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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자렛 예수님, 당신은 저와 상관이 있습니다.
조회수 | 2,028
작성일 | 09.01.31
정채봉 선생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의 글입니다.

까치네는 오늘 아침에도 부부 싸움을 벌였다.
“까치까치까치” 사흘이 멀다 하고 일어나는 말다툼이었다. 저녁이 되어 남편까치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둥지에 불평 귀신이 붙은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주 싸울리가 없어”
아내 까치 또한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걱정 귀신, 불평 귀신 다 붙어 있는 것 같아요. 둥지에 오면 걱정 불평이 그냥 쏟아지니...”
부부 까치는 이튿날 산 까치 도사를 찾아갔다.
“처음엔 저희 집이 안락 둥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걱정 불평 둥지입니다. 귀신이 붙은 것 같사오니 그것들 쫓아내는 비방 좀 가르쳐 주십시오.”
산 까치 도사가 말했다.
“우리들은 기쁨을 ‘까치까치까치’하지요. 마찬가지로 불평도 ‘까치까치까치’하지요. 이 기쁨과 불평도 한 입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귀신이 시켜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이죠. 다만 기쁨은 첫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반해 불평은 묵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둥지를 틀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불평이 걷히고 기쁨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1,24) 이 말은 왠지 오늘날 무신론이 팽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외침과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 하느님 없이도 나는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야.” 사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접하는 온갖 정보와 지식, 삶의 수단들은 온통 하느님 없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선전하는 광고내용에도 결코 하느님의 자리는 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신부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부탁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느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전쟁에서 패했고 수많은 부하가 죽음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쟁의 패배로 결국 그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해군 넬슨 제독은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시 127,1)라는 성경 말씀을 외우며 믿었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종 신부님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기게 하셨고, 그 결과 영국도 살고 자신도 살고 부하들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사의 주관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좋은 계획과 뜻을 품고 새해를 시작한지 한 달입니다. 이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의 마음은 넬슨 제독처럼 매사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며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와 상관이 있습니다. 부디 저희를 떠나지 말아 주소서!”
  
김용환 세례자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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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카파르나움 회당,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몹시 놀라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하느님 말씀에 대하여 정통 있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가르침에는‘권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마르12,38-39)”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심,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허영심이 오히려 그들 자신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는 훌륭한 언변이나 학식에서 비롯된 권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시키게 하는 높은 지위나 권력에서 비롯된 권위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권위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회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 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위,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오는 권위로 사람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악령은 예수님께“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하고 소리칩니다. 이 소리는 신앙을 고백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부터 오는,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오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는 있지만, 하느님의 뜻은 알지도 못하고, 그 뜻을 따르지도 않습니다. 권력과 힘에 의존하며, 두렵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악령의 소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권위로 말씀하십니다.“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이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나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언제나 하느님께서 드러났으면 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이 함께하시고,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모습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모여 있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이현수 바오로 신부
  |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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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렸을 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오면 꼭 손을 닦으라는 부모님의 말씀이었지요. 그 이유는 더러운 병균이 외출 나갔다가 혹시 손에 묻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라는데, 문제는 그 병균이 제 눈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이 이야기하지 않으면, 또한 부모님이 보지 않으면 손을 안 닦고 다닐 때가 많았지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이렇게 손을 닦지 않으면 어떨까요? 또한 바닥에 떨어진 음식도 병균이 눈에 보이냐고 하면서 주워 먹는다면 어떨까요? 보이지 않는 병균으로 인해 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병균. 그러나 분명히 있는 병균입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라고 불리는 마귀는 있을까요? 없을까요? 나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것 역시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이 더러운 영의 유혹에 종종 넘어가곤 합니다. 그것도 하나의 영이 아닌 여러 개의 영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보세요. 그는 예수님을 보고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즉, 그 사람 안에 여러 개의 더러운 영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는 유혹들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의 유혹만 있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유혹들. 그 유혹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더러운 영의 또 다른 모습인 것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출세(성공) 지상주의, 마술적 신비주의, 기복신앙 등등……. 이러한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주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어떤 교양 넘치는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자기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갔다가 자기 아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둘러 싸여서 매 맞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교양이 넘치는 어머니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머~ 얘들아, 사이좋게 지내야지? 친구를 그렇게 괴롭히면 되겠니?”라면서 교양 있는 목소리로 젊잖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니지요. 교양 있는 어머니지만 이렇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괴롭히는 아이들을 향해서 뛰어갈 것입니다.

“야 이놈들, 누구를 괴롭히는 거야? 너희 다 죽었어.”

예수님께서 왜 더러운 영을 꾸짖으셨을까요? 예수님의 신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래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홍보해주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곧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새끼 사자와 다 큰 하이에나가 있습니다.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다 큰 하이에나가 이기겠지요. 그런데 이 하이에나는 새끼 사자를 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새끼 사자 옆에는 어미 사자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어미 사자와 같이 힘쎈 주님의 곁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이 악의 세력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어렵게 살게끔 만드는 황금만능주의와 출세지상주의, 마술적 신비주의 및 기복신앙이라는 잘못된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주님 곁을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조명연 신부
  |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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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파르나움으로 향하신다. 때는 안식일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회당을 찾으시고 가르치신다. 유다인 회당 예배는 의식적인 부분과 교훈적인 부분으로 나누는데, 예수님께서는 교훈적인 부분을 맡으셨던 것 같다. 율법과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고 해석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던 이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고 한다. 유다인이면 어렸을 때부터 배우고 익혀 잘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을 텐데,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왜 그리도 놀라워하였을까? 율법과 예언서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었을까?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율법 학자들도 권위 있게 가르쳤겠지만, 예수님은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분이 어떻게 새롭고 권위 있었는지는 더러운 영의 외침을 통해 드러난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분의 권위는 세상과 사람들의 권위와는 판이하게 다름을 뜻한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세와 권위를 들어 높이려 한 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위를 내려놓으셨음을 말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가르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 6-7)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라고 말한다. (필리 2, 9)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새롭고 권위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분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언제나 율법에 의해 세상을 단죄하시는 분으로 소개했던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억압했다면, 사랑과 자비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임에 분명하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새롭고 권위 있게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주장이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새롭고 권위 있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일상의 삶 속에서 체험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복음답게 선포할 힘과 능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교구 윤만용 바오로 신부>
  |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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