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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조회수 | 1,949
작성일 | 06.11.23
마흔 무렵 세상을 떠난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임종 후에 베개 밑에서 편지가 한통 발견되었는데, 홀로 남게 될 남편에게 남긴 글이었습니다. 부인의 미련과 아쉬움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안타까움에도 또 다른 삶을 확신하는 그 깊은 신앙이 부러웠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먼저 떠나서 당신께 정말 미안해요. 그렇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어요? 무책임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먼저 떠난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주님 나라에 먼저 가서 좋은 곳에 자리 잡고 기다릴게요. 당신께 정말 고맙고 또 미안해요."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어요? 주님 나라에 먼저 가서 기다릴게요"라는 말이 하루 온 종일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승을 떠나는 것이 정녕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부르시는데 어쩌겠냐는 그 마음, 이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을 확신하는 부인 유언에서 참 신앙인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나 갯바위 끝에 설 때마다 드는 느낌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세상 끝에 서서 한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지금 비록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저 바다 건너에 또 다른 대륙이 자리 잡고 있겠지? 마찬가지로 이 고단한 이승 삶을 건너가면 반드시 또 다른, 더 나은 삶이 새롭게 시작되겠지, 결코 여기가 끝이 아니겠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갑자기 가슴이 훈훈해져 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훨씬 부드러워 집니다. 가슴이 설렙니다.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어서는 절대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인생의 끝, 삶의 막다른 골목은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길목이 아닙니다. 인생 종치는 날도 아닙니다. 어쩌면 희망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출발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런 진리를 다시 한번 확증해주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비록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파도가 높기만 할지라도, 극심한 고통에 힘겨운 나날을 보낼지라도 절대로 낙담하지 말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며, 언젠가 주님께서는 축복의 잔으로 변화시켜주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러기에 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 다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희망의 들판으로 다시 나가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니 '생활속의 복음' 원고를 쓰기 시작한지 만 3년이 지났습니다. 마지막 원고를 보내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오래 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날 이리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 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원고를 쓰자니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좀더 노력할 걸, 좀 더 고민할 걸, 좀 더 진지했어야 했는데, 내가 아니라 주님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부족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간 나름대로 일상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흔적을 찾아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기회를 주신 평화신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운 제 신앙나눔에 많은 격려를 보내주셨던 독자 여러분께도 고개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천둥이 내리친다 하더라도 세상이 끝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두운 하늘 그 너머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찬란한 태양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고통이 극심하다 하더라도, 실패만 거듭된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 저 너머에 이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풍요로운 주님 나라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이승살이에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하기 위해 환한 얼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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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선포가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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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가진 것으로 군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진 것 없이도 존엄을 지키는 일이며, 명령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동의를 끌어내는 것이고, 존재감을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편적 진리이고 이 보편적 진리를 증언하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세상의 온갖 모욕과 비웃음을 견디시며 사랑의 완성으로 진리를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기념합니다. 진리는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온 누리의 임금”, “세상 임금들의 지도자”(묵시 1,5)라고 부릅니다.

