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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
조회수 | 2,232
작성일 | 09.01.31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마르 1,21-28)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라는 반응과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이다. 이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인가?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가?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인가?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가?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보라. 예수님이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니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네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자기 멋 대로 사는 사람이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이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예수님을 보고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라고 놀랬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늘 새롭고 권위 있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생활도 늘 새로워지고 풍요로워 진다.  그런 영혼이 건강한 영혼이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무슨 뜻인가? ‘가르침’은 그리스어로 ‘디다케’(Didache)라 하고, 라틴어로는 ‘독트리나’(Doctrina)라 한다. 이 말은 ‘가르침, 교훈, 원리, 원칙’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원칙이 있다. 식물이면 식물이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 있고 동물은 동물의 원칙이 있다. 기차는 기차의 원칙이 있고 자동차는 자동차의 원칙이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사고가 난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서의 원칙이 있다. 원칙은 하나의 질서이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개성이고 특성이다.

이런 원칙이 무시될 때 혼란이 오고 불행해진다. 인간 최초의 불행은 이 원칙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가 난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불행이 온 것이다. 이제 원칙에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다.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은 바로 이런 원칙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예수님께서 권위를 갖고 가르쳐 주시는 새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우리 신앙생활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더러운 영을 내 안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들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도와 줄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이 말씀만이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권위 있는 새로운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빛이 들어가면 어둠은 물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어붙은 물도 따뜻한 햇빛이 들어가면 녹기 시작하는 법이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모든 악에서 더러운 영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주신다. 그 더러운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생각들이나 사고들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그 가르침을 듣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깨닫고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내 안에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하고 또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마르코 복음은 앞으로 이 새로운 가르침이 점차로 퍼져 나가면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 가를 전해 줄 것이다. 마치 마른 사막에 물이 흘러 들어가서 생기를 되찾아 주듯이 새로운 가르침이 내 마음 안에 놀라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또 귄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많이 건설될 것이다

성바오로회 유광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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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리에서 구원을

여러 가지 행사 참석이나 소풍 등으로 고속도로를 자주 타는 편입니다. 웬만해서는 수련자 형제들에게 핸들을 맡기지 않는데, 아주 가끔씩 부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드는 느낌이 한 가지 있지요. 제가 직접 운전을 할 때는 전혀 못 느끼던 것인데, 다른 누군가가 운전할 때면 그렇게 불안할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간섭을 하게 됩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자네는 왜 그렇게 차간 거리를 바짝 붙이나?”
“조심, 조심, 옆에 차가 끼어 들어오잖아!”
“어이, 좀 천천히 못 달리겠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최고 120Km 절대 넘기지 말라고, 알았어?”
착한 형제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예! 알겠습니다!”만 연발합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제가 운전을 할 때였습니다. 행사 시간이 꽤 촉박했습니다. 규정 속도로 가다보면 빠듯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필 옆자리에 앉아있던 형제는 지난번 제가 단단히 야단치며 교육시켰던 바로 그 형제였습니다. 어쩔까 하다가, 특수상황이니만큼, 하면서 좀 밟기 시작했습니다. 130, 140, 150, 160... 바로 그때 그 형제의 입이 점점 벌어지고, 눈이 점점 커지더니, 다급하게 하는 말,

“신부님, 지금 160이예요. 지난번에 저더러는 절대 120넘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아,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흠흠, 아, 그랬지? 그래도 지금 자네도 보다시피 시간이 많이 촉박하지 않은가? 뭐 이럴 땐 어쩔 수 없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 적나라한 실상을 후배에게 제대로 들키게 되어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습니다. 권위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 쌓아가야 하는 것이겠지요. 권위의 배경에는 반드시 갖춰져야 할 기본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언행일치입니다.

요즘 대다수의 국민들, 정치인들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예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돌립니다. 투표장에도조차 가지도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행일치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때 그들이 선거 전에 내세웠던 수많은 장밋빛 청사진들, 요란스러웠던 공약들에 귀가 솔깃할 때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렇게만 된다면, 하는 생각에 귀중한 한 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거의 말잔치로만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본인 스스로 했던 약속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습니다.

