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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고백하자! 누가 왕인가?
조회수 | 2,062
작성일 | 06.11.25
동물들은 대체로 필요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자기가 사냥한 먹이를 먹다가도 더 힘센 동물이 다가오면 그 먹이를 버리고 돌아선다. 그런데 동물의 세계에서도 거의 드물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자신의 힘만 믿고 욕심을 부리다가 그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켜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까지도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언젠가 TV에서 이런 경우를 본적이 있다. 표범이 자신이 사냥한 영양을 나무위로 높이 끌어올려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발견하고 쫓아온 사자가 발을 동동거리다가 그 먹이에 욕심을 부리며 나무 위를 기어이 올라가서 화를 당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실 사자도 고양이 과라 나무는 탈 수 있지만 나무타기의 명수는 아닌지라…. 표범이 사냥한 영양을 빼앗아 의기양양하게 먹고 내려오다가 안타깝게도 그만,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허리가 부러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모습이 방영되었다.

동물의 세계를 가만히 살펴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다. 기왕에 세상에 태어났으니 보다 더 잘 살아야한다는 명제는 인간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님을 보게된다. 이렇게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왕성하게 펼쳐가기 위해 다양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동물들의 지혜를 보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만의 독특한 삶의 지혜로운 방식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동물들은 사냥을 할때는 물론 포식자로부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위장을 하거나 의태(나뭇잎이나 나뭇가지, 혹은 꽃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몸을 변화시키는 방법), 허세와 위협, 공생을 하거나 무리를 지어서 살아간다. 그러나 동물들이 살기위해 보이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늘 위험의 그림자를 재빨리 인식하려고 하는 예민함과 또 그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것과 가능한 멀리 떨어져 안전한 곳으로 죽을힘을 다해 줄행랑치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훌륭한 삶의 지혜로 비쳐진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환경 속에서 생명으로 이끌어줄 것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구분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줄 아는 태도야말로 주어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알량한 재능과 능력, 힘만 믿고서 우악스럽게 덤벼드는 세상살이에 내포된 위험성을 깨닫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출 줄 아는 태도야말로 정말 경건한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중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왕은 많은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예수님께서는 늘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남을 섬겨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모습에서 당신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힘을 과시하는 모습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사람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권위와 권세 그리고 가늠할 수 없는 능력을 보고서 예수님을 세속의 왕(요한 6장15)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번번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피해서 조용히 산으로 물러가셨던 분이심을 기억해본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며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고 희망하면서도 그분에게서 세속의 권력을 원하고 있다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을 ‘조용히 물러가라’고 등 떠미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되고 말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며 세속적인 기대와 희망을 물리치고 계시는 예수님. 그분의 나라에 함께 있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신실한 백성은 자신의 희망과 기대를 예수님의 희망과 기대에 맞추어야 한다. 이로써 예수님이 진정 왕중의 왕이심을 온 세상에 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 일컬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천교구 김성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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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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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한 나라에 비만 치료에 탁월한 성과를 내는 센터가 있다고 합니다. 보통 비만 치료라고 하면 식이ㆍ운동요법, 약물치료, 수술 등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센터는 이런 치료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하네요. 그 방법은 바로 정기적으로 나체사진을 찍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체사진을 크게 인화해 환자들이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환자들이 알아서 식사량을 줄이고 스스로 운동해 체중 감량에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이 센터에서 판단한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자기 몸을 스스로 바라보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이가 다른 사람들만 바라보며 삽니다. 다른 사람들만 좋은 걸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그에 반해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초라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십니까? 나를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말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먼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걸 알 수 있으며, 다른 이를 향해 여유 있는 사랑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외부 어떤 장애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서 자신의 행복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높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대신 주님의 뜻에 맞춰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임금이신 예수님을 기리는 날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권위와 재력 같은 물리적인 힘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참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라고 심문할 때에도 떳떳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 사라지지 않고, 그분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습니다.(다니 7,14 참조) 반면 우리는 유한하고, 곧 사라질 이 세상만 바라보며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요? 스스로 자존감을 낮추고 힘없이 사는 건 아닐까요?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고 있듯, 주님께서는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그분께서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셔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묵시 1,5 참조)

주님과 함께할 때 저절로 자존감은 높아집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지켜주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할 때 힘을 내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영광을 얻는 방법이 아닐까요? 이제는 세속적인 기준만 내세우는 어리석은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집착하면 자연스럽게 주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기준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여행할 때 짐이 많으면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습니다. 단출하게 필요한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지만, 오로지 주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을 느끼지 못하고 힘들다고 외쳤던 건 아닐까요?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7)고 말씀하십니다. 참 진리 자체이신 주님께 속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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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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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어떤 왕을 모시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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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로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세상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며, 그분의 왕권에 순명하고 더 많이고 따르기로 다짐하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총독 빌라도에게 끌려가셨다. 당시 상황에서 유다인들은 로마의 속 국에서 벗어나 독립을 꾀하려고 무척 애를쓰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유다인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고 독립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한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죄목은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것이었다. 곧 스스로 유다인의 왕이라 청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고 예언서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길이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묻는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18.33)빌라도가 관심을 갖는 것은 세상 속에서의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속한 왕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다.

빌라도가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싱에 왔다.’(요한18.3)라고 대답하신다. 이 응답은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것이고 사랑과 정의, 평 화와 기쁨, 진리가 지배하는 하느님 나라를 증언하러 왔다는 말씀이다. 그러한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근원적인면에서 참 왕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진정 어떤 왕이신가?

예수님은 먼저 사랑의 왕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지내는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셨다. 어린아이들부터 자신을 가혹하게 고문을 하고 조롱을 하고 고통을 주었던 이들 까지도 사랑하셨다

예수님은 자비의 왕이다. 세상에서 소외받는 이, 천대받는 이, 멸시 받는 이, 육체적으로 온천하지 못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베푸셨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다. 발걸음이 닫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평 화 를 나누셨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평화를 주시며 온 세상에 전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해방의 왕 이 다. 묶인 이들, 갇혀 있는 이들, 죄인들, 어둠 속에서 헤 매고 있는 이들, 종살이 하는 이들에게 해방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왕이다.

오늘은 우리의 진정한 왕을 모시고, 감사를 드리고, 그분의 삶을 따르며 충성과 순명을 통해 떳떳하고 굳건한 믿음의 삶을 다짐하는 날이 되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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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교구 한관우 가누토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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