■ 복음의 맥락

복음의 본문인 요한 18,33-38은 로마 총독 관저에서 진행된 예수님의 재판 장면(18,28-19,16)에 속하며, 소송의 직접적 원인이 드러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작정한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로마 총독의 관저로 보냅니다. 당시 죄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합법적 권한은 오직 로마 정부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그의 당연한 권한이요 의무로 예수님에 대한 심문을 시작합니다. 다만 오늘 본문은, 영원한 왕국의 통치자가 멸망할 왕국의 통치자 앞에서, 해방자이신 분이 묶여있는 죄수의 모습으로, 거룩함과 선(善) 자체이신 분이 죄인으로 법정에 서 계시다는 팽팽한 긴장과 모순을 배경으로 합니다. 밤새도록 병사들의 조롱과 고문을 받으셨고 이제 곧 사형에 처해질 상황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이 진정한 왕권인지를 주도면밀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진정한 왕권의 본질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빌라도의 심문은 고발의 내용을 분명히 하며 시작됩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죄는 왕이 되고자 민중을 선동한 데에 있었고(루카 23,2 참조) “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들의 왕”(요한 19,19)이라는 십자가의 팻말이 이를 확인시켜줍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절) 예수님은 이 질문이 빌라도 자신의 말인지 유다인들의 말인지를 되물으십니다. 이에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35절)라며 고발은 유다인들 측에서 있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첫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받지 못한 빌라도는 다시 직설적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나라와 그 속성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할 시간임을 아시고 선언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36절) 사실 지금까지의 예수님은, 수직적 권력체계를 군림의 힘으로 사용하던 기득권자들이나 통치자들에게 적대적이셨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들의 움직임에 부정적이셨으며 스스로 왕이라고 천명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분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시간과 가장 위험한 장소에서, 즉 로마 총독의 관저와 사형선고를 받을 죽음의 시간 앞에서 당신의 왕국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만 당신의 나라는 기존의 통치, 즉 지배와 군림, 선동과 전복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님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 흘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차별성을 갖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나라가 지배와 군림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파스카야말로 매우 적절한 기회였습니다. 가장 많은 군중이 예루살렘에 집결하고 모이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폭동이나 대항이 아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힘을 통솔의 원칙으로 삼습니다. 권력 지향적 통치가 아닌 진리를 증언하는 통치를 지향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빌라도는 재차 고발 내용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왕권을 완벽히 선언하는 또 다른 자리가 됩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37절)

■ 진리의 증인

구원의 ‘진리’를 알려주러 오신 예수님은 진리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서’ 죽으십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성실한 증인”(묵시 1,5; 제2독서)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심으로써 이룩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전적인 사랑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성실한 증언’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바치는 통치는 그 어떤 힘도, 심지어 죽음의 힘까지도 이겨냅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의 맏이”(1,5)라고 묘사합니다.

■ 영원무궁한 나라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인류의 역사는, 제아무리 절대적 명성과 화려함으로 세상을 지배한 나라라 해도 언젠가는 쇠퇴와 몰락의 역사를 겪지 않은 적이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통치하는 나라는 멸망하지 않고 그 영원성을 유지할 것임이 선포됩니다.(제1독서) 그래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지상에 드러난 하느님이시며(1,8) 알파와 오메가(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엄한 선포로 교회력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다음 주일부터 새로운 전례력의 본문을 읽게 됩니다.

사람은 지독한 억압을 받으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게 된다고 합니다. 아무리 공동선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이루어진 혁명이라 하더라도 공포와 살상, 위협과 파괴가 숨어있는 것이라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참혹한 폭력의 또 다른 변주(變奏)가 될 뿐입니다. 혁명도 진보도 저항도 타인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질 때 치명적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진리는 현재의 체제를 견고히 다지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증언해야 할 본질이요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내용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상처와 아픔, 분노와 슬픔, 굴곡과 뒤틀림을 온전히 받아안고 자신을 헌신하는 권위만이 군중을 모이게 하고 기꺼이 추종하게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랬고 그 나라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를 알지 못할 때 통치자들은 진리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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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 가톨릭신문 2018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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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일 년을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넘어 영원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주간을 성서주간으로 지냅니다.

오늘의 이 축일은 일 년의 전례를 종합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전 삶을 종합하고 있습니다. 곧 전 구원사를 장엄하게 압축하고 있습니다.

<제1 독서>는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환시입니다. 이 환시에서는 영원한 왕의 다스림 속에 하느님의 창조계획과 역사계획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2 독서>는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이 편지에는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단지 예수님을 왕이라고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왕직의 신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왕직은 세상의 왕직과는 달리, 위에서 온 것으로 당연히 그 기능도 다름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오늘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천지창조 이래 펼쳐진 구원의 모든 사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고백합니다. 곧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그 나라가 주어지고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고 선언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론적인 선상에서, 그리고 전 역사를 함축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왕으로 선포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 부여한 왕이라는 의미는 한 시대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자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의 전권을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과 천상적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구원과 평화는 세상의 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따라서 그분의 나라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체험되는 나라입니다.