반면 예수님을 보십시오. 말씀하신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 말씀이 실현됩니다. 악령 들린 사람 앞에서 내가 언제까지 악령을 고쳐주마, 하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한번 최선을 다해보겠다, 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악령을 물리치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을 악령으로부터 해방시키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이처럼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권위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필요 앞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으시고 즉각적으로 움직이시는 역동성의 주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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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삶, 권위있는 삶

신명18,15-20
1코린7,32-35
마르1,21ㄴ-28

거룩함과 권위는 함께 갑니다. 거룩함이란 말마디가 고맙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원초적 갈망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마음 깊이에는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거룩함에로 불림받고 있는 고귀한 품위의 사람들입니다. 거룩함을 상실해 가는 세상일수록 역설적으로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집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아프리카 항가 수도원 소속의 버나닌 수사를 만날 때 마다 덕담을 주고 받으며 유쾌해 할 때가 많습니다. 산책 중 성물방에 들려 제가 먼저 말합니다.

"I come to see you, holy monk(나는 거룩한 수도승인 너를 만나러 왔다)!“

하며 버나딘 수사에게 강복을 주면, 버나딘 수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히려 제가 거룩한 수도승이라 하며 손을 내젓습니다. 좀 더 있다 가라 하면 저는 가야 한다 하며 또 기쁜 마음으로 덕담을 나눕니다.

"I always pray for you in my room(나는 언제나 너를 위하여 내 방에서 기도한다)“

짧은 영어지만 이렇게 이심전심 통함으로 크게 웃고 헤어지면 마음이 참 상쾌합니다. 이런 주고 받는 영적 덕담이 거룩함에 대한 원의를 불러 일으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미사 중 신명나게 부르는 부분이 '거룩하시다' 일 것입니다. 저 역시 미사 집전 중, 감사송에 이어 마음을 모아 형제들과 함께 힘껏 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합니다. 이런 거룩함의 기회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

아무리 불러도 싫증나지 않는,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 거룩함의 찬미입니다. '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도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惡)에 대한 처방은 선(善)이 아니라 거룩함(聖)입니다. 악은 거룩함의 빛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여실히 입증됩니다. 바로 1독서에서 모세가 말하는 예언자의 출현은 바로 예수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 가운데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 더 이상 숨을 수 없어 뛰쳐 나오며 고백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더러운 영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님 정체를 분명히, 정확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거룩한 말씀의 '생명의 빛'만이 악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에 즉시 복종하여 떠나는 더러운 영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의 힘만이 더러운 영을 퇴치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목격한 자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이 통쾌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 구나.“

거룩함과 권위는 함께 갑니다. 거룩하신 주님께서 새롭고 권위있는 말씀으로 명령하시니 더러운 영이 복종합니다. 참 권위를 갈망하고 찾는 사람들입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지도자의 신뢰와 권위가 실추됨으로 인한 혼란과 불신의 폐해는 얼마나 큰지요.

거룩함에 대한 갈망과 참 권위에 대한 갈망을 일거에 충족시켜주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아니곤 우리의 거룩함에 대한 갈망을, 권위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은 세상 아무 데도 없습니다.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우리를 거룩한 사람으로, 존엄한 품위을 지닌 참된 권위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 모두 세례성사를 통해 거룩함의 여정은 시작됐고 이 또한 평생과정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 권위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요, 우리의 유일한 인생 목표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사람, 권위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요?

첫째, 온 몸과 마음으로 평생, 끊임없이 성체성사(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주님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닮는 으뜸의 수행이자 믿어야 할 신비, 거행하여야 할 신비가 성체성사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무상의 선물이요 교회시작의 원리이며 친교의 토대인 성체성사입니다. 모든 성사들의 중심이요 순례하는 교회를 위한 하느님의 선물인 성체성사입니다. 이런 성체성사에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자발적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거룩함의 지름길입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성체성사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하느님의 아름다우심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성체성사입니다. 복음과 똑같은 주님께서 미사를 통해 우리 안의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우리를 정화, 성화시켜주시고 위로와 치유를 주십니다. 미사 중 감사송에 이은 성령 청원과 더불어 축성 기원문은 얼마나 장엄하고 은혜로운지요.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늘 경문을 읽을 때마다 감동하는 기도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성체와 성혈을 모심으로 날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우리를 부단히 거룩한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은퇴하여 양로원에서 노인 신자들을 돌보시는 아빠스님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나는 휴가도 못간다. 이 노인분들에게 낙이라곤 미사뿐이 없는데, 내가 미사를 안하고 어떻게 휴가를 갈 수 있겠나!“

정말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이, 낙이 없다면 무슨 기쁨, 무슨 낙으로 사막인생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거룩함의 지름길은 온몸과 온맘을 다해 평생, 죽을 때까지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에 저절로 따라오는 참된 권위입니다.

둘째,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의 수행입니다.

