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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조회수 | 2,701
작성일 | 06.11.17
어느 학자에 의하면 노년기는 신체적 사회적 상실에 직면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로 지나온 시간들을 회고 반성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파악하여 자아통합을 이루는 것을 과제로 안게 되는 시기라 합니다. 여기서 자아 통합이란 말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일들을 인정하고 용납하면서 지나온 삶에서 많은 것이 좋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람은 삶에 대한 통찰적 지혜를 갖게 되고 죽음을 위엄과 용기로 직면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 위기를 넘지 못하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절망의 느낌은 남은 시간이 없고 다른 인생을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인생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끼면서 자기 경멸을 경험하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 실망, 분노 때문에 삶을 돌아보기가 고통스럽고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외부세계로 투사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자기 통합과 절망이란 결과를 낳을까요? 노년기 이전의 삶이 문제라 합니다. 그 이전 단계에서 주어지는 위기와 갈등,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통과한 사람은 자기 통합에 이를 수 있는 반면 그 이전단계에서 주어지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절망에 빠져 인생에 대해 초연하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론은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면서 오늘 복음의 주제인 종말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론입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사건, 곧 인자의 내림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사건에 대한 내용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종말 직전에는 땅의 재난(마르 13, 5~13)과 성전 모독 사건(13, 14 ~23)에 이어 하늘의 이변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들이 종말의 전조이기에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종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도래 할지는 하느님만이 아시지만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도래한다는 임박한 종말론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분명한 차이가 있는 말씀이기에 해석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기에 혼란을 느끼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이 묵시문학의 영향 하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묵시문학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있다면 그 의미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난세의 문학입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에서 미래 종말의 희망이라도 불어 넣고자 탄생한 문학이 묵시 문학입니다. 역사에 절망하고 종말 초월자에게 희망을 거는 희망의 문학입니다. 그러기에 묵시문학적 서술을 대할 때의 자세는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희망의 관점에서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보기 보다는 신화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에서 사실과 과학적 지식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바로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따지고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이야기하며 기만과 공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종교들이 왜 사이비 종교일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큰 뜻만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그리고 종말의 주인공은 사람의 아들이요, 모르는 그날과 그 시간을 직면하기 위한 초연하고도 적극적인 삶이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입니다.

▶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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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은 온다 분명히 온다

오늘은 연중 제33주일로서 전례력으로 봤을 때 이제 마지막 시기의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세상 끝날에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상기하면서 긴 연중 시기는 막을 내립니다. 오늘 성서의 내용은 그래서 마지막 시기, 즉 종말에 대한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습니다.

끝날은 옵니다. 분명히 옵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운명의 종말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의 보편적인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 께서는 묵시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주님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올 것이며,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으로부터 뽑힌 사람들을 모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역사 안에서 건설될 하느님의 나라를 꿈꿔 왔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지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때가 되면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등장하여 이상적인 세상, 즉 지상 왕국이 바로 이 땅 위에서 영광스럽게 세워지리라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예언적 종말론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그와 같은 이상적인 지상 왕국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참담한 유배생활과 모진 식민생활을 거치면서 이제 그들의 미래가 얼마나 암담하고 절망적인지 를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다 틀렸습니다. 역사 안에서 기대했던 지상 왕국은 영원히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등장된 것이 묵시적 종말론입니다.

묵시적 종말론이란, 우리가 기대했던 이 세계가 우주적인 대 재난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붕괴된 후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세계 밖으로부터 권능을 떨치며 와서 초역사적이고 초지상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 표현을 쓰셨지만 그러나 이 종말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인 표현에 대해 성서의 원문이 말하는 그 이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에서도 예수님이 살아 계실 당시에 종말이 오리라고 믿었고 적어도 그들의 세대가 눈감기 전에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올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종말에 대한 혼란만이 있었습니다.

종말론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날'이 언제냐 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마르13,4)라는 질문은 2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항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모릅니다. 다만 끝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만 확실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소위 시한부 종말론이 19세기 중엽, 미국에서부터 등장하더니 급기야는 우리나라에까지 번져 벌써 십여 차례 사회를 떠들썩한 혼란 속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특히 1992년 10월 28일에 세상 종말이 온다고 외쳤던 다미 선교회는 그 대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천주 성부만이 '그날'을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짜 하느님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을 외치는 이들의 속 마음은 뻔합니다. 신도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어넣어 단시일 내에 교세를 확장시키고 또한 재산을 헌납 받음으로써 부를 축적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 속 내용을 모릅니다. 오히려 사이비 교주의 기만에 따라 순교라도 하겠다는 각오들을 드러내니 그 어리석음에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모든 상황을 보면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은 물론 심각한 환경 오염과 그리고 낙태로 인해 살해되는 수많은 무구한 생명들을 바라볼 때 이 세대가 이미 마지막 시대에 와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징조가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회개해야 하며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1독서에서 다니엘은 착하게 산 사람들은 끝날에 영광을 받고 악하게 산 사람들은 단죄를 받는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따라서 인생이 죽음으로 아주 끝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엔가 모두 다시 살아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을 각각 차지하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지로 돌아갔던 인생은 다시 일어납니다.

구약에서 부활 신앙은 크게 진전된 것이 없지만 그래도 오늘 다니엘서를 보면 부활에 대한 최초의 믿음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끝날은 있고 심판도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행한 대로 상이나 벌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그날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계절적으로도 반성과 다짐의 시기입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종말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갑시다.
끝날을 잘 맞이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산 사람이고 또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홍금표 신부
  |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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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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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33주일이면서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은 프란치스코교황께서 명명하셨고 올해로 두 번째 맞이하는 해이기도 합니다. 아직 익숙한 이름의 주간은 아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행적으로 볼 때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요한의 첫째 서간에서 따온 “말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합시다”라는 말을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이 구 절만으로도 우리가 맞이하는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의 설명도 필요할 듯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참조). 요한 복음사가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외아드님을 보내주신데서 표현되었습니다. 이 “보내심”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모두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하신 것들을 우리들은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 우선적 선택을 하신 가난한 이웃들이 바로 우리 이웃들 이고 우리가 도와야함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 성인은 자신의 저술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려고 받은 재화를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아껴 두었습니다. 어떤이가 다른 이의 옷을 훔치면 우리는 그를 도둑이라 부릅니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에게 우리는 도둑이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찬장에 있는 빵은 배고픈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장롱에 있는 입지 않은 코트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여러분 장롱에서 썩고 있는 신발은 없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도와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많은 가난한 이 들에게 불의를 범한 것입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 18)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가는 지금, 우리 이웃들에게 눈길을 돌려야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기도뿐 아니라 직접적인 도움까지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작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에서 교황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우리 삶으로 받아드리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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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교구 박준혁 프란치스코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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