져와 이벽에게 건넸습니다. 천주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이벽은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한양 수표교 인근에 있는 집에서 친우들과 천주교에 대해 토론했고 이벽, 권일신, 정약용에게 대세를 주면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는 평신도들에 의해 시작됐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두 분의 중국 사제가 활동했을 뿐입니다. 박해 중에도 평신도들의 열성적 활동으로 가꾸고 지켜온 빛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볼 때 어려운 여건에서도 맹렬히 활동한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 선교사를 모시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5000리 북경 길을 아홉 차례나 다녀온 정하상 바오로, 16살에 장원급제하여 임금과 뭇사람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하느님을 알고부터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쓰레기처럼 버린 황사영 알렉시오 등 신앙 선조들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 신자가 되고 나서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세상의 제도와 가치를 뛰어넘은 것은 물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달레 천주교회사」에 황일광이라는 백정 출신의 천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처음 신자들 모임에 갔을 때 당대 석학인 양반들이 자신의 옷소매를 끌며 어서 올라오라며 환영했습니다. 천민은 감히 양반의 대들보 위에 오를 수 없는 시대였기에 황일광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분이 어떻든 서로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천주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는 천당이 두 개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죽어서 갈 곳도 천국입니다."
 
이처럼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교회 창립 때부터 주도적 역할을 해왔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는 것은 물론 세상의 모든 제도와 문화를 뛰어 넘어 하느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자랑스러운 선조를 모신 평신도들이 그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모으는 주일이 오늘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나 수도자와 달리 세상에 속해 있고 세상에서 활동하도록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히 세상 흐름을 복음 정신으로 변화시키고 살아야할 큰 소명을 받았기에 혼란한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로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 중심의 신앙이 자리 잡지 못하면 자칫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세상에 휩쓸려 속화되기 쉽습니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신자들의 복음적 삶이 이어지고 있기에 비신자들에게 앞으로 신앙을 갖게 되면 어느 종교를 믿겠느냐는 질문에 "천주교"라는 답이 월등히 많습니다. 천주교는 어지러운 세상의 희망이고, 그 어느 종교보다 깨끗하며 함께 하고 싶은 종교로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보이는 곳과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신자들에 기인한 것입니다.
 
평신도들의 구원이 이뤄지는 장은 몸담고 있는 가정과 직장, 그리고 세상 한복판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고유한 특징인 세상의 복음화에 앞장 서는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신앙 선조들처럼 여러분들의 삶이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리는 표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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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끼십니까?

어원론적으로 볼 때‘종말’이란 말 속에는 세상이 끝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완성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은 반드시 종말의 순간을 맞게 될 것입니다(마태 13,39). 다시 말해서 현재의 세상은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요한 3,17) 새롭게 될 것이며(사도 3,21) 다가올 세상에 자리를 양보하게 될것입니다(에페 1,21). 하지만 문제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마르 13,33).

종말의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그야말로‘주님의 날’로서 세상이 완성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마태 10,22). 세상 종말의 날은 기존 질서와의 근본적인 단절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절이란 세상의 모든 가치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죄스런 세상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단절을 뜻합니다. 창조된 세상이 종말을 맞는다는 것은 모든 의인들이 하느님 나라에 회동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 같은 사실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 전승에 속한 상징적인 언어 표현들을 갖다 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세상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당신 제자들이 그 순간을 잘 맞이하도록 준비하면서 살아갈 것을 촉구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측의 오류를 범하는 어리석음을 떨쳐버리고 매 순간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로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현재의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끝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비극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공부하는 것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정년퇴직을 한다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끝냈다고 할때, 그 경우 끝이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뿐, 모든것이 소멸되거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희망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보면,‘ 끝’이란 말 속에는 비극적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종말이란 표현을‘오늘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바로 그날’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종말이란 호기심의 대상이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종말이란 희망이 실현되는 결정적인 순간으로서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는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절박한 인식 속에서 살아가야할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안에서 찾아집니다.

‘오늘이 구원의 날이요 희망을 살아가는 날’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 안에서는 종말은 이미 시작된 것이고 그런 점에서 믿는 이들은 오늘이라는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종말이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희망을 살아가는 기쁨의 순간임을 보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과연 우리의 모습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지요?