시편보다 더 좋은 기도의 학교도, 기도의 책도 없습니다. 수천년간 검증되어온 시편입니다. 모든 성인들이 이 시편기도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가 우리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 찬미와 감사의 갈망이 있고,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시편 기도수행으로 참된 수도자는 물론 참된 신자, 참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모상'의 실현이 아니라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수행이 있어 거룩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사람이 됩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사람인 우리들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에겐 더욱 그러합니다. 도대체 찬미의 기쁨, 찬미의 힘이 아니곤 무슨 기쁨으로, 무슨 힘으로 사막 같은 인생 살아 낼 수 있을런지요. 하여 사부 성 베네딕도도 당신 수도승들에게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 하십니다.' 수도자 영성이 보편화되는 시대, 모든 신자들에게 간곡히 권하고 싶은 것이 시편성무일도입니다.

오늘 2독서 바오로의 말씀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모두가 결혼하지 않을 수는 없고 이것은 주님의 원하시는 바도 아닙니다. 권고의 핵심은 결혼하든 않든 중요한 것은 갈림없는 마음으로 품위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일이요,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가 이를 이루어 줍니다.

아, 바로 이런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기도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게하고 주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으로, 의미 충만한 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저절로 허무와 무의미의 영적 질병도 치유됩니다. 진정한 위로와 치유, 평화와 기쁨, 정화와 성화도 순전히 하느님 찬미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거룩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입니다.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찬미와 감사의 전례기도는 삶으로 직결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을 본 받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권위는 셋으로 요약되며 오늘 복음에서도 분명히 입증됩니다. 마음의 권위, 말씀의 권위, 행동의 권위입니다. 마음의 권위는 연민의 사랑에서, 말씀의 권위는 생명과 빛을 통한 치유에서, 행동의 권위는 섬김에서 잘 드러납니다. 연민의 사랑, 말씀의 권위, 섬김의 행동이 삼위일체 하나가 되어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치유를 이뤄줍니다. 주님의 거룩한 권위의 위력이 참으로 큽니다.

주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예수성심의 사랑이 되고, 우리의 말은 주님의 말씀이 되며, 우리의 행동은 섬김의 행동이 됨으로 거룩한 삶이 성취됩니다. 우리가 참회시 '고백의 기도'를 바칠 때 서두 부분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를 성찰 할 때 생각에다 사랑을, 말에다 말씀을, 행위에다 섬김을 더해보면 우리의 죄도 뚜렷히 부각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외없이 거룩한 삶으로 불림 받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거룩한 칠성사(七聖事)가 의도하는 바입니다. 하여 사랑의 성사, 성사의 교회라 일컫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거룩한 품위와 참된 권위입니다. 매일, 평생 정성을 다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을 날로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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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한 사랑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쿨하다’는 말이 유행합니다. 영어의 “Cool"이라는 말에서 온 표현으로 관계나 감정의 뒤끝이 없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풀어서 얘기하면 연인 관계가 끝났음을 한 쪽이 선언했는데도 다른 한 쪽이 감정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거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이으려한다면 그것은 쿨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쿨한 것은 관계나 감정에 있어서 지저분하지 않은 것이고 깨끗이 정리를 잘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더러운 영이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하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입니다. 주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함으로써 당신은 왜 쿨하지 못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참으로 쿨하지 못하십니다. 우리가 싫다고 해도 주님은 사랑한다고 하시고 우리가 관계를 끊어도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이런 사랑이 정말 지저분한 미련이요 끊지 못하는 애착에 불과한 것일까요?

사랑과 미련, 사랑과 애착이 같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입니다. 사랑은 나의 필요가 아니라 그의 필요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애착은 그의 필요가 아니라 나의 필요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습니다. 애착은 그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미련 때문에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가 나를 싫다고 하고 그래서 필요 없다고 해도 그의 속 필요를 알기에 떠날 수 없습니다.

애착은 그가 나를 싫다고 하고 그래서 필요 없다고 해도 지금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워 떠날 수 없습니다. 마치 요즘 투자한 주식이 반 토막이 났는데도 투자한 것이 아깝고 다시 반등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포기치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애착하는 것은 더러운 영입니다. 더러운 영이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 세상을 어슬렁거리고 이 세상 것을 애착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이고 그러느라 하느님과 관계성을 부정하는 영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제 2독서는 이 세상 것에 애착하지 않는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성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천착하고 매달리어 이 세상에 대한 애착도 애착으로 인한 걱정도 초월하는 사랑을 살아갑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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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작은 예언자들

“나는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줄 것이다.”