<제2 독서>에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신 분”, “우리가 당신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분”,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하느님이시며, 창조주요 동시에 완성자이시오,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우주공간을 넘어 시간의 왕이심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은 세상의 왕국과는 다르며, 왕이신 당신의 존재는 세상의 왕이라는 존재와는 다름을 선언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요한 18, 36)

또한 그 통치는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왕으로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 37)

사실, 예수님께서는 남이 당신을 왕으로 받들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이 억지로라도 당신을 왕으로 삼으려할 때, 되레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죽어서야 왕이 되셨습니다. 결국, 죽음으로 진리를 증거 하셨습니다.

따라서 당신께서 왕이시라 함은 세상의 왕들처럼 모든 이 위에 군림하는 힘을 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세상의 왕은 힘으로 세상을 자기 아래 복종시키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왕은 진리로 세상을 창조하고 건설합니다. 세상의 왕은 다른 이들이 자기에게 충성할 것을 바라며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를 바라지만, 그리스도 왕께서는 사람들이 당신께 충성하기에 앞서, 먼저 신뢰로 사람들을 섬기십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에 충실하여 자기의 목숨을 남을 위해 내놓으십니다. 당신 스스로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당신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다운 왕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증거 하는 왕의 참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들입니다. 나아가서, 섬김으로 진리에 헌신하는 그리스도 왕직의 계승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는 우리가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하는 곳에는 이미 와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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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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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요한 18,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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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흰 눈이 땅으로 내려앉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먼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스도왕으로 시작되고 그리스도왕으로 마무리되는 우리의 전례력입니다. 부족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서 완성시켜주십니다.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시작이고 매일 매일이 마무리입니다.

임금이신 주님께로 돌아갈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왕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수없이 우리를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반성합니다. 노동과 봉사의 모습으로, 희생과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늘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헤아릴 수 없는 넘치는 사랑에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왕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왕께서는 올 한해도 우리를 껴안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끝까지 우리가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다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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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5
447 45.6%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닌 섬김과 봉사의 왕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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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떠난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은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인해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고초를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관리들의 실무 지침서 격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합니다.

목민심서 안에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공직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어떤 덕목을 지녀야 하는지? 어떻게 백성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 시대 공직자들에게도 유효한 불멸의 명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습니다.

“훌륭한 수령은 고을을 떠난 후에도 사랑은 남습니다. 수령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 기준은 수령이 고을을 떠난 후 백성들이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는 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즉시 떠오르는 인물이 한분 계십니다. 이제는 고령으로 사목일선에서 물러나셔서 케냐에서 투병 중이신 원선오 빈첸시오 신부님이십니다.

가끔씩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살레시오중고등학교 동문들을 만나면 정말이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동문들이지만, 만났다 하면 원선오 신부님에 얽힌 추억을 떠올립니다.

즉시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다들 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분은 정말이지 참 목자, 참 스승이셨습니다. 제게 그분은 아버지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그분이 건넨 감동과 은총이 얼마나 특별했으면,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분을 잊지 못했습니다.그분이 남긴 흔적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더 큰 여운을 남기며 되살아났습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지만,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종이 되신 분이셨기에,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사신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목자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일정 기간 머물며 봉사하다 떠난 후, 본당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은 우리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목자들의 떠남이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입니까? 혹시라도 반대로 우리의 떠남이 너무 기뻐 박수를 치고 용약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물 좋은 한 자리’를 추구하는 출세주의자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기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긋납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성취나 야욕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리스도교를 망신시킬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맞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동일시되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욕심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권력은 섬김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교회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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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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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   [춘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4] 2940
696   [안동]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표징  204
695   [군종] “끝에서 만나는 은혜로운 시작”  179
694   [마산] 내 삶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221
693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 세계가난한이의날  [5] 1944
692   [수도회]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  [4] 2732
691   [수원] 사랑은 작은 법이 없다  [4] 2712
690   [군종] 컵에 우유가 반밖에? 반씩이나?  [1] 2364
689   [부산] 참된 봉헌  [5] 2520
688   [안동] 나눔은 변화된 삶!  [2] 2581
687   [춘천] 정성어린 이 제물  [4] 2784
686   [의정부] 하느님과 공동체를 위한 카리스마  [4] 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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