▶ 안병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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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또 다른 내일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은 두려운 일입니까? 늙어도 죽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두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살아있을 때 가지려고만 하고, 이기려고만하고, 즐기려고만 했다면 죽음은 두려운 사건일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죽음은 크나큰 상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욕심부리지 않고,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인생을 물흐르듯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죽음은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내일 일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늘 성실히 준비하면 내일 행복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내일 뒤에 내일, 그 내일 뒤에 내일, 그 뒤에 내일은 죽음입니다. 사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내일을 준비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실제로도 내일은, 오늘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사는 것입니다. 나날이 신체도 변하고 생각도 변해가니 매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에 가면 목어(木魚)라는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지요. 그래서 목어가 깨어있음의 상징이랍니다. 그러나 눈을 감지 않는다고 다 깨어있는 것은 아니지요. 쌍꺼풀 수술이 잘못되면 눈을 뜬 채 잘수도 있으니까요. 깨어있다는 것은 성실하게, 착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깨어있는 우리는 오늘, 우리 안에 심어진 선성(善性)으로 착한 삶을 살아갑니다. 선함과 아름다움과 사랑과 친절과 도움으로 애쓰며 미래를 준비합니다. 오늘 성실히 준비하면 내일이 아름답듯이, 내일 내가 죽는다면 오늘 준비한 그 성실함이 아름다운 천국을 열어줄 것입니다. 혹, 내일 내가 죽지 않는다면 나는 내일 천국을 앞당겨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성실히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늘이나 내일이나 언제든지 열리는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그 다음 날도 크게 다를 것 없는 내일의 하나이며, 내가 떠난 후 남겨진 사람도, 떠나온 나도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할 뿐입니다. 하루하루 내일을 준비하며 성실히 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종말이란 미래에 있을 멸망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우리를 겁나게 하고 조급하게 만드는 그런것이 아니라, 오늘을 마지막처럼 잘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오늘이 용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오늘이 사랑한다 말하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종말과 죽음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잿빛 11월, 죽음을 묵상하는 달, 우리의 삶이 부질없는 욕심과 집착과 미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언젠가 나를 찾아올 죽음이 친구처럼 편하고 반갑도록 잘 준비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고, 이별이 아니라 만남이며, 가장 확실한 우리의 내일입니다.

서울대교구 고찬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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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의 비망록

1. “책에 쓰인 이들”(제1독서: 다니 12,1)
이른바 비망록(備忘錄)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 둔 기록’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 에 등장하는 ‘책’을 ‘하느님의 비망록’이라고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이 책 안에 ‘현명한 이들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이 적혀 있다고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할 이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지난달 어느 평일 미사 강론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비망록에 악행을 저지른 이들의 이름은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구원받지 못한 ‘부자’의 이름은 없습니다.(루카 16,19-31 참조)

2. “거룩해지는 이들”(제2독서: 히브 10,14)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자유의지론」에서 “그대가 잘 성찰한다면, 그대가 최고로 존재하는 그분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 만큼 그대는 불행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면서, 날마다 주님과 더욱 친밀하게 결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신자들을 깨우쳐주십니다.

사실 오늘 제2독서에서 보듯이, 우리의 구원은 단 한 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지치거나 광신주의(狂信主意)에 빠지지 않고’(「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35항 참조), 주님의 구원사명에 동참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3. “‘사람의 아들’이 선택한 이들”(복음: 마르 13,2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도래할 마지막 날의 징조에 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주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아들’에게 ‘선택된 이들’이 누리게 될 삶에 대한 본질적인 언급입니다. 즉,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그들에게 ‘구원자’이시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마르 13,31) 희망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되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온 힘을 다해 비울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비움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에 올바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4. 교형자매 여러분, 작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한국교회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오늘 교회는 복음이 지닌 구원 진리와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고 변모시키는 복음의 능력, 그리고 일치와 정의와 평화 안에서 인류 가족을 일으켜 세우는 복음의 풍요로움을 보여 주는 평신도들의 믿음직한 증언을 필요로 합니다.”라며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교회의 희망인 모든 평신도가 교황님의 당부처럼 주님의 복음으로 성화(聖化)되어 ‘하느님의 비망록’에 기록되는 은총을 누리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5년 1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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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어느덧 11월입니다. 화려했던 단풍이 지고 무채색의 겨울이 대지를 엄습하기 시작하는 이때를 교회는 위령성월로 정하여 우리가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죽음의 심연 너머에 찬란히 빛나는 부활의 희망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어느 옛 무덤의 묘비에 이런 경구가 적혀있다고 합니다.“Hodie mihi, cras tibi.” 번역을 하자면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말이 되겠지요.

자신을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이에게 망자가 전하는 마지막 한 마디는 이토록 처연합니다. 죽음이 오늘은 나를 찾아와 내가 이렇게 차디찬 땅속에 누워있지만 이제 머잖아 이 자리가 자네 몫이 될 터이니 마음 준비 단단히 하라고 나지막이 건네는 망자의 충고는, 우리네 삶이 늘상 죽음을 마주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가르치시며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듯, 우리의 죽음도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하지만 예외 없이 우리 각자를 찾아올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죽음의 문을 지나 마침내 뵈옵게 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이승의 재물을 모으는 데에만 급급했던 부자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루카 12,20)라는 하느님의 추상같은 한 마디에 덧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했듯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지 않은 이의 마지막은 황망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느님을 뵈올 준비를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을까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약은 집사의 비유’(루카 16,1-8)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꾸지람을 듣자, 주인에게 빈털터리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주인의 빚 문서를 조작하여 빚진 이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이로써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쫓겨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질 수 있게 말이죠. 어떻게 보면 자신의 불의함을 또 다른 불의로 덮은 셈이지만, 뜻밖에도 주인은 오히려 이 집사의 약삭빠름을 칭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관리자, 곧 집사인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능력과 지위, 재물을 사용하여 곤경 중에 있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돕는 것. 덧없는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모으고 쌓기보다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고 그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 서울대교구 최규하 다니엘 신부 :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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