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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
조회수 | 2,163
작성일 | 06.11.23
▶ 좋은신 하느님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이며, 위령성월의 끝 주일인 오늘,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스산히 다가올 겨울을 생각해 봅니다.

이때에는 삶과 죽음, 인생의 허망함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교회는 오히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며 또다시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전례력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희망을 노래하는 희망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물어 가는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우리는 또다시 참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 스산함, 이별, 눈물, 절망 등의 단어와 삶이 아닌 기쁨, 설레임, 환희, 자유, 해방, 빛 등의 진리를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기쁨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진리를 생의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상(세례자 요한) 시인께서 예전에 하셨던 강의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신의 실재 문제에 대해 치열하고 처절할 정도의 내면적 자기 싸움을 한 가톨릭 시인으로 20세기 초 영국 출신 ‘프랜시스 톰슨’을 꼽습니다. 그는 아편쟁이로 빈민굴을 헤매다 죽었습니다. 그의 작품 ‘하늘의 사냥개’를 여기에 소개합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 내 마음의 얽히고 설킨 미로에서 / 눈물로 시야를 흐리면서 도망쳤다. / 나는 웃음 소리가 뒤쫓는 속에서 / 그를 피해 숨었다. /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으로 / 유유한 속도, 위엄 있는 긴박감으로 / 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 /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 목소리, /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게 저버림을 당하리라! <후략>

이 시인은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까지 비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치 하늘의 사냥개처럼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꾸 따라온다고 하였습니다. 시인 자신은 신을 멀리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도 따라오고 뒤쫓아오고, 벗어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마치 저주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제발 하느님을 너무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보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참된 왕으로 세워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또다시 생각해야 할 것은 이토록 소중한 신앙을 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려야 하며 간직해야 합니다.

▶ 간직해야 할 신앙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로마 5, 2)

자주, 그리고 진실로 하느님을 고마운 분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의 신앙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각오로 모든 유혹에 대항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의 최재천 교수님은 토종 생물과 외래종에 대한 연구에서 이 같은 주장을 역설하셨습니다.

“도입종들이 모두 잘 적응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절대 다수는 낯선 땅에 발도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정말 아주 가끔 남의 땅에서 들풀에 붙은 불길처럼 무섭게 번져나가는 것들이 있어 우리의 주목을 받을 뿐이다. 그렇게 남의 땅에서 의외의 성공을 거두는 종들은 대게 그 땅의 특정 서식지에 마땅히 버티고 있어야 할 종들이 쇠약해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들이다. 토종이 제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는 곳에 쉽사리 뿌리 내릴 수 있는 외래종은 거의 없다.”

생물의 세계도 이러할진대 인간 영혼의 세계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의 소중한 신앙을 간직하는 강한 뿌리가 내려져 있는데, 어떤 이단과 유혹이 우리의 신앙을 넘어 오겠습니까?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 37)

모든 진리의 시작이며 끝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진리를 세상에 펼치셨는데, 우리가 또다시 따라야할 어떤 진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그분의 왕국이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는 그 왕국의 백성이 되었는데 또다시 어떤 유혹이 우리를 미혹시킨다는 것입니까? 이를 알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살아가는 그분 백성의 자세인 것입니다.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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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왕이신 그리스도

지금 예수님은 손을 묶인 채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 죄수의 몸으로 서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은 빌라도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오히려 당황해서 묻습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은 한 때 군중들이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을 때 이를 거절하시고 피해가셨습니다. 종교와 정치를 혼동한 유다인들이 로마 군정으로부터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지도자로 예수님을 내세우려고 했기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 앞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서 계시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라고 엄숙히 선언하십니다.

빌라도는 더욱 당황해집니다. 그가 생각하는 왕은 충성된 신하들이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강력하고 지배적인 인물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원하는 대로 동원하고 행사하는 절대적 통치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전혀 다른 의미의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봉사를 받으려 오시지 않았고 섬기려 오셨으며, 남을 지배하려 오시지 않고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쳐 생명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구너력이나 금력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 즉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고 다스리시는 평화의 임금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왕권이 세상의 왕권같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해 유지되고 이 진리를 밝히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선포하시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는 과연 '진리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세속의 정신에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지위나 돈, 정치 권력 등에 의존하려는 유혹이 늘 우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교회의 방대한 조직과 재산, 권력, 권위 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것들이 교회를 위대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보는 왜곡된 시각을 가진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반대 세력들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과 옳은 일을 위하여 투신하는 '진리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품어 안으시고 세상의 온갖 악의 세력에 대적하여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 가시는 우리의 임금님. 우리도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악의 유혹을 쳐부수는 무기로 삼아 우리의 임금님을 따라 나서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왕도는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춘천교구 임홍지 알로이시오 신부
  |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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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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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해변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 지금의101번 도로를 일명 ‘왕의 길(EL Camino Real)’ 이라고 부른다. 프란치스코수도회 소속 후니 페로(Juniper Serra)신부가 1769년 샌디에고에 첫 번째 미션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스페인 수사들이 미션을 건립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해안을 따라 갔던 길이다. 약 900여 Km의 거리를 대략 21등분하여 총 21개의 미션을 세웠다,

미션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교화하기 위해 스페인에 의해 세워진 가톨릭 수도원 형식의 공동체이다. 주된 목적은 선교였지만 당시 스페인 군대의 군사적 목적의 요새로서의 기능도 함께 했던 곳이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오늘날 아메리카대륙의 복음선포는 성공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자랑스런 결과 뒤에는 참담했던 원주민들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혀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왕의 길을 따라 미션 순례를 하면서 진정한 왕의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교회는 오늘 연중시기를 마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구원자이시며 왕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교회가 선포하는 왕은 섬김과 가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진리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힘과 권력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마태 10,45)는 말씀처럼 백성을 위해 자신을 바친 섬김의 왕이시다. 그분의 왕직에 참여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우리들은 더 많이 섬기고 봉사하고 나누고 베풀며 살아야 할 것이다.
왕(王)이라는 글자는 ‘요리왕’ , ‘수학왕’ , ‘판매왕’ , ‘농구왕’ 처럼 어떤 분야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칭찬할 때는 뒤에 붙여 쓴다. ‘왕재수’ , ‘왕자병’ , ‘왕싸가지’ 처럼 앞에 붙여 쓸 때는 비아냥을 뜻한다. 단 ‘왕만두’ , ‘왕대포’ , ‘왕대추’처럼 크기가 큰 것을 나타낼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진정한 왕은 앞이 아니라 뒤에 따라올 때가 제격이 아닐까 싶다. ‘섬김왕’, ‘봉사왕’, ‘기도왕’, ‘전교왕’, ‘나눔왕’, ‘친절왕’ , ‘감사왕’ 이 되도록 하자. 왕이 앞에 나오면 큰 것을 제외하고 정말 왕짜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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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교구 김명식 가브리엘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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