예언자의 일반적인 뜻은 미래의 일을 내다보고 미리 얘기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의미는 미래의 일을 얘기해주기도 하지만 본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이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이란 현재적 예언과 미래적 예언 둘 다 있는데 현재의 예언을 듣지 않으면 미래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담배를 끊으라는 것은 현재적 예언이고, 그렇지 않으면 5년 뒤에 폐암에 걸릴 거라는 것은 미래적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예언이 자기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고, 참 예언자는 자기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요즘 시국문제랄까 사회문제를 얘기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참 예언자라면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해선 안 됩니다. 그런데 만일 누가 거짓 예언을 하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두렵습니다. 저도 자주 우리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는데 제가 하느님의 사제와 수도자로서 진정 예언하고 있는지, 예언이 아니라 그저 저의 주장을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의 주장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 양 떠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두려움 때문에도 아무 말 하고 싶지 않고 듣기 싫어하는 소리 더 이상 안 하고도 싶지만 안 하면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더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기에 두려운데도 그리고 하기 싫은데도 매번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예언을 듣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한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예언자답게 전하는 것도 어렵고, 그리고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권위를 가지고 전하는 것도 어렵지만예언자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것은 예언자를 예언자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예언의 말인데 사람의 말인 줄로 알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언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바꿔 얘기하면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내게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모두 예언자일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늙어서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은 그 손님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여기고 대접합니다. 그 결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천사를 잘 대접하여 그 늙은 나이에 자식을 갖게 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많은 경우 나는 예언자라고 하며 오는 사람이 오히려 예언자가 아니고, 예언자로 자처하지도 예언자 같지도 않은 사람이 오히려 예언자입니다. 엘리아나 예레미야처럼 대 예언자는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소 예언자는 많이 있습니다. 물론 나도 소 예언자가 될 수 있지요.

우리는 모두 작은 예언자들임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 나에게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작은 예언자임을 묵상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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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으로 충분한

바오로 사도 서간 중에 가장 흥미진진한 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코린토 서간입니다. 서간을 읽다보면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향한, 그리고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을 향한 절절한 애정, 무한한 인내, 아버지로서의 사목적 사랑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자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길이 잘못된 길이지 아닌지 구분도 못하고 끝도 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어떻게 처신하겠습니까?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고, 호되게 야단도 치는가 하면 너무 화가 나서 입에 담지 못할 악담도 합니다. 오로지 타락의 끝으로 향하는 아들을 위해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목서한인 코린토서가 바로 그랬습니다. 코린토는 어떤 도시였습니까? 기원전 1000년전 쯤에 시작된 코린토는 지정학적인 특성상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다사다난한 역사와 함께 폐허와 재건이 반복되는 등 급격한 부침을 거듭한 도시였습니다.

지리적 요충지였던 코린토였기에 다인종, 다종교가 혼합된 개방적 도시로서 도덕적 윤리적 타락도 심각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고 있었고 음란과 환락이 만연하던 거대 도시가 코린토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가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회개와 복음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던 흔적이 코린토 서간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때로 질책과 경고를 서슴지 않고 때로 다정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도 아끼지 않습니다. 코린토 신자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는 과정에서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나 하면 밥 먹듯이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고통과 십자가 앞에 면역이 되어 그 어떤 환난 앞에서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련이 다가와도 오로지 주님의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며 아무런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체험했던 소중한 경험을 코린토 교회 신자들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 상태이기에 더 이상 세상의 일은 바오로 사도에게 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내면은 이미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더 이상 그 안에 이 세상의 고통, 세상살이로 인한 걱정꺼리들이 자리할 공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환난의 시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경험했던 그 강렬하고 절실했던 하느님 체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내면이 은혜롭고 감미로운 주님 현존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그 무엇도 우리 마음을 산란케 하지 않는 그런 상태, 세상이 주는 고통이나 시련이 크다 할지라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아닐까요?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눈물로 하소연한 것처럼 “우리 각자가 바로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이기에 주님만으로 충분한, 주님의 현존만으로 행복한 그런 신앙생활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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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롓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시와 억압통제와 간섭뿐인 무의미한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나누는 관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영혼의 절규처럼 어두운 영은 가슴을 찌르며 주님을 마주합니다.

삶이란 가장 먼저 주님과 관계를 맺으며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근원적인 치유는 먼저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조용히 하여라."

삶에 대한 인식은 주님에 대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처럼 사람됨이 무언지를 고민하며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거기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무수한 욕망의 존재이지만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거기에서 욕망을 넘어선 새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두운 욕망은 결코 우리의 삶을 지탱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삶을 맡겨야 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환희의 기쁨은 주님 뜻에 복종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생명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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